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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범한 밥상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고 박완서 작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작가와 작가가 쓴 글 사이의 거리를 어림하곤 한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만 9년.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여전히 2011년 1월의 순간을 마치 어제의 일인 양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는 말이 어느 것 하나 거짓이 아님을 그의 글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실제 겪었던 경험을 작품 속에 오롯이 투영하는 일은,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과 작가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여럿 후배 작가들에게 무거운 숙제로 남겨졌을지도 모른다.
소설집 <대범한 밥상>에는 표제작인 '대범한 밥상'을 포함하여 총 열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중 내가 오늘 읽었던 작품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제목의 소설.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었던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소설은 가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슬픔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표출되고 가식 없는 눈물과 울음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의 눈물에 나오는 시구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 제목의 의미는 '가장 마지막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건물이고 차들이고 형체는 지워지고 거기서 내뿜는 불빛만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게 마치 혼령이 너울너울 자유롭게 교감하는 것 같더라구요. 마음이 편안하고도 슬펐어요. 세상을 하직하면서 한평생의 헛되고 헛됨을 돌아보는 기분이 그런 거 아닐까요. 편안한데도 이상하게 위로받고 싶었어요." (p.295)
주인공인 '나'가 손위 동서인 형님과 전화 통화를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상대편인 형님은 발화가 생략된 채 '나'의 발화만으로 진행되는 까닭에 마치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실제로 나는 고 박완서 작가의 사후 1주기를 추모하여 연극 무대에 올려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2012년의 어느 가을날 충무아트홀에서 본 기억이 있다. 연극인 손숙의 가슴 절절한 연기 덕분에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눈물 콧물을 다 쏟았고, 연극이 끝난 후 허기진 가슴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었다.
"자식을 겉을 낳지 속까지 낳는 건 아니란 말도 그래서 생겨난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하죠? 말끝마다 형님은 꼭 그런 소리를 하시더라, 마치 오금을 박듯이. 이럴 때는 전화로 얘기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녜요, 전화로 말하면서도 전 형님의 시선을 느껴요.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걸 모르는 사람을 바라볼 때의 기분 나쁜 눈길 말예요." (p.304)
소설의 내용은 힘든 시기를 함께 겪어온 형님에게 스스럼없이 꺼내놓는 '나'의 한풀이도 있고,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몰라주는 형님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뒤섞여 있다. 그런 아픔을 꺼내놓기에는 세대가 같은 손위 동서가 적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생때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 물건들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물건들이 미운 건 아마 그 질김 때문일 거'라고 말하는 '나'의 고백은 버려진 낙엽처럼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즐거웠던 기억이 물건보다 속절없다'는 말도...
'나'는 친하게 지내던 동창 명애의 권유로 또 다른 동창 집으로 내키지 않는 문병을 가게 된다. 동창은 병든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아들은 교통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치고 나서 하반신 마비에다 치매까지 앓고 있었다. 동창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파파할머니가 된 친구는 누워만 있는 아들이 혹여라도 욕창이 생길까봐 말라빠진 몸으로 기골이 장대한 아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걸 보면서 명애와 '나'는 도와주려고 아들의 몸에 손을 대 보지만 아들은 괴성을 지르며 거부한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인 동창은 '이 웬수덩어리가 또 효도하네'라고 말한다. '나'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몹시도 부러워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 거 아뉴?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형님은 어디까지나 절벽 같아야 해요.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p.321)
작가가 살아 있던 과거에 여러 매체에서 작가를 볼 때마다 나는 '저렇게 야리야리한 몸으로 어떻게 그 모진 세월을 건너왔을까?' 속으로 생각하곤 했었다. 작가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독자와 만난다는 건 어쩌면 작가를 마음 놓고 울게 한 '통곡의 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 박완서에게 글쓰기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