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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하는 벅찬 즐거움 ㅣ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5년 4월
평점 :
비는 그저 추적추적 내릴 뿐이다. 그쳤다가도 잊을 만하면 심심함을 달래려는 듯 금세 다시 이어지곤 했다.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장맛비 치고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런 비가 종일 이어지다 보니 이것은 마치 한 방에 사내아이 두 명을 가둬 둔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가기도 했다. 활동력이 왕성한 사내아이 둘을 한 방에 가둬 둔 채 놀잇감이라곤 책 몇 권이 전부인 상황을 상상해 보라. 넘치는 에너지를 소진하기 위해 밖에 나가 놀 수도 없는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 각자의 손에 쥐어진 한 권의 책에 관심을 기울여 보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감싸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책에서 눈을 뗀 순간 허공에서 상대방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머쓱한 심정을 숨기기 위한 어색한 웃음이 한동안 길게 이어지곤 한다. 방 안에 흐르는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분위기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낯설고 지루하다. 오늘 내리는 어색한 빗줄기처럼.
"10월이 되면 햄프턴 거리에는 오락이라고 할 만한 놀잇거리가 전혀 없다. 그렇게 되면 책을 읽거나 작업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그리고 그나마도 싫증 나면 산책을 할 뿐이다. 다행히도 이곳은 산책하기에는 정말 이상적인 장소이다." (P.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는 오늘과 같은 날씨에 읽기 적합한 책인지도 모른다. 한 방에 갇힌 두 명의 사내아이가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을 때에도 이 책은 어쩌면 책에는 도통 관심도 없었던 그들의 시선을 붙잡고 서로 먼저 읽겠다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루키의 유명한 여행기 <먼 북소리>만큼이나 깊이 있는 책은 아니지만 말이다. 책에는 미국 이스트햄프턴을 비롯하여 하루키가 여행했던 다양한 지역이 등장하지만 그중 일본 야마구치 현에 있는 무인도 까마귀 섬을 다녀온 기록은 오늘처럼 맨송맨송한 날씨에 특별한 자극이 될 수도 있겠다.
"텐트 속은 좁은 데다가 찌는 듯이 덥기까지 했다. 그런 텐트 안에 성인 남자 두 사람이 들어앉아 있으니 재미가 있을 리 없다. 바깥에 나가면 벌레가 있다. 벌레들은 텐트의 지붕 위에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머리 위에서 버석버석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 밤이 되면 밤의 작은 생물들이 땅을 지배한다. 그들의 세계에 제멋대로 쳐들어온 침입자들인 것이다. 그런 주제이고 보니 불평을 늘어놓을 처지도 못 된다. 작다지만 무인도에는 무인도대로의 자립적인 생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p.40)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래된 팬 중 한 사람인 나로서는 어느 유명 아나운서의 내레이션과도 같은 작가의 건조하고 딱딱한 문체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적확하고 풍부한 비유와 묘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책머리에서 작가는 여행기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라고 썼다. 비록 변경이나 오지가 사라진 시대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변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작가의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여행기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변경을 복원하고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꿈꾸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지도에는 아직 자기가 가본 적 없는 지역이 펼쳐져 있다. 조용히, 말없이, 그러나 도전적으로. 들어본 적도 없는 지명이 허다하다. 건너본 적이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이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잇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지도를 펴놓고 자기가 아직 가본 적이 없는 곳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끌려 들어간다." (p.239)
비는 지금도 여전히 소리도 없이 내린다. 사람들의 관심 따위는 필요조차 없다는 듯 말이다.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라는 어느 작가의 책 제목처럼 조용한 빗줄기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려는 듯 대지를 적시는 가는 빗줄기를 타고 사뿐히 내려오는 희뿌연 어둠. 도시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길게 가로지르는 어둠의 빗줄기가 침묵처럼 길게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