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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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는 아니고 '마라도에서 남쪽으로 365킬로미터, 중국 저장성 저우산에서 동쪽으로 433킬로미터, 일본 가고시마현 구마게에서 서쪽으로 343킬로미터 지점'의 말하자면 동중국해 한복판에 있는 아로니아 공화국을 아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딸기 공화국도 아니고 사과 공화국도 아닌 아로니아 공화국을 말이다. 1978년 발효되어 2028년에 만료되는 한‧일 대륙붕 협정은 혹시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난이라는 여가수가 '제7광구'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러 우리나라 국민 모두에게 산유국의 꿈을 한껏 부풀게 했던 그 7광구가 아로니아 공화국의 위치이다. 그래도 모르겠다고? 그럴 수밖에. 아로니아 공화국은 김대현 작가의 소설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의 배경일뿐 실재하는 지명이 아닌 가상의 공간이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순전히 개뻥이라는 얘기.

 

"아로니아를 건국하는 동안 수도 없이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알량한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남을 속이고 속이다가 스스로조차 속아서 진실과 거짓이 얽히고설켜버린 추잡하고 너절하고 추레한 인간, 사기꾼. 나는 동중국해 한복판에 영토를 건설했고 강하고 새로운 시민들과 함께했으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비가역적 주권국가를 선포했다." (p.16)

 

'나의 꿈이 출렁이는 바다 깊은 곳/흑진주 빛을 잃고 숨어 있는 곳/제7광구 검은 진주 제7광구 검은 진주'로 시작되는 제7광구의 노랫말은 <아로니아 공화국>의 국가는 아니었다. 소설에 의하면 아로니아 공화국의 국가는 <포에버 아로니아>로 가사는 'My life is beautiful. Our life is wonderful. Beautiful, Wonderful, Wnderful, Beautifil. Forever Aronia!'의 짧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노랫말로 이루어져 있다. 뭐 세상 사는 게 다 유치하고 덧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아로니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김,대,현'이 아닌, 거기에서 한 글자가 다른 '김,강,현'의 어린 시절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블랙 코미디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소설의 처음 몇 쪽을 넘기기도 전에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떠올리기도 하고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가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촌철살인의 명언을 남겨주시는 커트 보니거트의 소설들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지만...

 

"<꾸르꾸르꾸르륵>은 실시간 시청자 수 25억 명을 돌파했고 쪽팔리는 일이지만 욕지거리를 퍼붓던 내 영상은 오만 가지 패러디 영상으로 만들어져서 SNS를 돌아다녔으며 나는 세계에서 쏟아지는 수억 통의 팬레터와 메시지를 받았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사과 메시지를 발표하고 1시간 후, 일본이 총리 특사를 아로니아에 파견하고 싶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p.381)

 

난곡과 신림동을 무대로 삥이나 뜯고 동네 만화방이나 들락거리던 소년 김강현이 아버지에게 걸려 죽도록 얻어 맞고 끌려간 곳이 아버지의 후배가 운영하는 합기도장이었다. 그곳에서 김강현은 사형이자 누나의 도움을 받아 운동과 학업에 매진하여 전교 1등이라는 신기원을 이루고 무조건적인 암기만으로 서울대에 합격하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사법시험을 통과하여 검사가 되고 첫사랑과 결혼한다. 이쯤 되면 아무리 상상이라지만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고 따지려 드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상상인데 무슨 말인들 못할까. 독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니고, 아로니아 공화국에 투자를 하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소설은 김강현의 인생사이자 아로니아 공화국의 건국기인 듯 보이지만 실은 김강현이 살아온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인 동시에 그 속에 내재된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토해내는 우리 역사의 반성문인 셈이다. 죄가 없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죄인을 만들 수 있는 세상, 암기만 잘하면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세상 그 모든 부조리를 알고 변화시키려 해도 국가라는 시스템은 꿈쩍도 하지 않았던 국민들의 비애.

 

"아로니아 시민은 아프거나 다치거나 혹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더라도 시민연금으로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기업에서 노동을 하는 아로니아 시민들도 당연히 시민연금을 수령하지만 2038년 6월 현재, 아로니아 노동자의 55퍼센트가 시민연금을 아로니아에 일부 반납하고 15퍼센트는 전액 반납하고 잇다. 에고, 부탁합니다. 시민연금 좀 써주세요. 제발요!" (p.354)

 

대통령을 퇴임한 후 자신이 어렸을 때 뻔질나게 드나들던 동구 만화방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 김강현. 아이가 태어나면 전 국민이 광장에 모여 축하파티를 열고, 대통령이 '영원히 행복할 의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펜던트 목걸이를 아기 목에 걸어주는 그런 나라의 대통령 김강현. 책을 읽는 독자는 어느 순간 김강현의 엉뚱 발랄한 생각과 순수한 철학에 반하게 된다. 어쩌면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만의 아로니아 공화국은 뇌의 깊숙한 곳 시상하부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도 위의 한 지점, 우리 모두의 꿈이 만나는 그곳에 언젠가는 실제로 건국의 깃발이 펄럭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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