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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SF 작가 김초엽의 등장은 우리 문단에 꽤나 신선하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테드 창의 작품 외에는 SF 소설에 그닥 관심이 없던 나도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구해 읽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읽고 꽂아 둔 책을 아들이 이어 읽은 후 김초엽 작가의 팬이 된 것을 보면 요즘 젊은 세대만의 공통분모가 작가의 작품 속에 완벽히 녹아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초엽 작가의 인기는 신인 작가 치고는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어서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은 그동안 과도하게 증폭되고 축적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작가의 산문집 <책과 우연들>이 출간된 건 어쩌면 시기적절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앞으로 나올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높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김초엽 작가의 산문집 <책과 우연들>은 총 3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세계를 확장하기'에서 작가는 'SF란 무엇인가?'와 같은, SF 소설을 쓰는 작가이지만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통해 SF 장르 소설을 쓰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고 데뷔 후 김원영 작가와의 협업으로 논픽션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면서 겪었던 많은 어려움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2장 '읽기로부터 이어지는 쓰기의 여정'은 자신이 겪었던 뒤죽박죽의 독서 여정과 우연처럼 찾아온 소설 쓰기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3장 '책이 있는 일상'에서는 책방과 독자, 과학과 작업실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를 들어가며 독자들이 궁금해했을 소설가로서 자신의 일상을 솔직하게 들려주고 있다.
"2015년의 어느 날 나는 소설 쓰기에 대한 작법서 한 권을 읽고 지인들과 함께 있던 채팅방에서 "작법서를 읽었는데 재밌더라. 취미로 소설 써볼까?" 가볍게 말문을 텄는데 별안간 "그래, 다 같이 한번 써보자!" 하고 몇몇이 동조하며 뜬금없이 창작 모임 하나가 급조되었다." (p.120)
어느 날 야구장을 찾았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외야석 잔디밭에 누워 생맥주를 마시며 야구 경기를 관람하던 도중에 야쿠르트의 한 선수가 경쾌하게 2루타를 치는 소리를 듣고 우연히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일화처럼 김초엽 작가의 소설 쓰기는 아주 가벼운 우연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계사의 중요한 일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 발단이나 시발점을 쫓아가면 픽 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작고 가벼운 것들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작업실에 앉아 책장을 쭉 둘러보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았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책들이 눈에 잔뜩 들어왔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필요해서 사들인 게 아니었다면 살면서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을 책들이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순수한 애정과 즐거움 대신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독자가 되었지만, 그래서 그게 일종의 직업병이라며 투덜대고 있었지만, 혹시 이 불순한 독서가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잘못 탄 버스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도시의 낯선 장소로 나를 데려가주는 것처럼." (p.160)
소설가나 시인의 산문집은 대개 독자들의 요구와 이를 수용하는 출판사의 영리 목적이 결합하는 지점에서 성사되곤 한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몇몇 기자의 질문을 통해 일부 해소되기도 하지만 인터뷰라는 형식의 딱딱하고 건조한 느낌, 산발적이며 즉흥적인 질문과 답변 등으로 인해 독자들의 읽기 욕구를 강하게 자극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유년 시절을 포함한 읽기의 여정, 작가로 등단하기까지의 과정,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 등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일반적인 내용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해소하는 한편 소설이나 시에서 보였던 문장과는 완전히 다른 문장들을 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꽤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내놓는 이런 형태의 산문집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먼 북소리>와 같은, 자신의 일상이나 경험을 일부 포함하면서도 세상을 보는 견해나 가치관 그리고 지금 작가가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한 인상 깊은 묘사 등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품격 있는 작품을 산문집에 담지 못한다면 작가의 산문집은 빵점에 가깝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소년에게 적나라한 신체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그와 같은 행위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자극하지도, 매력이나 호감도를 증가시키지도 못한다.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을 일률적으로 나열하고 기술하기보다는 예술적 가림막에 의해 적절히 가려지고 통제될 때, 작가에 대한 매력과 호기심이 증가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그것이 바로 예술로서 산문집이 가져야 할 미덕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