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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어느 여행자의 기억
변종모 글.사진 / 허밍버드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여행지에서만큼 사람에 대한 허기를 절실히 느끼는 데가 달리 또 있을까. 차라리 그것은 덜 익은 피망의 잘린 단면, 앞뒤가 잘려나간 연속극의 한 장면, 그와 유사한 영원한 공복이자 결말을 알 길 없는 도대체의 미궁이리라. 무엇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의무가 감쪽같이 지워지는 장소가 바로 여행지 아니던가. 갑작스러운 이완은 중립에 놓여진 자동차 변속기처럼 탄력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피로가 한동안 이어지게 마련이다. 외로움으로 파랗게 변해가는 눈사람처럼.
"문득, 텅 빈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길을 나섰고, 자주 누군가가 빈 공간을 메워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허기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걸었다. 걷지 않으면 만날 수 없고 만나지 않으면 채워질 수 없던 많은 공복의 날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생각이 나를 길 위로 내몰았다." (p.72)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시간의 경과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자신의 얼굴에서 보여지던 수많은 시간들의 처참한 죽음과 한꺼번에 대면해야 하는 순간, 우리는 오싹 소름이 돋는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진실이. 도저한 운명 앞에 마냥 나약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마치 브라운관에 스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의 얼굴처럼 멀기만 하다. 삶에 자신만만했던 자신은 간 데 없고 여지없이 무너져내리는 스스로를 가까스로 붙잡는 순간,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만 들린다.
어쩌다 보니 연이어 여행기만 읽게 되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진득하니 앉아 뭐 하나에 집중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음이 저만치 달아날 때마다 겨우 한 구절씩 읽으려니 독서의 속도는 좀체 빨라지지 않는다. 여행기는 부담없이 잊을 수 있어서 좋다. 무엇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무언가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은 후줄근히 처진 배낭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는 것과 같다. 그 무게가 지친 발걸음을 한없이 느리게 할 때가 있다.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 뜨거운 피자 한 판을 들고 기차를 기다린다. 오후의 열기에 지쳐버린 사람들이 승강장 바닥에 누워 기차를 기다린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나처럼 무모한 마음으로 북쪽으로 갈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리. 뚜렷하지 않은 것을 제대로 보려고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는 일. 그래서 그것을 끝내는 확인하고 마는 일. 하지만 그 무엇도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쉽게 다가오지 않으리. 당신이 움직일 수 없다면 내가 가야 하리. 그 일은 희생이 아니라 희망이리. 무모한 일이 아니라 무한한 일이리." (p.147)
변종모 작가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여행기를 읽고 싶어서 골라잡았을 뿐인데, 작가는 자꾸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인다. 어느 낡은 일기장에 비밀처럼 적었을 이야기들도 서슴없이 들려준다. 나는 가끔 메슥메슥 멀미를 한다. 삶에 내쳐진 듯한, 어쩌면 우리의 일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가 나를 흔들리게 한다. 갠지즈 강가에서 소원이 없기를 소원하는 작가의 희미한 마음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 억수 같은 비가 내린다. 새벽은 비에 젖어 일어날 줄 모르고, 가끔 천둥이 그 문을 열어주는 까마득한 하늘 아래 우리는 침묵으로 달린다. 하지만 무겁지 않다. 이 길의 끝에 또 각자가 걸어야 할 새로웅 길이 놓였으니, 우리는 아무 일 없이 비가 갠 오후의 하늘을 기대하듯 상쾌해질 것이다. 각자의 길이 있으니, 그 길을 걸어야겠으니." (p.309)
"여행이란 결국 삶을 등지고 죽음의 냄새를 맡으러 가는 머나먼 길"이라고 했던 유성용 작가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의 껌벅임 속에서 나도 언젠가 이 길에서 밀려나 아주 긴 휴식의 시간을 갖겠지만 아직은 내게 오지 않은 그 아스라한 길을 생각할 때 자신을 목적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그래도 평화주의자라고 했던 변종모 작가를 문득 부러워했다. 혼자라서 열심히 살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한마디. 누군가는 혼자가 아니라서 더 열심히 산다지만 또 누군가는 혼자이기 때문에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5월의 나른한 오후 햇살이 긴 하품에 젖는다. 눈물이 찔끔 솟으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은 하루를 살아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