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3월
평점 :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삶은 더없이 우울해진다는 걸 나는 안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을 듯 보이는, 하나의 이상에 가까운 목표를 달성하는 걸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진정한 의미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순간순간의 삶을 즐기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속물적인 삶을 권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타워>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한 번쯤 되묻게 된다. 소설을 읽는 관점에 따라 지극히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소설에서 작가가 그려내는 두 인물-토오루와 코우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소설에 대한 생각은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성적으로 한창 왕성한 시기인 스무 살의 두 인물이 같은 또래의 여성에게는 관심이 없고 기이하게도 남편이 있는 40대 연상의 여인에게 빠져들어 질펀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삼류 에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인생이란 모든 것이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며 자신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인물들은 단순히 자신이 미리 짜 놓은 각본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까닭에 내 의도대로, 내가 생각하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고 믿는 코우지와 인생이란 계획한다고 모든 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가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들로 삶이 구성될 뿐이므로 삶에서 계획 따위는 필요가 없다고 믿는 토오루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인생을 이제 막 시작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바람직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지극히 은유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물론 후자라고 믿는다.
"연상 여자의 '좋은 점'을 가르쳐 준 사람은 토오루였다. 토오루는 고교시절부터 친한 친구로, 코우지가 우습게 여기지 않았던 유일한 녀석이다. 그 당시, 코우지는 대부분의 인간을 바보로 여겼다." (p.14)
그렇다면 토오루와 코우지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엄마뻘되는 두 명의 중년 여성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작가는 20대의 젊은이가 자신의 미래 모습이자 삶의 표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성세대의 유형으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은 아닌, 아직 자신의 삶에서 추구할 만한 욕망이 남아 있는 상징적인 인물로 40대를 선정하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스토리의 구성과 재미를 무시할 수 없으므로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이 중년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취했겠지만 말이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토오루는 전화 부스에서 시후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한참 동안 시후미한테서 연락이 없다. 전화를 건다는 생각만으로도 동요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토오루는 망설이고, 자신이 한심스러워 한숨을 쉰다. 전화 부스의 유리에 붙은 물방울은 왜 그런지 언제나 지독하게 잘다. 두려운 것은 부재가 아니라 응대였다. 놀란 듯한, 또는 당혹스러운 듯한 시후미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서먹서먹하게 혹은 분주하게 응대 받는 것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발신음이 들린 순간, 토오루는 거의 부재중이길 기원했다." (p.228)
여성잡지 편집장으로 근무하는 토오루의 엄마는 토오루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남편과 이혼하고 커다랗고 정갈하게 정리된 맨션에서 토오루와 함께 살고 있다. 토오루의 엄마 요우코의 지인이었던 시후미는 사업을 하는 남편을 두고 있지만 자신도 역시 샵을 운영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토오루가 열일곱 살이던 2년 전 요우코를 통해 시후미를 소개받은 토오루는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고 만날 때마다 전시나 공연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후미에게 깊이 빠져든다. 어려서부터 늘 혼자였던 토오루에게 시후미는 토오루가 미처 몰랐던 이 세상의 즐거움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스승이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연인이었다. 반면에 코우지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제법 나이차가 나는 형 역시 의사인 엘리트 집안 출신이다. 집안 형편이 쪼들리지는 않지만 즐겁게 살기 위해 시간을 쪼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상의 여인 '키미코'와 연하의 여자 친구 '유리'와 교제하면서 바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바쁜 생활이다 보니 연인과의 데이트도 언제나 자신이 정한 시간에만 허락하는 코우지와는 달리 토오루는 하루 종일 시후미를 생각하며 오매불망 시후미의 전화만 기다린다. 그렇다고 데이트에 있어 늘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키미코와 토오루가 서로의 상대방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키미코는 어느 날 코우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하지만 단칼에 거절을 당하고 만다. 결국 키미코와 코우지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고, 연인과 헤어지는 것도 언제나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일 것이라고 믿었던 코우지의 생각은 빗나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요시다의 엄마를 사귀면서 불륜 장면을 요시다에게 들키기까지 했던 코우지는 자신의 자취방에 요시다가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여자 친구인 유리와의 관계마저 삐걱대기 시작한다. 반면에 토오루는 큰 용기를 내어 시후미에게 전화를 걸지만 대개는 연결이 되지 않거나 간헐적으로 통화를 할 뿐이다. 따로 사는 아버지의 설계 사무실에서 시후미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시후미의 별장에 초대를 받기도 하는 토오루.
자신의 삶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과 삶에서 경험할 만한 일은 대부분 다 겪어본 사람과의 만남. 그래서인지 에쿠니 가오리는 소설에서 중년 여인의 과거를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개개인이 취하는 개별적인 행위는 달라질지언정 그 과정은 엇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타워>를 단순히 스무 살 청년과 엄마뻘되는 중년 여인과의 불륜 내지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지저분한 애정행각으로만 읽는다면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을 무척이나 지루하게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은 얼마든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