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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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고민 중 하나는 오늘 점심에는 뭘 먹을까? 하는 문제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 그게 뭔 고민이 될까? 생각하겠지만 그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얘기다. 사무실 근방의 음식점이야 손으로 꼽을 정도로 빤하고 각각의 음식점에 대한 맛의 평가도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여러 번 들어 달리 변할 것도 없지만 그 많지 않은 선택지 중에서 오늘의 메뉴를 고르는 일은 매번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이 되기 전부터 나 대신 그 어려운 문제를 떠안을 다른 누군가를 물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김 대리, 오늘 뭐 먹을까?"


오늘은 사무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고 나가 토종닭을 먹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오전과는 다르게 비는 이제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급변하는 날씨에 오싹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요 며칠 기형적으로 따뜻했던 날씨 탓에 옷을 얇게 입고 나왔던 게 화근이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주문 요청이 들어왔다.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공깃밥에 닭볶음탕을 볼따구니가 미어져라 욱여넣었다.


"내가 감자탕을 처음 먹은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자탕 맛에 제대로 꽂히게 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한다. 제법 추운 날이었다. 남자친구가 감자탕을 잘하는 집이 있는데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매우 설레던 때라 "난 감자탕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쩌고 해서 남자친구의 제안에 초를 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법 규모가 크지만 허름하기 짝이 없는 식당에 앉아 한참을 펄펄 끓인 감자탕의 첫 국물을 떠먹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감자탕 국물이 원래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었던가? 믿을 수 없었다."  (p.181)


권여선 작가의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를 다 읽고도 리뷰를 쓸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다. TV나 인터넷 방송의 먹방과 ‘쿡방’이 넘쳐나는 시대에 책이라는 낡은 매체가 이들과 경쟁하는 것도 우습고,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그리 크지 않은 나로서는 작가가 밝힌 음식과 그에 얽힌 여러 뒷얘기에 덧붙일 말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블로그 활동을 하는 여러 블로거 중 다수가 자신이 방문했던 여러 음식점의 사진과 메뉴 등을 경쟁하듯 올리고 있는 게 현실 아니던가. 현실이 그와 같은데 나 역시 남들이 읽지도 않을 글을 올리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는 게 그닥 내키지 않았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허름한 술집 문이나 벽에 붙어 있던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이 책 제목인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p.10 '들어가는 말' 중에서)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부 '봄.청춘의 맛', 2부 '여름.이열치열의 맛', 3부 '가을.다디단 맛', 4부 '겨울.처음의 맛'의 사계절과 5부 '환절기'가 더해지고 있다. 음식은 대개 추억과 함께 기억된다. 그러므로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 얽힌 말하는 이의 추억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쓰는 이의 성정과 글솜씨에 의해 독자의 감흥이 달라질 뿐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이야기꾼인 권여선 작가의 음식 이야기는 책을 잡은 어떤 이에게도 매혹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고, 작가가 떠올린 어떤 추억은 마치 내 일인 양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십 대 후반 무렵 겨울에 비록 반지하방이긴 해도 처음 독립해 자취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내 부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의 첫 식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사를 마치고 피곤한 와중에도 나는 기운을 북돋워 시장에 나가 소고기와 콩나물, 꼬막과 양념거리를 사 왔다. 소고기에 콩나물과 대파를 넣어 고깃국을 끓이고 꼬막을 삶아 양념장을 듬뿍 넣어 조린다. 내 조그만 자취방은 금세 맛난 고기와 조개, 양념 냄새로 가득했다. 훌륭한 만찬에 소주까지 곁들이니 부러울 게 없었다."  (p.210)


낮에 먹었던 닭볶음탕이 생각난다. 창밖으론 진눈깨비가 내리고 식당의 좁은 문으로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 느긋하게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던 그 한 끼의 식사가 날씨처럼 스산했던 오늘 오후를 지탱하는 든든한 힘이 되었기를... 그리고 언젠가 오늘보다 느긋한 하루가 주어진다면 오늘의 식사를 함께 했던 식탁 위의 얼굴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기를... 그렇게 맛있게 늙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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