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그 섬에서
다이애나 마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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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책을 읽고 난 후 언제나 그 느낌이 비슷한 것은 아니어서 매번 처음인 양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더 좋아하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물론 각각의 책들이 다 다른 내용을 품고 있지만 같은 책을 연거푸 다시 읽어도 그 느낌이 매번 다르다는 건 다른 일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넌더리를 내거나 책만 보면 고개를 외로 트는 경우를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단짝 친구가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유쾌한 농담을 할 줄 아는 친구였다. 일평생 사랑을 외친 남자. 매니의 말에 따르면, 친구는 쉰한 살에 죽어서는 안 되는 남자였다. 매니는 장례식에 참석했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자신의 몸이 마치 생명을 잃어버린 목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 메리에게 그동안 늘 얘기만 했던 아조레스로 돌아갈 때가 마침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p.229)

 

퓰리처상 수상자 다이애나 마컴의 자전적 에세이 <그 여름, 그 섬에서>는 읽을 때보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이 더 좋은 책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취재기자 다이애나 마컴은 어느 날 캘리포니아 외곽에 위치한 아조레스 이민자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취재가 목적이었지만 그들은 세대를 넘어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그들이 정착한 새로운 땅에서 아조레스의 문화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살아가고 매년 여름이면 아조레스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대서양 한복판에 위치한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아홉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조레스 제도의 어떤 매력이 이주민들로 하여금 매년 그들을 불러들이는지... 저자는 그해 여름 자신들의 고향으로의 초대에 흔쾌히 응한다.

 

"9월이 왔다. 나는 식탁보 한가운데서 보았던 감자같이 생긴 테르세이라 섬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타 있었다. 내가 탄 비행기는 그해 여름 아조레스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였고, 나는 그 비행기에서 딱 하나 남은 좌석을 차지했다." (p.53)

 

아조레스 제도는 투우와 축제, 연보랏빛 수국과 푸른 바다, 푸른 들판과 언덕이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듯 행복의 이면에는 슬픔이 깃든 것처럼 아름다운 자연 풍광 뒤에는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아조레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항해 시대의 첫 번째 행선지였던 아조레스 섬은 독재와 냉전 시대를 겪어내기도 했고, 화산 폭발의 자연재해를 입은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상실과 이별의 아픈 사연이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갖가지 사연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는 설핏 가을빛이 돌았다. 내가 카르도주 부인을 처음 만났던 때에 비하면 150센티미터는 더 자란 옥수숫대 위로 노란 금빛이 반짝거렸다. 무지근한 통증이 퍼지는 걸 느끼며 마을을 거닐고 있었다. 혹시 이게 사우다지의 초기증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p.174~p.175)

 

이민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사우다지(saudade)'라고 한다. 우리말로 풀자면 향수 또는 깊은 그리움에 가깝지만 포르투갈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는 그 의미를 온전히 전할 수 없다. 파두의 애절한 가락에 담긴 그 깊은 의미를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없을지라도 디아스포라의 삶은 언제나 영혼 한구석에 남겨진 상처와 갈망, 좌절과 그리움이 혼재한다. 기자로서의 직업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아조레스 방문은 저자로 하여금 자기 안의 상실과 갈망을 마주하도록 했다. 오래전에 부모를 잃고 외딴섬에 남겨진 것처럼 느껴왔던 것도, 아르메니아인 일가와 가족같이 지내왔던 것도, 오랜 시간 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제대로 된 연애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도 가슴 깊이 묻어둔 상실감과 무엇인가에 대한 갈망이 치유되지 않았던 까닭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오늘 할 일을 내일 할 수 있다면 굳이 왜 오늘 해야 하느냐고 묻고, 당장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있지만 투우 관람이 더 중요하며,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음을 믿는 등 시종일관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들이 사는 곳 아조레스 섬.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저자가 발견한 것은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천천히 깨달아가기 시작하는 저자는 자신이 찾던 진정한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된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열 번째 섬'을 찾는 끝없는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떠나 있어도 마음은 머물게 되는 곳'이라는 의미의 '열 번째 섬'. 저자 자신의 경험담이자 아조레스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이 책을 읽는 순간보다 책을 다 읽고 책의 내용을 되새김질하는 순간에 더 많은 의미를 깨닫게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삶이 경과하는 동안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도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우리의 삶을 닮아 있기 때문일 터였다. 17호 태풍 타파가 지나가고 있다. 태풍이 지나가며 남긴 상처는 작든 크든 시간이 흐르면 아물겠지만 우리들 각자가 만든 마음속 태풍은 언제쯤에나 잦아들까.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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