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포근하다.
블로그에서도 뜸하던 사람들이 한 분 두 분 다시 돌아오고, 보지 못했던 이름들도 속속 올라오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봄은 꿈을 꾸는 계절이요,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뜨게 하는 계절인가 보다.  창밖으로는 노란 개나리를 닮은 유치원생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얼마전 한 블로거님의 글을 읽으며 문득 옛추억이 떠올랐었다.
모르긴 몰라도 소설가를 꿈꾸는 분일텐데 자신이 쓴 소설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독자의 입장에서 읽었던 탓에 뭐라 평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분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진정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아마 내가 대입 수능을 마친 고등학교 졸업 무렵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형들과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기차 여행이 잦은 편이었다.
왜 그런 결심이 섰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느날 문득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 모르는 사람들과 서먹한 얼굴로 서너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낸다는 것도 지루하고, 멍하니 창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는 것도 참으로 따분한 일이었나 보다.  무엇보다 입시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느낌이 나를 무언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수집’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기차를 타기 전에 항상 작은 메모 수첩과 연필을 챙겼고, ’오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하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기차에 오르면 옆좌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사람의 인사에 한동안 의아해 하다가 궁금해서 묻곤 했었다.
"저를 아세요?" 하고.
그때마다 나는 동행하게 되어 반갑다며 나의 신분을 밝히고는 가슴 주머니에 고이 지참했던 수첩과 연필을 꺼내 들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옆좌석에 우연히 앉게된 동행인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사람들이 다들 순진했던지, 아니면 내 얼굴이 선량해 보였던 탓인지 싫다 않고 이야기 보따리를 선선히 풀어나갔다.
그 중 사오십대의 중년층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고객(?)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곤 했다.  
"내 얘기를 소설로 엮으면 모르긴 몰라도 한 트럭으로도 부족할거야."

나는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깨알같이 수첩에 옮겨 적었다.
간혹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목적지를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했는지...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옮겨 우편으로 보내주겠노라고 하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소를 손수 적어주며 꼭 부쳐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때로는 전화번호를 일러주며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수첩에 적힌 이야기를 토대로 어떻게 글을 꾸밀까 하는 생각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왕이면 그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내 자신의 역량으로 최대한 빛나게 해주고 싶었다.  나 스스로도 그분들의 삶을 같이 사는 느낌이었다.
한 작품이 완성되면 낡은 수동 타자기에 하얀 종이를 끼우고 혹시 오타라도 나지 않을까 조심조심 타이핑을 쳤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원고를 곱게 접어 편지봉투에 넣는 날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여행 횟수에 비례하여 내가 모은 이야기와 주소도 하나 둘 늘어만 갔다. 
나의 ’이야기 수집’은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 끝이 났다.
이제는 연락도 끊겨 영영 뵐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가끔씩 그들이 그리워지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때 들었던 이야기 한토막을 들려주곤 한다.
나도 이제 ’이야기 수집가’가 아닌 ’이야기 전달자’로 누군가에게 ’그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보다 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1등만 기억하는 치열한 경쟁사회.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은 봄날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처럼 튀지도, 별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뻐했을까?
특별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것일까?  
밋밋하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이야기가 하얀 종이 위에 활자로 살아난 모습을 보면 누군들 감동하지 않으랴.
튀지 않고, 기괴하지도 않은 그들의 잔잔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몇번의 이사로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내 가슴에는 여전히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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