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찌르르르!' 말매미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지난 주 월요일 아침 등산로에서 처음 들었던 매미 소리보다 조금은 우렁차게 변한 듯도 하고, 이따금 시끄러운 것도 같고, 월요일 이후로 매미 소리를 다시 들었었나 되짚어 보기도 한다.  그 매미 울음 소리 때문이었는지 머릿속으로는 낱글자들이 오그르르 몰려든다.  장마가 한창인 요즘, 맑은 햇살은 참 오랜만이다.  '매미들도 반가웠던 게지.'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얽히는 이 오전의 헐떡임 속으로 한 권의 책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좀머 씨 이야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책이다.  책을 읽고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결국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책들이 있다.  <좀머씨 이야기>도 그런 책이다.  넉넉 잡아 서너 시간이면 다 읽을 만큼 부담이 없었던 책.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세어보지는 않았어도 줄잡아 서너 번은 읽지 않았겠어?  그런데도 리뷰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그랬다.  <좀머 씨 이야기>는 논리적인 언어의 흐름으로 정리되거나 저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좀머 씨 이야기>의 리뷰를 쓰고자 한다.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글로 옮긴다는 것이 모험과 다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1.  관계 맺기와 "나를 좀 제발 그냥 놔 두시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 대부분이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신의 말에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빈말이 섞이게 마련이다.  예컨대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자'라든가 '오늘따라 옷이 멋져 보이는군요' 하는 식의 상투적인 말들은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 작가는 이 빈말에 대한 폐해를 독자들에게 여러 번 주지시킨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그래서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따위의 말들을 아버지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박이 떨어진 도로에 이슬비가 내리던 날, 좀머 아저씨 옆으로 차를 몰면서 그런 틀에 박힌 빈말을 아버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p.34)

 

또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내가 남 몰래 짝사랑하던 카롤리나의 빈말이 그것이다.  카롤리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호수 윗마을에 살았고 나만 홀로 아랫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하굣길에 카롤리나와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카롤리나가 했던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라는 말에 나는 한껏 들뜨게 되지만 정작 월요일에 있었던 카롤리나의 말은 "나 오늘 너랑 같이 안가."였다.

 

"한참 동안 변명이 이어졌지만 갑자기 이상하게 귀가 멍멍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것을 머리에 기억해 두기는커녕 제대로 듣지도 못하였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그 애가 말을 끝낸 다음 갑자기 돌아서더니 윗마을 쪽을 향해 샛노란 옷을 휘날리며 다른 여자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잽싸게 달렸다는 것뿐이다."    (p.55)

 

마지막으로 풍켈 선생님의 말은 이 소설에서 극단적으로 작용한다.  결국 나는 풍켈 선생님의 말로 인해 삶에서의 모든 관계를 끊고자 자살을 결심한다.  물론 미수로 끝나지만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올림 바 건반 위에 구역질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미스 풍켈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딱 한 번 필요로 하였을 때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건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만 지켜보았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세상사람들이 자비롭다고 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잘 먹고 잘해 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는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겠다!  그것도 지금 당장!"    (p.83)

 

2. 인간 소외와 편견

   

<좀머 씨 이야기>는 화자인 '나'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아주 어린 꼬마에서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제목은 <좀머씨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 책에서 좀머씨는 차창에 스쳐가는 풍경처럼 그려질 뿐이다.

 

"마을에서 좀머 아저씨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름이 페터 좀머인지 혹은 파울 좀머인지 아니면 하인리히 좀머인지 혹은 프란츠 크사버 좀머인지 알지 못했으며, 좀머 박사인지 혹은 좀머 교수인지 아니면 좀머 박사 교수인지도 모르는 채,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좀머 씨>라는 이름만으로 알고 있었다.  좀머 아저씨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니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과거에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p.15)

 

좀머 아저씨는 긴 호두나무 지팡이를 짚고 텅 빈 배낭을 멘 채 밤이고 낮이고 걷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를 다니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잰 걸음으로 다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좀머 씨는 한마디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인간이었다.  으레 그렇듯 소외된 인간을 향한 무수한 억측과 소문이 따라붙는 것은 좀머 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리타 슈팅엘마이어가 말해주었는데요.  좀머 씨는 항상 경련을 한대요.  온몸이 다 떨린대요.  리타가 그러는데 꼭 안달뱅이처럼 근육이 다 움직인대요.  의자에 앉으려고만 해도 몸이 먼저 떨린대요.  그래서 자기가 떠는 것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걷는 거래요."    (p.38)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그것이 자발적이든 또는 그렇지 않든 간에 언제나 부정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은 항상 불행할 것이라는 삶 전체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혹시 범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 이르기까지 사실이 아닌 주관적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경우에는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지 않던가.

 

좀머 씨는 결국 호수에 빠져 자살한다.  소설 속의 '나'는 먼 거리에서 좀머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보았을 뿐 '좀머 아저씨!  정지!  뒤로!'라고 소리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러 마을로 달려가지도 않았으며, 아저씨를 구할 수 있는 배나 뗏목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아저씨의 모습은 사라졌다.  밀짚모자만이 동그마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무지하게 길게 느껴졌던 30초 혹은 1분이 지난 다음 몇 개의 물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짚모자만이 아주 천천히 남서쪽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둑어둑한 원경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았다."    (p.111)

 

어떤 목적이나 희망도 없이 무작정 걷기만 하는 좀머 씨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반복되는 그 행위가 바로 우리의 삶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통하여 단순히 관계 맺는 것으로 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소외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군가의 삶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록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그와의 만남이 잦았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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