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소중했던 것들 (볕뉘 에디션)
이기주 지음 / 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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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래저래 되는 게 없는 하루였다. 이런 날이면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계절을 오가고 건기와 우기를 반복한다. 그뿐이랴. 금세 먹구름이 몰려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금세 쨍하고 볕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생각에 밴 습기가 사라져 서걱거리지만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에 언제든 동조할 준비만 갖추어져 있다면 하루에 열두 번이 아니라 백이십 번 바뀐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게 없는 것이다. 오늘은 비록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날이었지만 내일은 또 다를 테니까.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가슴에 쌓인 위로를 바닥까지 박박 긁어 쓴 날이면 나는 이따금 오래된 편지를 뒤적이기도 하고,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보내고 나면 물이 고이듯 가슴에는 그리움이 몰려든다. 결국 위로가 되는 건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단절이나 결핍을 경험한 후에나 생겨나는 감정, 그리움. 과거와의 단절일 수도 있고,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의 단절일 수도 있는 그 경험은 당시에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지라도 시간을 통해 숙성된 감정은 농익은 과일처럼 달콤하다.

 

"가을이 짙어질수록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과 일상이 건네주는 하찮은 것들의 소중함을 감사히 여기게 된다. 선선한 바람에 마음 한편이 허물어질수록 곁에 있는 대상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안의 허전함을 채우는 방법일 거란 믿음이, 몸과 마음에 빈틈없이 들어찬다." (p.115)

 

이기주의 산문집 <한때 소중했던 것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녀적 감성에 사로잡히도록 한다.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애잔하거나 쓸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때 소중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들을 매일 조금씩 흘려보내는 게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 느낌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감을 두드리는 그런 경험들을 하나둘 겪어낼 때마다 머릿속에 작은 깨달음 하나쯤 얻게 되는 게 아닐까.

 

"한때는 나도 세월의 강물에 보폭을 맞춰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언젠가는 강물을 추월해, 물 위에서 부유하며 반짝이는 것들을 붙잡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오산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절감하게 된다. 시간은 늘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다는 것을, 인생의 하류로 쓸려 내려가는 것들은 갈수록 늘어가지만 내 뜀박질은 점점 느려지고 있음을, 그리고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 온전히 간직하려면 온전히 떠나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232)

 

1부 '추스르다'는 투병생활을 하던 작가의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 했던 어머니의 당부 말씀 '크게 그리고 천천히 자라다오'처럼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세월과 함께 무겁게 다가오는 말의 의미와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작은 깨달음들을 담고 있다. 2부 '건네주다'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함게 삶의 단상을 담고 있다.

 

"우린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기쁨의 앙금을 틈틈이 휘저어서 붕 떠오르게 하거나,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기쁨을 끌어다 설움과 애통함의 농도를 묽게 희석하며 사는 게 아닐까. 슬픔을 적당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내면서, 슬픔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말이다." (p.154)

 

3부 '떠나보내다'는 작가가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와 책 등을 통하여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전하고 있다.

 

"상처와 관련해 인간은 이중적인 심리가 있다. 우린 마음의 흠집과 상처를 꼭꼭 감추려 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 그것들을 알아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종종 믿을 만한 사람 앞에서 은연중에 삶의 비애, 허무, 고충 따위를 넌지시 밖으로 흘리는 것이다. 꼭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내 사정을 알아주었으면, 누군가 내 상처를 인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p.63)

 

감정 소모가 많은 책일수록 다시 읽게 될 가능성은 적어진다.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 그러므로 다분히 감상적이거나 슬픔을 과장하는 글은 피하게 된다. 그렇다고 에세이가 철학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질 필요야 없겠지만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토로하는 그런 글들이 더 가슴에 남는다. 예컨대 지금은 고인이 된 위지안 작가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와 같은 책은 다 읽은 후에도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곤 한다. 태풍 솔릭이 북상하고 있다는데 사람들은 그저 무심하다. 제발 큰 피해가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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