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나의 이야기일 수도, 또는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탓으로, 또는 남의 탓으로, 또는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불가항력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곤 한다.  그 어려움이 경중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어려움일 뿐이지 그 무게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일단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반응하는 행동양상도 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에 의하면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mce)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곤 한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럴 리가 없어!'라고 부정하며, 조금 지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분노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써 다른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두기도 한다.  결국 이도 저도 가능성이 없으면 극심한 슬픔에 빠지게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종국에는 현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물론 순서가 뒤바뀌거나, 단계를 뛰어 넘을 수도 있겠고, 미처 수용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려는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과정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겠는가.

나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감정에는 오직 자만심(또는 허세)과 오기만 남는다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의 충고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는 그 사람을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비난과 멸시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황을 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기를 부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만심이나 오기는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음의 상처만 줄뿐,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와 협조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자만심과 오기만 남았으니 그에게는 위로와 기도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성인군자는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난과 멸시가 심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인은 힘들더라도 빨리 수용하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더라도 그를 가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조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주변의 협조에 의지하는 것보다 본인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돌려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태도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나를 도와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변하는 순간 새로운 희망이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