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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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실내화에 쓴 검은색 매직 글씨의 이름처럼 도무지 지워질 것 같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웬걸. 한여름 강가 바위에 썼던 물글씨처럼 너무도 쉽게 말라버린 기억들 탓에 한때 치매를 의심했던 적도 더러 있게 마련. 여름 햇살이 힘들게 쓴 물글씨를 지우는 것처럼 흐르는 세월이 사람의 기억을 지운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오래된 기억을 잊기 위해 으레 또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는지도 모른다. 실연의 아픔을 잊는 데는 새로운 사랑이 특효약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소설가 한지혜는 오래 묵힌 자신의 낡은 기억들로부터 책을 시작한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책의 제목에서 풍기는 시적 낭만과는 별개로 작가가 들려주는 기억은 그닥 낭만적이지도 않고, '그땐 그랬지' 하는 식의 갈색 추억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기발하거나 예외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단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편등한 환경에 내던져진 한 인간의 고난 극복기쯤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내가 거쳐 왔던 신림동의 가파른 산동네의 풍경을 아련한 추억으로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 무언가 한 일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그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일일지도 모른다. 늘 흥얼거리던 유행가 몇 곡이지만 열심을 다해 불렀다. 그렇게 부르고 있자니 고인 시간도 흐르는 것 같고, 막힌 벽도 무너지는 것 같고, 일찍 늙은 청춘도 아직 살 만한 것 같았다. 인생에는 원래 그런 순간이 있는 법이다. 아주 사소한 진지함으로 태산 같은 막막함을 훌쩍 뛰어넘는 순간." (p.59)

 

내게도 눈에 대한 몇몇 특별한 기억이 있다. 경희대에 다니는 친구의 자취방에 놀러 갔던 어느 날, 서울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렸고, 폭설로 인해 지하철이 연장 운행을 한다는 친구의 말만 굳게 믿고 1호선 열차를 탔던 친구와 나는 2호선으로 환승을 하는 신도림역에서 강제 하차를 당하고 말았다. 2호선 열차는 이미 끊긴 지 오래. 역사 밖으로 나오자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친구와 나의 주머니를 톡톡 털어서 나온 돈은 고작 삼천 원 남짓.두당 오천 원을 외치는 택시기사의 달콤한 유혹을 뒤로한 채 우리는 눈발이 날리는 서울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신도림에서 신림동의 서울대 근처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그날 우리는 맘씨 좋은 어느 택시기사의 배려 덕분에 미터기에 찍힌 요금만 겨우 내고서 신림동 하숙집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지만 힘들어하는 내게 '동이 트기 전에 신림동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친구의 위로는 얼마나 황당했던가.

 

20여 년의 세월 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써온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이 책은 총 4개의 골목으로 나뉘어 있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첫 번째 골목, 이웃과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두 번째 골목, 세상과 시류에 대해 쓰고 있는 세 번째와 네 번째 골목이 그것이다. '인생의 풍요로움은 꿈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p.86)'고 썼던 작가의 꿈은 자신의 글이 많은 곳에 닿아 작가 자신과 같았던 마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작가의 글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 중 한 사람인 나로서는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라는 이 책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 아닌,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지는 첫 발자국일 뿐이라고 믿고 싶다.

 

"이제 이 글이 어디까지 어떻게 닿을지 모르겠다. 많은 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와 같았던 마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혹여 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러나 나는 언제나 실패에서 출발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생존이란, 삶이란 순간이 아니라 영속성을 가진 시간을 가리키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당신들, 살아갈 당신들이 저마다의 힘으로 끝내 버티기를. 나는 가늘고 길게 쥔 펜으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을 쓰고, 나를 쓰고, 이 삶을 기록해볼 작정이다." (p.283)

 

경자년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나는 금세 '벌써 한 해가 다 가버렸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반성도 없이 말이다. 나는 이렇듯 지금 시점에서는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을 바라볼 테고, 때로는 이룰 수 없는 아주 큰 꿈을 가볍게 말하기도 할 것이며, 지금과 같은 순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의 글은 이따금 처연한 슬픔으로 읽히기도 하고, 따뜻한 위로로 읽히기도 하고, '맞아. 그렇지!' 하는 공감으로 읽히기도 한다. 유난히 눈이 귀했던 올 겨울, 사락사락 내리는 눈송이처럼 2020 1월의 시간이 자박자박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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