손홍규의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완화된 표현일 뿐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결단코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 싶다. 처음 만져보는 연장처럼 그의 글은 낯설고 서먹했고, 머릿속 좁은 공간에도 내가 아직 모르는 숨겨진 광장이 있었는지 이해의 영역 밖에서 부끄럼을 타며 한동안 부유했다. 짤막짤막한 글에 이해하고 자시고 할게 뭐 있느냐, 싶겠지만 글이라는 게 본디 남녀의 만남처럼 수줍고 어색한 일인지라 가까워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던가.

 

소설가 본연의 작품을 먼저 읽지 못하고 그가 쓴 산문집부터 읽는다는 게 조금 께름칙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부터 3년 반 동안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 〈손홍규의 로그인〉을 묶은 산문집이라는 이 책에는 당시에 썼던 180여 편의 글 중에서 138편만이 실렸다. 내가 책에서 만난 작가는 성격이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듯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으니 순전히 그의 글에서 받은 첫인상이지만 말이다.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느냐보다 스스로 다짐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어기면서 산다는 사실이 치욕스럽다. 그러나 아직도 지켜야 할 일들이 많다. 그대가 어떤 원칙을 품고 사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대에게만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타인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지키고 살아야 한다. 시련이 없을 때 우아해지기란 퍽 쉽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우아해지기란 쉽지 않다." (p.153)

 

"내 글이 못난 건 창작방법의 한계 때문이거나 부르주아가 아니어서거나 문학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못된 녀석이기 때문이다." (p.195)

 

작가의 글을 한마디로 평할 수는 없겠지만(물론 그래서도 안 될 터이고) 우선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흔히 쓰였으나 지금은 사라진 우리말을 그의 글에서 되살려 쓰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여축없다', '몰강스럽다', '각다분하다', '끄느름하다', '비루먹다', '메지구름' 등의 낱말들이 섬처녀처럼 수줍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에 붙여진 제목 중에는 역설적 표현이 많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드러운 직선', '아름다운 막말', '불온한 희망', 그리고 표제작인 '다정한 편견'도. 사회 현실에 대한 통찰의 글도 여럿 보인다. 물론 글이란 그 시대의 반영이긴 하지만 '순수'라는 글자를 달고 산 뒤편의 호젓한 곳으로 숨어드는 작가들이 차고 넘치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마조히스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곧잘, 우리를 짓밟고 무시하는 자를 통치자로 뽑지 않던가. 그로 인해 고통을 겪으면서도 되풀이하지 않던가.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비극적인 이유는, 이 시대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노동자와 그 식구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도 용산참사의 재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들은 끝내 이 세계가 디스토피아임을 증명할 것이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상상해도 그들은 디스토피아를 안겨줄 것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자들은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진부하게도. 끔찍하게도." (p.83)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에 속한 무리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글은 왜 언제나 정권에 저항하는 불손한 글로 읽히는 것일까, 생각하곤 한다. 불쌍한 자에 대한 연민, 돈 없고 빽 없는 자들의 연대는 왜 항상 그 순순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범죄의 온상으로만 몰고 가는 것일까. 작가가 쓴 매 꼭지마다 결론은 왜 항상 허공의 메아리처럼 속절없이 들리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살아도 살아도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발 한쪽을 과거에 걸친 채 살게 마련이다. 힘들었거나 철없었던 기억은 모두 잊고 과거가 갖는 순기능, 이를테면 순진했다거나 낭만적이었다거나 인정이 넘쳐났었던, 한마디로 그때로 돌아가고픈 어느 시점으로서의 기능만 펼쳐보곤 한다. 부모님의 눈에는 당신들의 결혼 사진에서 촌스러움보다는 그 시절의 젊은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엄혹한 현실에서 희망의 빛이라고는 한 줌 찾을 수 없을 때 과거의 기억은 더욱 선명한 법이다.

 

문학의 가치는 향유하는 독자들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지 문학을 창조하는 자들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작가의 글이 외면받는 이유는 문학을 향유하는 권리도 점차 기득권 세력에게 양도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소설이 태동하던 그 시기부터 마땅히 서민의 권리였던 그것이 그들의 손으로 점차 넘어가는 이유는 비록 그 누구의 강요나 억압이 개입된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살기 어렵다'로 요약되는 현실의 팍팍함이 서민들의 손에서 강탈하듯 빼앗아간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편견을 사랑한다. 아름답고 올바른 편견이 절실한 시절이다.” 외치는 작가의 진심이 문득 외롭다. 그와 어깨를 겯고 한나절 거닐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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