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순례길이다 - 지친 영혼의 위로,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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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방사수까지는 아니지만 어쩌다 시간이 되면 싫증 내거나 지루해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진득하게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텔레비전을 즐겨 보거나 쉽게 빠져들지 않는 까닭에 남들이 다들 재미있다며 추천하는 프로그램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시청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그랬던 내가 자발적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게 될 줄이야. 나로서도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세간의 관심을 받는 인기 프로그램도 아닌 듯한데 말이다.

 

금요일 밤에 나를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들이는 프로그램은 <스페인 하숙>이다.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이 알베르게의 주인이 되어 방문하는 순례객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한다는 설정의 예능 프로그램인 '스페인 하숙'은 시청자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안겨줄 것 같지도 않은데 나처럼 뭔가에 홀린 듯 이끌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가 보았다. 현대인들의 숨 가쁜 일상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연유로 금요일 저녁 시간을 몇 주째 텔레비전 시청에 쓰고 있다.

 

지난주에는 알베르게를 찾은 어느 외국인 순례객이 자신이 만났던 나이 든 순례객에 대한 언급이 시선을 끌었다. 10년쯤 전에 아내를 암으로 보내고 이제는 자신도 암환자가 되었다는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28번째 걷는다고 했다. 그가 남겼던 말은 '인생은 아름다운 선물과 같다'는 거였다고. 그것은 분명 어느 책에선가 한 번쯤 읽어보았음직한, 또는 누군가로부터 한 번쯤 들어본 말일 테지만 삶을 정리하는 어느 누군가로부터 듣게 될 때 그 무게는 사뭇 다르게 느껴질 듯했다. 약간의 뭉클한 감동을 느꼈던 덕분인지 나는 건축가 김희곤이 쓴 <스페인은 순례길이다>를 주말 휴일을 이용하여 단숨에 읽었다.

 

순례길의 막바지에 위치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라고 했다. 나는 이미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마을의 풍경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책에서 보는 사진은 또 달랐다. 저자도 이곳에서는 뭔가 다른 기운을 느꼈던지 전에 없이 감상에 젖는 듯했다. 건축가의 시선에서 갑자기 문학가의 시선으로 바뀐 듯한 문장이 나로 하여금 잠시 넋을 놓게 했다.

 

"신의 품을 빠져나와 알베르게 마당을 가로질렀다. 스위스에서 온 숙녀가 돌담에 걸터앉아 미소 지었다.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아 계곡을 굽어봤다. 운무가 파란 능선 위에 솜사탕처럼 걸려 있었다. 마음도 안개구름을 타고 흘렀다. 돌집 아래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천막 속 형형색색의 장식품들이 고개를 내밀고, 거친 벽에 매달린 표주박들이 아침 햇살을 기웃거렸다. 여기저기 농기구가 아무렇게 놓여 있는 길가에 검은 돌조각들이 담장을 따라 흐르다 산장의 벽을 따라 올라타고는 곧바로 지붕을 눌러썼다. 라 파바의 아침이 세상의 모서리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고 있었다." (p.250)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많은 이들의 저서를 한두 권쯤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터,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독일의 유명한 코미디언 하페 케르켈링이 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한효정의 <지금 여기, 산티아고>, 김진세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등 많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블로그 이웃 중 한 분의 산티아고 순례기를 빼놓지 않고 읽었었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프랑스 남부 생장피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728km의 기나긴 여정이 짝사랑의 대상처럼 가슴에 남았던 까닭이다.

 

"오늘날 파리가 매력적인 것은 순례길의 제로 포인트여서도 아니고,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중세와 근대의 아픈 역사를 사랑으로 감싸고 미래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파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게 좋다." (P.51)

 

전에 읽었던 브르통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다.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과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걷기는 눈의 활동만을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우리는 아는 만큼만 보게 되는 까닭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놓인 대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수많은 중세 스페인 건축물들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혹시 걷게 될지도 모르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수많은 건축물들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나는 건축가 김희곤이 쓴 <스페인은 순례길이다>를 슬쩍 곁눈질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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