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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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소설 속 인물은 입체적이다. 작가의 소설 단 두 권을 읽어본 사람이 단도직입적으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차원적인 인물을 다면적인 모습의 살아 숨쉬는 듯한 인물로 재창조한다는 것은 웬만한 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신진 작가(2018년 데뷔)라고 말할 수 있는 장류진 작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그녀의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작가의 필력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대상이 관여하는 관계의 연관성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작가도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연구와 관찰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액셀을 밟은 발에도 살짝 더 힘을 줬다. 하늘과 구름, 연둣빛 잎사귀들을 머금은 호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나는 운전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신기한 일이었다. 심지어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드라이브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운전이 하고 싶어서 핸들을 잡는 사람들의 마음을."  (p.43 '연수' 중에서)


표제작인 '연수'를 포함하여 총 6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소설집 <연수>는 작가의 작품 중 내가 두 번째로 선택한 책이다. 내가 처음 읽었던 장류진의 소설은 <달까지 가자>였다. 코로나 시국에 코인 투자 열기가 뜨겁던 당시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세 여성의 유쾌한 생존 분투기를 그린 <달까지 가자>는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그 길로 소설가 장류진의 팬이 되고 말았다. 소설집 <연수> 또한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운전공포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주연'이 동네 맘카페를 통해 알게 된 '작달막한 단발머리 아주머니' 운전강사로부터 도로 연수를 받으면서 가볍게 스쳐갈 수도 있는 그 짧은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연수', 이박 삼일의 대기업 합숙면접에 참여한 '지원'이 조원 모두가 참여하는 협동 장기자랑 '펀펀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과 위기 상황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펀펀 페스티벌'.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지닌 새중앙에너지의 팀장 '김건일'은 '천 사장'이 운영하는 술집 '천의 얼굴'을 단골 회식 장소로 택하곤 했는데 '현수영'이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새중앙에너지의 회식문화는 급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쇠락을 이어가는 '천의 얼굴'과 암에 걸린 '천 사장'. '김건일' 부장은 '현수영'에게 은밀한 부탁을 하게 된다는 내용의 '공모'. 로드바이크 동호회를 운영하는 '나'와 회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면들을 그린 '라이딩 크루'와 작은 방송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선진'의 올림픽 취재기를 그린 '동계올림픽'.


"요즘 자주 하는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 또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말하자면 이런 것들. 어떤 착한 사람이 나를 납치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로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 두 팔을 등 뒤에서 묶고 극세사로 만든 보송보송한 안대로 내 눈을 가리고 하얀 봉고차에 태운 다음 내가 모르는 곳, 나를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줬으면. 그래서 딱 한달만 날 가뒀다가 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같은 것들."  (p.271 '동계올림픽' 중에서)


서른두 살의 나이에 국문과에 진학한 '박미라'. 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성공해 억만장자의 부자가 되었지만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었던 미라는 소설창작회 멤버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등 수모를 겪은 후 그리스로 창작 여행을 떠나게 되고, 졸업을 앞둔 '나'는 미라 언니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창작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미라 언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뛰어난 작품을 내놓는데...


"라라. 그러고 보니 언니에게는 필명이 있었다. 핸드폰 번호 바꾸고 필명을 쓰면 다시 소설 써내는 데 별문제 없지 않겠느냐고,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아물면 다시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내일 언니한테 그렇게 말해줘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멀어지는 하얀 차를 바라봤다."  (p.330 '미라와 라라' 중에서)


위대한 소설가는 어쩌면 글솜씨가 빼어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 그곳에 속한 사람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꾸준히 관찰하는, 말하자면 이 사회와 그에 속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남들보다 곱절은 뛰어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준에서 바라볼 때 장류진 작가는 분명 소설가로서 크게 성장할 사람인 듯 여겨진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평론가의 입장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갖는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1차적인 이유는 너와 나의 관계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며 우리네 삶의 8할은 결국 관계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소설가는 보이지 않는 그곳에 환히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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