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깨물기 -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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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인의 애독자가 된 계기는 아마도 시인의 산문집 <마음사전> 덕분이지 싶다. 시인이 정리한 단어들의 의미는 단어 자체의 실질적인 의미를 넘어 시인 자신의 체험과 느낌에서 비롯된 섬세한 감정까지 담아낸 정밀한 사전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매 쪽을 넘길 때마다 감탄을 쏟아내며 읽었다. 시인의 감성과 시선은 이토록 정밀하고 흠잡을 데 없이 적확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이어졌었다. 이와 같은 느낌은 다른 독자들도 대부분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인이 쓴 다른 작품들을 모두 읽었던 것은 물론 시인이 나왔던 유튜브 동영상도 빼놓지 않고 보게 되었다. 시인이 진즉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스토커로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금니 깨물기> 역시 그 연장선상의 일환이었다.


"나는 엄마를 보고 배웠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그걸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늘상 주먹을 꽉 쥐며 생각해왔다. 지키려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겨우 얻게 된 것들과 꼭 얻고 싶었던 것들을 잘 지키는 것으로써 엄마처럼은 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p.24)


책에 등장하는 여러 꼭지의 산문 중 나는 첫 꼭지인 '엄마를 끝낸 엄마'를 읽으면서 주책없이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질서가 지배하던 시절에 태어난 시인은 엄마로부터 오빠와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을 경험하며 성장했고, 이러한 차별이 엄마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군가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들을 거의 다 망각하고 25년 전에 죽고 없는 오빠와 아빠에 대한 기억만 온전히 간직하게 되었을 때, 시인은 자신만 홀로 엄마를 엄마로 기억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잊어버리기로 했단다. 요양원에 입소하기로 한 전날 밤, 처음으로 엄마 집에 가서 엄마와 함께 잠을 잤다는 시인은 코로나 시국에 요양원에 입소한 엄마의 모습을 마치 남의 일인 양 아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엄마에 대해서 이제 나는 거짓말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 가끔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엄마의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자문하면, 그 무엇인가는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이유가 텅 빈 그리움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저 그리움일 뿐이다. 그런 그리움을 엄마를 향해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럴 수도 있구나 한다."  (p.20~p.21)


어느 유튜브에서 보았던 시인은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중간 지점에서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딱 부러지는 말투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어려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깍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고 자랐음직한 시인의 겉모습과 태도를 보면서 나는 내심 시인 역시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했었다. 조금의 빈틈이나 허술함도 용납하지 않는, 야물딱진 시인의 성격은 그녀가 쓴 여러 책의 문장 곳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장소라는 말과 공간이라는 말은 엄연히 구별된다. 장소는 시간이 부여해준 가치와 역사가 부여해준 이야기를 함께 담은, 고유한 이름이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영위하는 한 개인의 양태들이 냄새처럼 고스란히 밴 곳이기도 하다. 장소는 유일하고 공간은 보편이다. 장소는 변화를 겪고 공간은 그대로다. 장소는 파괴되지 않지만 공간은 파괴될 수 있다."  (p.61)


이 세상에 자신의 주장을 온전히 남기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시인이 아니라는 걸 나는 김소연 시인을 통해 배운다. 그 목소리가 작든 크든 상관없이, 어쩌면 옳고 그름을 구별할 필요도 없이 오직 자신의 내부에서 뻗어 나오는 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만이 시인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음을...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겯는 어느 날 비로소 계관을 쓴 시인이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 문장이 아니라 맥락이, 맥락이 아니라 노래 비슷한 것이, 노래가 아니라 울먹임이, 울먹임이 아니라 불꽃이, 불꽃이 아니라 잿더미가 비로소 백지 위에 하얗게 쌓인다. 시는 온갖 실의와 실패를 겪어가며 끝장을 본, 한 줌 재인 셈이다."  (p.74~p.75)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때로 어금니를 깨물고 버텨야 할 만큼 힘들고 고달픈 일이겠으나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게 하나의 시였고, 동화였고,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시인도 아마 그런 시절을 살아왔을 터, 때로는 어금니를 깨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바들바들 떨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언제나 그런 아득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이라는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현실이라는 아득함에 시간이라는 조미료를 솔솔 뿌려 추억이라는 이름의 짙은 사랑을 어렵게 찾아내곤 한다. 인간이란 어쩌면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이미 사라져 버린 어떤 소중한 것을 그리워하는 미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고, 다른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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