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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 시 - 아픈 세상을 걷는 당신을 위해
로저 하우스덴 지음, 문형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한 줄 시구가 가슴을 파고드는 날이 있다. 정말이지 생생하게 날 선 시의 이미지가 가슴 깊이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왠지 쓰디쓴 소주 한 잔이 생각나기도 하고, 늦은 밤 실례를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긴 넋두리를 풀어내고 싶기도 하다. 마치 오래된 슬픔을 새로운 슬픔으로 대체하면서 옛 슬픔을 아주 까맣게 지워버리려는 듯이 말이다. '인생은 짧다, 비록 내 아이들에겐 이것을 비밀로 하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매기 스미스의 시 '좋은 뼈대(Good Bones)'의 시구처럼 생경하거나 전혀 새롭지 않은 시구가 울컥울컥 눈물을 지어내는, 그런 날이 있는 것이다.
인생은 짧다, 비록 내 아이들에겐 이것을 비밀로 하겠지만.
인생은 짧다, 그리고 흘러간 내 삶은 더 짧아졌다
수없이 달콤하고, 어리석은 짓들로 인해,
달콤하고도 어리석은 수많은 행동들
내 아이들에겐 비밀로 할 것이다. 세상은 적어도
오십 퍼센트는 끔찍한 곳, 그조차도 긍정적으로
바라본 평가인 것을, 비록 내 아이들에겐 이것을 비밀로 하겠지만.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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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에세이스트 로저 하우스덴은 그의 저서 <힘들 때 시>에서 그가 뽑은 10편의 시를 소개하면서 시에 내재된 인생의 아픔과 불안, 슬픔과 고뇌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익숙하지만 결코 달갑지 않은 그런 감정들을 작가 자신의 설명에 곁들여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리고 시에 내재된 무한한 치유력과 생명력에 대해 설파한다. 역자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자신도 그랬던 것처럼 독자들도 저자가 고른 시와 저자의 정성 어린 해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시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된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을 읽은 소감에 대해 물어본다면, 아마 뿌듯한 마음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맛집을 말해주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좋은 식재료에 훌륭한 솜씨를 가진 요리사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듯, 좋은 시를 고르고 독자가 충분히 즐거움을 누리기 바라는 저자의 정성 어린 해설을 곁들인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p.182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나는 이따금 스마트폰이 없던 아주 오래된 과거를 아주 간절한 그리움으로 떠올리곤 한다. 그 시절에 우리는 누군가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기 위해 시집 한 권을 옆구리에 낀 채 집을 나서곤 했다. 희미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낡은 버스 좌석에 앉아, 퀴퀴한 곰팡내가 하루 종일 맴도는 어느 지하 다방의 소파에 앉아, 그리고 갈색으로 물드는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우리는 시가 주는 낭만에 흠뻑 취하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 시절이 시에게도, 낭만을 갈구하는 청춘에게도 한 번쯤 누릴 수 있는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빛이 어떻게 오는지
당신에게 말해줄 수는 없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닿기 위해
놀라울 만큼 광대한 곳을 지나
이동해 왔다는 것이다. (p.103 '빛이 오는 방법'-잔 리처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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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나 아름다움 잘 꾸며지고 각색된 것이 아니다. 그런 허위나 감추어진 진실이 우리를 위로할 것 같으면 우리의 삶도 가짜일 터, 시는 우리에게 우리의 시선 너머에 있는 진실을 직시하도록 돕는다. 시라는 필터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없었던 현실 이전의 현실, 그 적나라한 실재를 거듭 응시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깊고 추한 상처와 뒤틀림, 고독, 불안, 피할 수 없는 운명들을 하나하나 꿰뚫어 보며 더한 슬픔에도 과감히 맞설 수 있는 커다란 용기를 얻는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언제나 부러진 나뭇가지들과 돌들이 흩뿌려져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장애물들조차 행로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천상의 존재들이 아니므로 오히려 그 장애물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을 실체화한다. 그 장애물들이 우리를 먼저 부서뜨리지만 않는다면, 물리적 세계의 거친 모서리에서 우리는 영혼을 평온하게 할 저항력을 기르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문을 열 수 있다. 우리가 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 윌리엄 스태포드의 시가 튀어나온 세계이다." (p.84)
인간의 감정은 대개 역설적이다. 너무나 슬픈 시를 읽으면 우리도 덩달아 슬퍼질 듯하지만, 우리는 잠시 슬픔으로 인해 머뭇거리다가도 그 슬픔으로 인해 용기를 얻고, 지나간 슬픔을 걷어내기 위해 밝은 웃음을 짓곤 한다. 앞으로의 남은 인생에서 슬픔이란 다신 없을 것처럼... 그러나 멀지 않을 미래에 우리를 쓰러트릴 고통이나 슬픔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다짐하듯 되뇌면서도 우리는 현재의 기쁨을 발견하기도 하고, 작은 희망을 손에 쥐기도 한다.
"예술가와 시인은 인류애의 마지막 형체이다. 그들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아마도 인간다움을 유지해야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머리말' 중에서)
비가 그쳤다. 우리는 또 달라진 세상을 보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읽듯, 어쩌면 한 줌 희망을 손 안에 쥐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