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생각 - 이 세상 가장 솔직한 의사 이야기
양성관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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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낯선 곳에서의 아침은 언제나 찌뿌듯한 피로를 동반한다. 몇 년 전 귀촌한 지인의 시골집에 초대를 받았던 게 토요일 오후, 회포도 풀 겸 가볍게 한 잔 하자는 주인 내외의 제안도 외면한 채 저녁을 먹자마자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잠이 들었던 것만 기억날 뿐 그 이후의 일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시간의 평지를 한 삽 푹 파내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던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만추의 쓸쓸함이 한 더미의 낙엽 부스러기 위로 빗방울처럼 스며들고, 적막한 계곡은 시간이 멈춘 듯 허허롭다.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물소리, 그리고 옷깃을 파고드는 소슬한 한기. 간간이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추수가 끝난 빈 들판만 유난스러웠다.

 

"영원한 행복이란 천국에나 있다. 연애나 사랑이 그렇듯 꿈도 예외가 아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몇 가지 꿈을 이루었다. 의대에 들어갔고, 초판도 다 못 팔았지만 책이란 걸 냈고, 지금의 아내를 여자친구로 맞이했다. 꿈을 이루는 순간만은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순수한 환희를 맛보았다. 특히 첫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시골 보건소가 떠나가도록 미친 사람처럼 혼자 소리를 질렀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하늘로 뛰어올랐다." (p.282)

 

산책에서 돌아온 나는 양성관의 에세이 <의사의 생각>을 마저 읽었다. 책을 받았던 게 벌써 2주가 지났는데 300쪽도 되지 않는 가벼운 책을 이제서야 겨우 다 읽은 셈이다. 언제부턴가 내게 습관처럼 달라붙은 무기력증으로 인해 나는 생존에 필요한 몇몇 일들만 겨우 하고 있을 뿐 일체의 다른 일들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저걸 해서 뭘 하나?' 하는 회의감만 들뿐 나는 마치 선천적으로 게으른 인간이었거나, 아주 어렸을 적부터 습관적인 '귀차니스트'로 성장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와 같은 추세에 불을 붙인 건 지금까지 길게 이어진 코로나 정국이 한몫했다. 의도치 않았던 단절과 고립, 그렇게 시작된 나 자신과의 생경한 대화, 외부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와 잘못된 인식의 정정... 코로나 정국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인식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존경과 신망이 두터웠던 의사와 목사 집단의 실체를 확인한 후 그들에 대한 분노와 조롱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도 코로나 정국이 우리에게 던져 준 커다란 변화 중 하나였다. 구성원의 육체적 건강을 돌보고 그들을 긍정적인 삶으로 이끌어야 할 두 주체가 실상은 가장 이기적이고 사적인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집단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대다수 구성원이 느꼈을 분노와 실망감은 어떠했을지...

 

"폭식과 비만, 일그러진 부모 자식 관계, 우울증. 이 모든 게 겉으로 드러나는 복통과 두통 뒤에 숨어 있는 범인이었다. 범인은 찾았지만, 범인을 검거할 수가 없다. 조심스럽게 생활 습관을 바꿀 것을 권유하고, 약을 주며 진료를 마쳤다. 첫 진료 이후로 1년이 지났다. 그 후로도 수진이는 같은 증상으로 어머니와 함께 열 번도 넘게 병원에 왔다. '배가 아파요, 머리가 아파요' 증상도 같고, 어머니가 수진이를 바라보는 눈빛도 변하지 않았다." (p.36)

 

병원에서의 일상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쓰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사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른 듯 보인다. 배가 아파서 내원한 고3 남학생에게 인생에는 다섯 번의 기회가 온다는 내용의 잔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도 하고, 운동을 하는 학생에게는 약물 복용의 위험성에 대해 강의를 하기도 한다. 물론 대기 손님이 없을 때. 그러면서도 저자는 하루에 스무 명의 환자만 예약제로 진료를 하고 환자에게는 손수 준비한 따뜻한 차나 커피를 대접하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따금 생각지도 못한 대목에서 울컥 감동을 받거나 집단 구성원의 그렇고 그런 무리들 속에서 돈키호테와 같은 어느 예외적인 인물을 만났을 때 그 집단의 구성원을 다시금 생각하기도 한다.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의사라는 직장인으로서 처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글을 쓰면서 환자의 마음을 살뜰히 이해하려는 작가로서의 저자는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비는 그쳤고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 나는 무너지듯 피로에 휩싸인다. 습관성 무기력 증후군. 내가 내린 병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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