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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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는 점심을 먹은 직후에 의무적으로 운동장에 모여 반별로 포크댄스를 추어야 했었다.  다른 스포츠나 놀이도 많았을 텐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포크댄스를 어린 학생들에게 강요했는지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시절에는 그랬다.  산간벽지의 작은 학교에 다녔던 나로서는 다른 학교도 그랬는지, 또는 그것이 국가적 시책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포크댄스라 하면 으레 남학생과 여학생이 손을 맞잡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이었다.  요즘의 학생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을런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학생과 손을 잡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물론 여학생과 손을 잡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여학생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라도 나눌라치면 대화의 내용은 불문하고 온 학교에 아무개와 아무개가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곤 했었다.  그랬던 시절이었으니 손을 잡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놀림은 곧 남자로서의 불명예요 수치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던 나로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그 시간을 피하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양호실을 찾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서 반별로  모여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좌우로, 혹은 빙빙 도는 춤동작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작은 나뭇가지나 다 먹은 하드 막대기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그 익숙치 않은 동작을 따라하곤 했었다.

 

그때 매번 나의 짝이 되었던 여학생이 생각날 때가 있다.  간신히 이름만 떠올릴 뿐 얼굴의 윤곽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말이다.  키가 작달막했던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몹시 궁금해지곤 한다.  국민학교 동창을 만나도 6학년 때 전학을 갔던 그 여학생의 소식을 아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의 생각을 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었다.  서른일곱 살의 주인공 하지메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있다.  두 개의 재즈바를 운영하고 있는 성실한 사람이지만 가정과 삶이 안정될수록 자신은 무언가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어느 날, 초등학교 시절의 여자 친구였던 시마모토를 우연히 재회하면서 하지메는 시마모토에게 급격히 빠져든다.  나는 시마모토가 하지메에게 했던 이 말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잘 들으세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내게는 중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  내 안에 중간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고, 중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중간 또한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전부를 취하든지, 아니면 취하지 않든지, 그 어느 쪽 길밖에 없어요.  그것이 기본적인 원칙이에요."    (p.215)

 

하루키의 소설치고는 그리 길지 않았던 이 책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인간은 삶이 지속되는 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혼재되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시마모토는 그 시간의 혼재, 시간의 중첩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과거와 혼재된 현재의 삶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과 의지를 신뢰했던 현재의 삶을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믿음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기 때문이다.

 

시마모토는 결국 하지메를 떠난다.  주인공 하지메도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무런 기약도 없이 떠난 시마모토는 결국 하지메의 미래를 장악할 것이다.  현재를 온전히 현재로서 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주인공 하지메처럼 어느 순간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끝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했어야 했다.  시마모토와 같이 들었던 냇 킹 콜의 '국경의 남쪽'은, 하지메와 시마모토에게 국경의 남쪽은 결국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이었음을, 지울 수 없는 과거의 한 장면이었음을,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태양의 서쪽은 누군가의 미래였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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