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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될 때까지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벚꽃향이 푸지게 퍼지는 천변 산책로에 선뜻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있다. 상춘객이 줄나래비를 선 주말 오후. 어쩌면 꽃내음보다 더 진한 향수 냄새에 머리가 아파질 것만 같아 강둑 위에서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하다는 말은 사람들을 얼마나 안심시키는지.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시간 동안, 적당한 감정의 기복으로 만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삶은 얼마나 쾌적할 것인지... 벚꽃향은 향수로나마 자신을 더 치장하고 싶어 안달하는 저 상춘객의 무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스러질 것임을 나는 그렇게 추측하며 한동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경숙의 초기 작품인 <강물이 될 때까지>를 무심히 꺼내 들 때는 언제나 마음이 메마른 때였다. 건조한 바람이 휑한 마음 한켠으로 소리를 내며 훑고 지나가고, 바람이 다 지나간 방심한 시간에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짐더미 위에서 툭 떼구르르 구르던 빨간 고무 다라이처럼 봄철의 건조한 풍경이 마음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는 매년 이맘때의 연례행사와 같은 것이리라. 이야기의 구조 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에, 단어 하나하나에 먼저 눈길이 먼저 가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음속에 흥건한 슬픔이 내려 앉을 무렵이면 시큰둥하게 던져버리곤 했던 그런 책.
"그때마다 망연해진다. 나도 모르는 구덩이 속으로 미끄러지는 기분이다. 생의 강줄기 한 자락을 움켜잡고 스물여섯 해를 흘러오는 동안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찾느라 허둥대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허전한 욕망이 가슴을 휘젓기도 한다. 곧 시들어버리긴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그 구덩이로부터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가슴이 달아오르기도 한다. 그 내팽개쳐짐과 희망 사이의 기복에 나는 잘 길들여져 있다." (p.12 '겨울 우화' 중에서)
깊게 패인 생채기 이후 뽀얗게 되살아나는 새살처럼 작가의 글은 수없이 찢겨나간 원고지의 깊은 고뇌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그 삶 속에서 망령처럼 떠도는 원죄의 주변을 호시탐탐 노리며 칼끝처럼 등장하는 성당과 최루탄 가스가 매캐하게 풍기던 8,90년대의 시대적 아픔이 겉도는 듯 등장인물의 주변을 끝없이 서성이는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낡은 토담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 골목길을 한나절 걸어야만 할 것 같다. 그늘 한 점 없는 그 길을.
"돌아다본 성당 첨탑이 뾰족하다. 꽤 넓게 퍼지고 있는 햇빛이 그 위에선 공평하지 못하고 이국적이다. 성당의 흰 벽칠은 삶아 널어 말린 흰 빨래보다 더 희고, 푸른 지붕은 마을의 낡은 슬레이트 지붕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햇빛 아래 성당은 늘, 학기가 반이나 지난 어느 날 불현듯 전학 와 운동장 포플러나무 밑을 걷도는 도회의 여자애 같다. 석양이 마을의 큰길 끝에 걸릴 때는 슬퍼보이기까지 하며, 아아, 이내 몸은 무엇 찾으려고......, 다시 이어지는 제창일까?" (p.223 '황성옛터' 중에서)
하늘에는 약솜을 찢어 놓은 듯한 구름이 몇 장 떠 있고 아랑곳없는 햇살이 쏟아지는데 나는 무료한 권태를 껴안은 채 무겁게 서있었다. 답장을 기대할 수 없는 편지처럼 환한 벚꽃에는 꽃망울처럼 숱한 추억이 자라고 있다. 신경숙 작가도 그랬을까? 데뷔작이었던 <겨울 우화>를 비롯하여 나중에 장편 소설로 개작한 <외딴 방>에 이르기까지 11편의 중,단편을 엮어 만든 그녀의 첫 소설집 <강물이 될 때까지>를 받아들었을 때 그녀의 가슴에도 추억의 벚꽃이 망울망울 벙글고 있었을까.
"내가 사는 이층방에서 내다보면, 늙은 한옥들 사이로 멀리 아득하게 높은 계단이 보인다. 의자에 앉아 그 계단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어딘가에 잊혀진 샛길이 있을 듯하다. 나 아니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개인적인 추락들을 바라보며 한없는 무망에 빠져 소설이라고 쓰면서, 내 소설들이 자연, 미학, 실천, 그 어느 울림도 되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희망이 못 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여전히 그런 마음으로 책으로까지 묶는다. 나는 이 슬픈 꼴을 버리고 다른 사유를 원한다." (p.6 작가의 말'중에서)
휴일의 해는 서둘러 진다. 울긋불긋 원색의 아웃도어 차림을 한 사람들이 벚꽃 만개한 천변을 따라 걷고 있다. 그 끝 어디쯤에서 그들이 만날 추억이 무엇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시간 속으로 점묘화처럼 사라지는 저 현실의 명멸이 언젠가 다시 3월에 만개하는 저 벚꽃처럼 피어나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