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리 시간에 신부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지난 주일미사의 영성체 의식에서 자격도 갖추지 않은 내가 의식에 참여하려 했다는 것이다.(오늘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영성체 의식은 세례를 받은 자만이 참가할 수 있단다.)  무지는 커다란 죄악이라는 말에 느꼈던 무안함이란......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려는 의도를 갖고 했던 말은 아니었겠으나 낯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찌할 수없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기독교의 계율이 의도적으로 조금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는 키르케고르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기분이 우울하다.

날씨가 나의 내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어느 한 사람의 생각이나 기억이 타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으로 변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타인의 내면에 닿을 수 없듯 말과 표정, 행동 등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나의 내면은 수시로 변함고 있음을 알고있다.

자연은 이 원리를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

절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외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위장한다.

나의 마음은 쉽게 휘둘린다.  미련하게도.

어쩌면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마음을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성경의 주제는 모순을 모순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것에 있다.

탄생부터 모순적인 인간이 모순을 해석하려 들면 모순과 모순이 만나 더 큰 모순을 잉태하고, 실타래가 꼬이듯 혼란 속에 빠지고 만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나의 생각만을 더듬는 것은  생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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