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 어쩌면 누구나 느끼고 경험하고 사랑했을 이야기
강세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방송작가 경력이 있는 작가들의 문체는 공통점이 많다. 숨이 넘어갈 듯 빠르고 짧은 호흡, 문법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구어체 문장, 의미를 파악하기조차 힘든 신조어들, 그리고 조울증 환자가 쓴 듯한 감정의 기복 등으로 인해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그닥 선호하지 않는다.(이렇게 쓰고 나니 내가 마치 조선시대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끔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할 일이 없어 뇌가 낮잠을 자는 경우라거나 아니면 할 일이 너무 많아 마냥 뻗대고 싶을 때가 그렇다.
"만나자부터 몇 시간에 걸쳐 대놓고 자랑질, 하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라며 하소연하는 척하지만 가만 들어보면 돌려까기 자랑질, 참을 수 있었다. 아니 마땅히 들어줘야 할 의무감도 들었다. 고생 많았던 친구였으니까. 연애에 있어서는 산전수전, 볼 꼴 못 볼 꼴, 지지리 궁상, 고생 많았던 친구였으니까. 이 얼마 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행복한! 연애란 말인가. 친구로서 마땅히 들어줘야 할 의무감도 들었다." (p.54)
이런 류의 책은 약간의 중독성을 갖게 마련이다. 같은 문체가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이런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 리듬의 의미도 없는 가사가 반복되는 어느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책의 앞쪽 몇 장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뭐 이런 책이 있어!' 하다가도 어느새 그 리듬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식이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아이구, 저것도 노래라구'하며 혀를 차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이 책의 저자인 강세형 작가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었단다. 이름이 그래서 나는 처음에 남자인 줄 알았다. '어라, 문체에서 여성의 향기가 나는데... 혹시 호모 아닌가?'하는 의심을 했드랬다. 나의 착각이 도를 넘었었다. 작가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옆에 있다면 사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밝혀두지만 강세형 작가는 여자다.
가끔 이런 책을 읽으면 일상에서 오는 팽팽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듯한 편안함이 있어 좋지만 중독성이 문제라면 문제다. 일단 한 번 맛 들이면 한 권으로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무작정 이런 종류의 책에 탐닉하다 보면 정말 할 일이 없어 방바닥을 긁으면서도 '나만 그런 게 아닌데 뭐.'하는 대책없음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순간이 기어코 오고야 만다. 시쳇말로 "폐인"이 되는 순간이다. 남이야 뭐라 하든 본인은 급할 게 없는, 부모의 속을 박박 긁어 곪아 터지게 만드는 그런 인간으로 전락한다.(너무 심한 거 아니냐구? 직접 한 번 해보시라. 시험삼아.)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어쩌면 이 사소한 귀찮음 하나하나가 쌓여, 나는 답답한 사람으로 변해갈지 모른다. 규칙놀이에 빠져버린 답답한 사람. 대한민국에선 헌법도 적법한 절차를 통해 바꿀 수 있지만, 그리고 분명 그러하다고 믿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 일상의 귀찮음을 요하는 사소한 변화에는 침묵하는 사람. 그래서 분노하지도 행동하지도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투덜거림은 많은 사람." (p.199)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추억과 잔잔한 일상, 그녀를 둘러싼 배경과도 같은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 달달하고도 아련한 연애 이야기,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사는 일의 어려움 등을 쓰고 있다.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이야기들을 작가는 현실감 있는 필체로 담아내고 있다. 때로는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고, 쿡쿡 웃음이 나게도 하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거리게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현생에는 결코 오지 않을 어떤 것을 기다리며 인생의 한나절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30대는 아직 젊은 나이고, 연애가 고픈 나이고, 돈보다는 꿈에 끌릴 수 있는 나이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런 나이일 거라고 강세형 작가의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삼십대가 내게 준, 우리에게 준 평온 중 하나다. 우리가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작가는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이십대가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었으니까. 이상과 현실의 차이. 내가 쓸 수 없는 글을 보면서 '나는 왜 안 될까. 이렇게 못 쓸 바에는 안 쓰고 말지.' 자학하면서도, '그래도 혹시......' 만에 하나의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오만으로 성과물 없이 괴로워하는 것."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