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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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연쇄살인범 이춘재를 대신하여 2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던 윤성여 씨가 재심에서 재판부의 사과와 함께 무죄를 선고받았다. 1989년 13살 여자아이를 성폭행하고 살해하였다는 이른바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그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인데, 그마저도 진범인 이춘재의 자백이 없었더라면 그의 누명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혹자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억울함과 분노 속에서 살았을 그의 삶은 과연 누가 보상할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미국 작가 줄리아 히벌린이 쓴 <블랙 아이드 수잔>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리뷰를 쓰고자 했던 나는 절뚝거리며 법정을 나서던 윤성여 씨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으며, 자신의 기억에 의한 법정 증언으로 인해 어느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면 나는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그를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의 삶은 흔들림 없이 지속될 수 있을까.

 

"오늘 밤 한 사람이 집행됩니다." 테렐은 건조하게 말했다. "사형수 감옥은 집행이 있으면 유난히 분위기가 팽팽해요. 이번 달에만 두 번째입니다." 테렐은 전화에 대고 이야기하면서 일어섰다. 생각보다 윤곽이 둥글고 부드러운 커다란 몸이 유리창을 가득 채웠다. "여기 오는 데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테시. 당신이 이 일에 얽매여 있다는 걸 알아요. 내가 한 말을 기억하세요. 내가 죽으면, 잊어버리세요." 갑작스러운 공황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이거다. 여러 말들이 서둘러 절박하게 끓어올랐다. "재심 허가가 나온다면 나는 다시 증언할 거예요. 빌은 훌륭한 변호사예요. 그는 정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특히 빨강머리에 대해 DNA 분석 결과가 나온 지금은 더욱. 그건 내 머리카락이 아니었어요." 나는 귀 뒤에서 머리카락을 한 가닥 잡아당겼다. (p.321)

 

소설은 십대 딸을 둔 성인이 된 테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8년 전 16세의 테사 카트라이트는 텍사스의 한 지역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다른 여성들의 뼈와 함께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테사는 자신이 왜 거기에 버려졌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테사가 발견되었던 공동묘지에는 블랙아이드수잔 꽃이 마치 카펫처럼 만발했었고, 그 비극적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테사는 '블랙 아이드 수잔'으로 불렸다. 테사의 증언으로 인해 용의자는 사형수가 되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죽은 소녀들의 유령이 함께 살고 있었고, 어쩌면 18년 전 자신의 증언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텍사스의 사형수 감옥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포와 죄책감이 테사를 옥죄던 어느 날 누군가가 그녀의 집 창문 밖에서 블랙 아이드 글라스를 심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텍사스의 감옥에 있는 사형수가 아니라 잡히지 않은 진범이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테사는 결국 유명 법과학자 및 사형수 전문 변호사와 손잡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절차에 돌입한다. 한편 완전한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절친 리디아는 재판정에서 잇었던 테사의 증언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연쇄살인범과 리디아의 존재를 추적하는 과정은 진실을 향한 마지막 과정이 되어 가는데...

 

"오랫동안 나는 그들의 운명을 놓고 온갖 터무니없는 가설을 상상했다. 혹시 리디아가 뭔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괴물이 살해한 걸까? 리디아는 항상 블랙 아이드 수잔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를 잘라내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는 스크랩북에 붙이곤 했다. 여백에는 지적인 필적으로 빽빽하게 휘갈긴 메모가 있었다. 괴물이 그 집 폭풍 대피소를 가족 묘소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웨스트 텍사스 사막에 뼈를 내버렸을 수도 있다." (p.282)

 

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잔인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더구나 권력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몇몇 권력자에게는 그런 비참한 현실이라는 게 어느 시대에나 늘 있어 왔던,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그래서 달리 개선의 여지가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 까닭에 검찰총장을 비롯한 괴물 집단은 윤성여 씨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세계 유일의 괴물 집단은 때로는 그들의 편의를 위해 살인자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간첩을 만들기도 하면서 어쩌다 밝혀지는 진실을 향해서도 일말의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일상이니까. 억울한 살인자였던, 억울한 간첩이었던 누군가는 그들에겐 그저 생명이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니까 말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짧은 시간만큼이라도 그들의 양심이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헛된 바람인 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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