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1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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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쓴 지 꽤나 오래되었다. 책을 읽고 간단한 소회를 남기는 게 주목적이었으나 때로는 넋두리나 한탄에 가까운 글을 남기기도 하였고, 언론에 떠도는 온갖 잡다한 소식들에 대한 편향적인 찬사나 울분을 표하기도 하였고,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이나 세상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야말로 무익한 생각들을 두서도 없이 늘어놓은 적도 있다. 한마디로 글을 쓴 당사자인 나조차도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듯한 잡글들의 나열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전보다는 글을 쓰는 횟수도, 쓰고자 하는 열정도 많이 줄어든 게 사실이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는 있다. 그렇다면 왜?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아니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마땅한 대답은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말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중 그 첫 번째인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여성학 연구자인 저자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끝없이 고민했던 흔적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글쓰기가 주업이 아닌 나와 같은 일반인은 '나는 왜 쓰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수는 있으나 내 앞에 놓인 다급하고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그와 같은 질문은 그저 뜬구름처럼 여겨지기 일쑤이고, 그런 까닭에 몇 날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경우는 숫제 없지 싶은 것이다.

 

"나는 글쓰기의 '세 요소'가 정삼각형 같은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상호보완적이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핵심은 윤리다. 소재에 대한 태도와 글쓰기 방식이 정치적 입장과 미학을 결정한다.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은 재현의 윤리이다." (p.15)

 

소위 글쓰기의 '3대 요소'라고 하는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문장)에서 저자는 글쓰기의 윤리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글을 쓰는 이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자신이 '나쁜'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글을 쓰는 과정이 자신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고, 글쓰기는 곧 자신을 끝없이 성찰하는 검열 과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일종의 취미이자 유희인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글쓰기의 윤리는 다른 무엇보다 앞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대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됨됨이는 윤리라는 보편적 논쟁 앞에서 언제나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 간의 소통이 sns를 통한 문자의 영역으로 전환된 요즘, 글쓰기는 몇몇 특정인의 영역으로 국한되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좋든 싫든 모든 이에게 강요되는 대중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는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바로 문자화하는 이른바 '문자화 된 말'로서의 기능으로 전환되었다. 글을 쓰는 자신도 오타로 인한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 잘못된 문장 구성으로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소통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글쓰기가 음성언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끝없이 속도를 추구하다 보니 빠른 글쓰기의 부작용이 속속 드러나기도 하고, 과거 글쓰기의 장점이었던 깊이 있는 사고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1'윤리학과 정치학은 글쓰기의 핵심이다', 2'당사자의 글쓰기는 혁명의 꽃이다', 3'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읽었던 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김형경의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필두로 제러미 리프킨의 <생명권 정치학>, 유시민의 <표현의 기술>, 기형도의 <기형도 산문집>, 켄트 너번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크리스토퍼 레인의 <만들어진 우울증>, 일연의 <삼국유사>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은 주제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인용되고 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눈에 띄었던 <기형도 산문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희망을 부숴야 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여행기는 "희망에 지칠 때까지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였다. 흔히 회자되는 루쉰의 말도 희망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땅 위에 길이 없는 것"처럼 원래 희망도 없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실행의 고단함을 강조한 말이다. 희망은 삶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을 집약한다. 미래 지향, 긍정, 바람사람들은 이 말을 편애한다. 희망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표현 그대로 생각하면 절망(切望)이 희망적이다. 절망은 바라는 것을 끊은 상태, 희망은 뭔가 바라는 상태.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 (p.93)

 

나는 예전의 어느 글에서 '희망''생명이 유한한 자의 조급함'이라고 쓴 적이 있다. 용어에 대한 정의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는 단어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 아닌가.'라고 썼던 기형도 시인의 정의와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는 그의 고백은 29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시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표현 가능한 정의이자 고백이었을 터, 삶은 이렇게도 다채롭다는 걸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읽었던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밀린 숙제처럼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무한반복의 질문지가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길을 걷고 있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카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어느 시인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모호한 의미의 문장을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나는 왜 쓰는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 시간 동안 행복했었다는 고백을 댓글에 쓸 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없었지만 내 글로 인해 생각할 거리를 얻었다거나 내 글로 인해 어떤 주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고백은 듣고 싶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초저녁의 바깥 풍경을 보면서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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