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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가 들면서 사물을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는 듯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어떤 사물이든 넋이 빠져 바라보곤 했었다. 급한 게 없었으니까.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언제나 바빴다. 그래서 보이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그런 줄 알았다. 이런 습관이 한동안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바쁜 건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더 바빠졌는지도 모른다.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은 아주 잠깐씩 스쳐갔을 뿐 삶에는 도통 아는 게 없었던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것이다'하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잖은가. 차를 운전할 줄은 알아도 막상 차가 멈추었을 때 왜 멈추었는지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딱 그런 식이었다.
몇 년 전 여름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참으로 묘한 경험을 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뒷편으로는 소나무가 나란히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있는데 그 초입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잠깐 쉬었다 가는 작은 바위가 있다. 그날 아침에 몸이 가냘프고 등이 활처럼 휜 할머니 한 분이 그 바위 위에 앉아 먼 시선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안개 탓이었는지 내 눈에 비친 할머니는 정형외과 병원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해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아주 어렸을 때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모습도 겹쳐 보였다. 나는 그때 '아, 그렇구나.'하고 느꼈다. 깨달음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뭉클한 느낌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 뒤로 사물을 볼 때,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현재의 모습보다는 그 대상의 오래 전 모습과 먼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면 다음 순간 내가 집착했던 모든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이후로 깊은 허무주의에 빠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전보다 욕심이 1/3쯤 줄었다고나 할까.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는데 문득 그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2005년 EBS <열린 다큐멘터리>에서 방영되어 큰 호응을 얻었던『On the Road』는 이후 장기 배낭여행자들에 관한 인터뷰 형식의 책으로 엮여졌다. 배낭여행자들에게 있어 여행의 시작과 끝이라는 '카오산 로드',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여행자들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이라는 찬사를 듣는 카오산에서 작가는 여행자들의 내면 속으로 여행을 떠난 듯하다.
"카오산에는 독특한 패션이 있다. 삼륜차 택시인 '툭툭'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손님 한 사람에 네 사람이 달라붙어 여러 색깔의 실과 머리카락을 섞어 땋는 레게 머리가 그것이다. 젊은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거리인 탓에 마오쩌뚱이나 체 게바라, 짐 모리슨이나 지미 핸드릭스의 얼굴이 크게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는 것도 카오산의 변치 않는 유행이다. 짧고 검은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 교복을 입은 늘씬한 태국 여대생을 쳐다보는 것도 눈이 즐겁다. 황색 조끼를 입은 오토바이 택시 기사가 인도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를 태우고 휭하니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p.20)
젊을수록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을 좋아한다.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이는 한여름의 해수욕장이나 인기 가수의 대규모 공연이 펼쳐지는 광장, 그에 더하여 누구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 외국의 어느 지역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곳, 체면과 의무로부터 멀어진 곳에서 오히려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삶의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인 동시에 여행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 낯선 길 위에서 느끼는 일탈의 자유와 해방감, 행복했던 순간들, 전에는 감히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들, 사랑, 그리고 긴 여행에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한 자들만이 얻는 자기 발견의 시간. 저자가 만난 길 위의 여행자들은 그래서 더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는 이유가 있어?
여행은 아침 기도를 빼면 내 삶에 가장 커다란 충만감을 주고 있어. 나의 교만을 버리게 만들었고 내가 누구인지도 생각하게 했어.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거든. 특히 자기 삶,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 많은 사람을 보는 건 정말 좋아. 라오스나 중국, 베트남, 태국은 자메이카의 시골을 떠오르게 해. 그들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살고 있지. 작은 방에서 침대 하나, 부엌, 몸을 씻을 공간, 그 뿐이야.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으면 행복하다고 대답해. 그들보다 많은 것을 가진 우리들은 과연 행복한가?" (p.260)
저자가 만났던 많은 배낭여행자들. 그들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 여행지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우리는 때로 삶에서의 일부분일 수 있는 여행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아까운 시간쯤으로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삶을 운전하는 초보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삶이라는 거대한 틀을 수선하고 정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부딪히는 일상에서가 아닌 여행의 짧은 시간 속에서였음을 깨닫게 된다.
사물을 바라 보는 올바른 방식을 나는 조금 늦은 나이에 배운 듯하다. '카오산 로드'에서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어린 사람들인데 그렇게 성숙할 수 있다니... 지금 내 눈에 비친 모든 사물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아주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무(無)'요 신기루와 같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경과를 통하여 사물의 과거와 먼 미래를 바라 보는 시각은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일상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순간순간의 긴장감 속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칠 듯한 여행지의 낯선 곳에서 다른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은 동시에 나에 대한 깊은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삶을 정비하고 수선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면 여행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