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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평점 :
문학이란 결국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알랭 드 보통은 뛰어난 문학가이다. 일상에서 깨닫게 되는 삶의 의미와, 자칫 시시껄렁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독자들의 감성을 일깨우는 그의 능력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언제나 새롭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공항은 그닥 친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간혹 기억마저 아득한, 오래 전의 지인이 가족과 함께 모국을 방문한다는 통보만 하더라도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물론 도착 시간에 맞춰 대규모 환영인파(주로 가족과 친인척으로 꾸려진)를 이끌고 공항에 마중을 나가곤 했었다. 그것은 일종의 아무나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으로 취급되었다. 그만큼 공항은 누구나 출입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가지는 않았던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의 과장을 더하면 공항을 찾는 일이 마치 국내의 어느 곳을 가기 위해 버스 터미널을 방문하는 것처럼 흔하디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골에 사는 노인분들이 추수가 끝난 어느 가을날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할 때도 그들의 관광코스에 공항을 끼워넣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니 공항은 이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둘러보는 장소에서는 멀어진 셈이다.
『여행의 기술』 로 잘 알려진 알랭 드 보통은 2009년 여름 공항 소유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런던 히드로 공항의 소유주이며 BAA사의 최고경영자인 콜린 매튜스는 작가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은 채 공항에서 좀더 시간을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매혹적인 제안을 했고, 작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의 회사가 최근에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런던에서 가장 큰 공항의 두 활주로 사이에 자리잡은 최신 탑승객 허브인 터미널 5에 작가 한 명을 일주일 동안 초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름도 멋지게 히드로의 첫 상주작가로 불릴 이 작가는 공항 시설의 전체적 느낌을 살핀 뒤, 출발 대합실의 D 구역과 E 구역 사이에 특별히 배치한 책상에서 탑승객과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p.11)
작가는 공항과 공항 인근의 호텔에 머물면서 오고가는 여러 사람들과 공항에 근무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경들, 드넓은 공항의 구조물들을 스케치하듯 기록한다. 출발 라운지에서 이별의 키스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과 공항 교회의 책임 목사, 비행기 조종사와 수하물 담당자 및 보안요원들. 스쳐지나가듯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작가는 자신만의 상상력과 위트를 더하여 그들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가 만났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일회성의 인연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행도, 우리의 삶도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단발성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합실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느낌은 자비롭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혼자만 외로울 경우에 겪을 수도 있는 불편이 없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혼잡한 도시의 술집이 분명히 더 쾌활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밤이면 공항은 유목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본거지가 된다. 어떤 한 나라에 헌신할 수 없는 사람, 전통을 보면 뒷걸음질치고 안정된 공동체를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 따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 현대 세계의 중간지대에서, 등유 저장 탱크, 비즈니스 파크, 공항 호텔로 인해 풍경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오히려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p.157)
우리는 비록 '지구'라는 커다란 행성에 살고 있지만 매번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곤 한다. 때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생각할 때, 작은 성냥갑 정도의 크기로 착각하여 답답함을 호소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았던 곳,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스치듯 지나쳤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누군가 지적해준다면 지금 내가 머무는 시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앞으로 내가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문득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항상 멀리 있다는 착각, 내 주변의 것들은 모두 익숙한 것 투성이라는 불만은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읽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먼 곳만 바라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