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재승 교수의 <열두 발자국>은 올해 대학을 졸업한 조카에게 선물했던 책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때 책의 목차만 보고, 본문은 읽지도 않은 채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조카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과 함께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며 일독을 권했었다. 내가 먼저 읽고 권하는 것처럼. 인간의 행동이란 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알량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한 줌 권위를 지키기 위해 별 필요도 없는 수고를 감수할 때가 있다. 인간의 의사결정은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뇌과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의사결정, 창의성, 놀이, 결핍, 습관, 미신, 혁신, 혁명 등 인간의 다양한 행동과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통해 인간을 다각도로 이해하려 하고 있다. 물론 '이러이러하게 하면 좋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모두에게 적합한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다면 각자의 성향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숲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본질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수만 발자국의 탐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 겨우 뗀 열두 발자국은 그 첫걸음이라 하겠지만, 기꺼이 과학자들과 함께 탐험에 합류해 주세요.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던 사실들이 전복되는 유쾌한 경험을, 통념과 익숙한 상식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겁니다." (p.12 '프롤로그' 중에서)

 

예컨대 선택지가 많은 상황보다는 더 적은 선택지 하에서 소비자의 구매율이 높게 나타난다거나, 작금의 세대가 정답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성장한 까닭에 결정장애를 앓는 사람이 많아졌다거나, 결핍을 모른 채 성장하여 지적 호기심을 느껴보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사회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전제된 상태에서 긴 시간에 걸친 점진적인 개혁이 필수적이겠지만 그러자면 구성원들의 집단지성이 한 단계 더 성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정답을 찾는 교육이 아니라, 좋은 문제를 정의하는 교육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정해진 답을 남들보다 먼저 찾는 교육이 아니라 나만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능력이 더 존중받아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수학적 추론을 가르치고, 틀에 박힌 언어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교육이 곧 사고와 철학 교육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42)

 

저자는 개인의 좋은 의사결정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놀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지,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등 우리가 그동안 궁금해했거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우왕좌왕했던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아하,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게 된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서적인 까닭에 다소 피상적이거나 과학적 실험의 결과물을 지나치게 축소해서 전달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습관은 안락하고, 포근하고, 안전하게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새로고침이 주는 뜻밖의 재미, 유쾌한 즐거움은 여러분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겁니다. '내가 지금처럼 10년 살아봤더니 이 삶이 주는 즐거움이 뭔지 충분히 알겠어. 그럼 이제 새로운 삶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해볼까?' 하는 설렘으로 새로고침을 시도해보시면 어떨까요." (p.154)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일자리 행정통계 결과'에 따르면, 영리 기업 가운데 대기업 근로자의 평균 근속기간은 7.4년인데 반해 중소기업은 3.0년에 그쳤다고 한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크다. 좋든 싫든 우리는 첫 직장에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며, 경력을 인정받고 이직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공부를 하여 7년을 주기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회사원이라면 더 빈번하게 이직을 준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크나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오랜 습관이 주는 안온함을 포기하고 7년마다 한 번씩 리셋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생존을 위해서.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종종 이유도 없이 멍해질 때가 있다. 어디가 아프거나 탈이 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멍한 상태에서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지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내가 간절히 원했던 모습도 아니요, 같은 모습으로 여러 해 유지해온 것도 아닌 까닭에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경하다. 게다가 내 삶의 끝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으니 나는 지금 삶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도통 모르는 것 투성이이니 때로 멍해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편집, 검색, 빠른 모드 전환 등 스마트폰적인 사고를 하는 시간과 책을 읽고 오래 생각하고 멍 때리면서 사색하는 시간 사이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이 균형이 내 삶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채우는 역할을 했는데, 인생 몰입 기술은 이균형을 깨뜨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매 순간 '인생 내비게이션'을 켜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 테니까요. 내 삶을 다양한 모드로 전환하면서 원하는 정보는 빨리 얻고 실수할 확률은 좀 더 줄어들겠지만, 깊이 사색하고 오래 성찰하는 삶과는 좀 더 멀어지게 될 겁니다." (p.280)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젊은이들의 인생이 '탐험의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길 진심으로 응원'한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에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고, 놀이를 통해 더 나은 대답을 찾아가며, 상상을 현실로 만들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으로 혁명을 일구어가며, 사려 깊게 준비한 탐험가의 자세로 성취를 이루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자신을 인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읽지도 않고 짐짓 읽은 체한 게 부끄러워 뒤늦은 독서를 한 나처럼 무작정 미루거나 버틸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일단 부딪혀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해결책을 생각하는 그런 다이내믹한 삶을 살아가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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