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심보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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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을 때 또는 시인이 쓴 시를 읽을 때, 단지 우리는 장르가 다른 두 문학 체계만 염두에 둘 뿐 그들 각자가 쓰는 문장이나 언어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설가가 쓴 에세이와 시인이 쓴 에세이를 읽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깨닫게 된다. 집중하는 장르가 서로 다르다는 건 그만큼의 간극이 벌어지게 마련이라는 걸 에세이를 읽는 독자들은 알고 있을까? 예컨대 소설가는 동사 또는 형용사와 같은 서술어에 집중하는 반면 시인은 명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요새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서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서러움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원통하고 슬프다'라는 정의가 나온다. 하지만 이 정의는 부족하다. 나는 서러움을 '상실감에 머물면서 그것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본다. 서러움에 젖어 시를 썼던 파베세와 백석이 부럽기 짝이 없다." (p.179)

 

심보선 시인은 '알려해도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 마음을 그칠 수 없는 인생의 화두들', 말하자면 세 가지 인생의 수수께끼가 있다고 말한다.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가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총 세 개의 부로 나뉜 책의 구성도 '영혼의 문제'로 시작하는 제1부, '내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로 시작하는 제2부, '달려라 중학생'으로 시작하는 제3부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과 관계를 맺고 삶을 형성해가는 가족, 이웃, 그리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는 소소한 일상과 시인의 사유가 덧붙여져 독자들로 하여금 또다른 사유의 여지를 제공한다.

 

"영혼은 의미와 무의미를 같은 장소로 데려온다. 연혼은 '행복하지만 삶의 의미에 무지한 아이'와 '불행하지만 삶의 의미에 도통한 노인'을 합체시켜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영혼은 오늘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수렴시켜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한다. 연혼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새로워진다." (p.22)

 

제2부는 시인이 다섯 살이었던 아스라한 과거의 기억으로 시작된다. 몇 살이니?로 시작되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여섯 살, 일곱 살, 그 너머의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고, 미리 생각한 미래에 두려움과 기대를 섞고, 그렇게 연속성과 정체성의 감각이 막연하게 형성되었다고 회고한다. 훈련소에서 읽었던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밝혀졌고, 대학에 못 간 한을 독서로 풀었던 아버지를 둔 덕분에 집에는 온갖 교양서적과 오랫동안 수집해온 '사상계' 잡지가 있었고, 시인은 어느 날 책 속에 끼워진 아버지의 육필 메모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것은 영원히 신비로운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시인은 '아버지의 비밀을 계승한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시인은 그와 같은 지극히 비밀스럽고 사적인 경험으로부터 성동혁, 신해욱, 최승자 시인의 시에 대한 단상, 김소연 시인과 함께 진행한 시 창작 워크숍 '퀼티드 포엠', 체사레 파베세, 존 버거, 페르난두 페소아, 백석 등의 이야기로 옮아간다.

 

"나는 시사 평범해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시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드물지만 그런 자리가 마련될 때가 있다. 본격적이지 않아도 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당당하진 않아도 자신이 쓰고 외운 시를 사람들 앞에서 읽고 공유할 때가, 전부는 아니라도 비밀의 일부를 서로에게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가 작업이기에 앞서 하나의 독특한 언어활동, 언어적 쓸모와 경험을 확장하는 소통 양식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P.202)

 

제3부에서 시인은 여러 꼭지에 걸쳐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에서부터 청문회 현장에서 본 선과 악의 평범성,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진실을 규명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안산 순례길' 공연 등. 고공 농성 중인 해고 노동자들에게 트위터를 통해 소설, 시, 에세이, 혹은 개인적인 지지 메시지를 녹음하여 육성으로 들려주었던 '소리 연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쌍용자동차 해고자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의 현장에 대해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다. 공동체라는 애틋한 이름에 담긴 시인의 생각들.

 

"우리는 서로의 역량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공평하게 존중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비핵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평화주의자의 레토릭이나 시인의 메타포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의 분석으로 들리기를 바란다. 사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이 전쟁터로 바뀐 지 오래라는 것을." (P.316)

 

시인의 언어는 산문을 쓰는 소설가와 다르다. 물론 수필을 전문적으로 쓰는 에세이스트와도 다르다. 그러나 시가 시인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산문 역시 소설가나 에세이스트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름을 통해 서로를 확인하고, 공동체를 통해 다름이 하나로 합쳐지는 기적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아베에 의해 발발된 한국과 일본의 경제 전쟁으로 인해 같은 한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새롭게 느끼게 되는 요즘,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다른 누군가를 향해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안부를 묻게 된다. 지난 열흘 동안 오직 무사 귀환을 기도하며 온 국민이 조은누리 양의 안부를 물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다른  어느 곳에서 나처럼 8월의 더위를 꿋꿋이 견디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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