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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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화된 계급 제도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조선의 양반 제도가 그러했고,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그러했으며, 미국의 노예제도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권력자에 의한 자의적인 신분제도는 다만 시간상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배워왔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공식화되지 않은, 말하자면 비공식적인 신분제도는 무너지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계급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그 결과 동일한 계급의 사람들끼리 단합이나 결속을 꾀하기 곤란하며, 국가는 공식적으로 누구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고 선전하며 이로 인하여 자신의 신분이 낮은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찬양하지만, 거기에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어떤 성질의 것이든 이동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신분 상승이라는 용어는 이론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해 간다는 의미이지만, 어딘가로부터 떠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단 떠나고 나면 과거의 생활을 더는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 (p.322)

 

<힐빌리의 노래>를 쓴 J.D. 밴스는 러스트벨트 지역 출신이었던 자신이 미국 최고 명문인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실리콘밸리의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회고록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은 애팔래치아 산맥에 가로막힌 척박하고 고립된 환경과 가난에 갇혀 미래를 포기해버린 사람들이 가정 폭력과 가족의 해체, 문화적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곳이다. 무식하고 난폭한 '힐빌리'들은 사회문제이자 복지 제도의 대상이었을 뿐, 그들의 목소리는 미국 내에서도 낯선 것이었다.

 

"나는 러스트벨트Rust Belt에 속하는 오하이오의 철강 도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일자리와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폭으로 사라져가는 동네였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는 좋게 말해 복잡한데, 엄마는 거의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를 키워준 외조부모님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적으로 나 같은 아이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자그마한 우리 동네에서 작년에만 수십 명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p.10 '프롤로그' 중에서)

 

저자인 밴스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자신의 성공담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정점에 있는 미국 내에서도 자신과 같은 사회 하층민이 존재하며, 그들은 사람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적극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정당한 주장이나 요구가 없었던 까닭에 그들의 목소리는 사회 문제로 이슈화되지 않았음을 밴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 알리고 있다. 밴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기억 저편의 과거를 날 것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약물 중독에 빠진 엄마와 일찍부터 양육권을 포기한 아빠, 가난과 가정 폭력, 우울과 불안 등 너무 이른 시기에 감당해야 했던 온갖 고통들을 담담하고 용기 있게 고백했던 저자는 자초한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의 문화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배신자로 불릴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 힐빌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머니를 모욕한 사람을 찾아가 전기톱을 들이대는 사람들이다. 또 우리는 여동생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여동생을 모욕한 놈의 입을 벌려 면 속옷을 욱여넣는 사람들이다." (p.392~p.393)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공정'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다. 오죽하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교육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특권을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상실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을까. 그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칠레와 볼리비아를 비롯한 남미에서, '노란 조끼 시위'의 프랑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계층 간 이동이 자유롭고, 노력만 하면 누구든 신분 상승이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강력한 실천 의지로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 한 시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끊어진 계층 사다리를 억지로 돌파한 한 명의 돌연변이에 대한 찬사의 글이 아니다. 밴스 자신이 겪었던 생생한 가족 이야기와 밴스가 제기하는 문제들이다. 힐빌리들이 겪는 불운한 인생에서 그들의 책임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될까. 힐빌리 문화로부터 분리되기까지 밴스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멸시와 냉대, 자신의 내면에 뿌리 깊게 내려앉은 힐빌리의 문화들. 그럼에도 되돌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발전시켜왔던 나날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새롭게 깨닫는 사실은 우리 다음 세대 중 절반 이상이 힐빌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적어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튼튼한 계층 사다리를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까.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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