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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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어떤 순간에도 그것만은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를테면 청소년기에 저질렀던 우연한 범죄와 그것에서 잉태된 수많은 이차범죄는 모두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자 했던 본능적 동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나쁘게 각인시키고 싶지 않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이른 나이에 별 뜻도 없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평생 동안 범죄자라는 오명과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죄를 감추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까닭에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거짓과 위선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던 작은 몸짓에서 잉태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알고 지내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숨기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될 터였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남은 인생과도 직결되는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관건은 그거야, 에디. 찬송가를 부르거나 가공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십자가를 걸고 다니거나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남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거지. 착한 사람은 종교가 필요 없어.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감이 있거든." (p.230)

 

영국의 신예 작가 C.J. 튜더는 그녀의 데뷔작 <초크맨>을 통하여 평화로운 작은 마을 앤더베리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곳에 사는 다섯 명의 열두 살 또래 친구들은 1986년 어느 날 숲 속에서 끔찍한 사건 현장을 목격한다. 낙엽 더미에 숨겨진 여자의 시신. 마을 축제에서 춤을 추던 댄싱걸 일라이저의 시신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에디는 또래 친구들 중 한 명이다. 학교에 새로 부임하게 된 핼로런 씨와 에디는 축제 현장에서 큰 부상을 입은 일라이저를 함께 구조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죽은 일라이저와의 조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죽음은 우리 같은 어린 아이나 우리 주변이 아니라 다른 데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죽음은 추상적이고 먼 일이었다. 나는 아마 션 쿠퍼의 장례식을 통해 서늘하고 시큼한 입김 바로 그 너머에 사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가장 놀라운 전략이다. 그의 차갑고 어두컴컴한 소매 속에는 전략이 많이 숨겨져 있다." (p.164)

 

또래 친구들의 면면은 이러했다. 바를 운영하는 부모님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하는 뚱뚱보 개브, 불량배 형을 둔 메탈 미키(교정기를 끼고 있어서), 청소 일을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호포, 마을 교회의 목사인 마틴 씨의 딸인 니키(또래 중 유일한 여자였다), 그리고 의사인 엄마와 작가인 아빠를 둔 에디. 핼로런 씨가 부임하면서 아이들은 선물로 받은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각자 자신만의 색을 정하고 약속한 막대 그림을 통하여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다. '놀이터로 와' 또는 '숲 속으로' 등과 같은 그들만의 메시지를.

 

"나뭇잎들이 오그라들고 쭈글쭈글해지다 결국에는 힘없이 나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시들시들하게 죽어가는 분위기가 모든 것에 스며들었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신선하거나 다채롭거나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온 마을이 자기만의 부연 타임캡슐 안에 갇혀서 잠시 유예됐다." (p.255)

 

숲에서 미키의 형인 션 쿠퍼의 패거리들과 우연히 마주쳤던 에디와 그의 일당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고 그 후 에디는 션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에는 붙잡혀 곤욕을 치른다. 그 장면을 목격한 핼로런 선생님의 도움으로 션 패거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에디는 자신의 몰골을 보고 걱정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핼로런 선생님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가기로 한다. 에디는 일라이저를 그린 핼로런 선생님의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된다. 서른이 넘은 독신남과 십대 후반의 일라이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션 쿠퍼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자전거가 물속에 있는 것을 보고 건지러 들어갔다가 물에 빠져 익사한다. 션이 사고를 당한 지점에서도 누군가가 그린 분필 그림이 있었다. 형을 사고로 잃은 미키는 형의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또래 친구들로부터 멀어진다. 에디의 엄마는 그들이 사는 앤더베리에 병원을 개원하려 한다. 그러나 낙태를 반대하는 마틴 목사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일라이저의 친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어느 날 마틴 목사는 교회에서 누군가로부터 심한 폭행을 받고 쓰러진다. 교회에는 초크맨 그림이 가득했다. 니키는 마틴 목사와 이혼한 엄마의 집으로 이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초크맨 그림을 따라 숲 속으로 갔던 아이들은 숲 속에서 일라이저의 토막 난 시신을 발견한다.

 

"그웬은 의자에 제대로 앉아서 텔레비전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그녀의 세상 속으로 아니면 제삼의 세상 속으로 길을 잃는다. 현실과 현실 사이의 그 얇은 막 속으로. 어쩌면 이성이 길을 잃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다른 공간을 거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p.264)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6년, 에디는 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개브는 부모님의 바를 물려받았고, 호포는 치매를 앓는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또래 친구들 다섯 명 중 마을에는 이제 그들 세 명만 남았다. 그들에게 전해진 초크맨 그림과 분필. 일라이저의 죽음을 소재로 책을 쓰고 싶다던 미키가 에디의 집을 방문했던 그날 술에 취해 돌아가던 중 물에 빠져 숨을 거두게 되는데... 소설은 그렇게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작가는 2016년과 1986년을 오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사춘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또래 친구들의 유대와 그럼에도 어린 시절에는 차마 밝히지 못했던 그들 개개인의 비밀들, 그리고 어른들의 위선과 폭력이 조금씩 드러난다. 작가는 유려한 필체와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장르 소설로서의 한계를 극복해나가고 있다. 데뷔작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탁월한 구성과 빼어난 글솜씨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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