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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평점 :
아침 기온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코에 스미는 공기는 깨끗했다. 맑고 청량한 공기의 느낌이 잠이 덜 깬 모든 감각기관을 서둘러 호출하는 듯했다. 올 가을은 유난히 비가 적었다. 바싹 마른 낙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길에 차여 제멋대로 흩어지곤 했다. 그리고 비탈면에 쌓인 낙엽은 무게를 잃고 부풀어올라 발밑에 눌린 낙엽 더미는 조금의 마찰력도 없이 쭉쭉 미끄러지곤 했다. 마치 빙판 위를 걷는 나그네처럼 나는 한 발 한 발 옮기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어느 등산객이 버렸는지 코를 푼 듯한 화장지가 (조금 과장하자면)1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휴지를 줍느라 하산길이 무척이나 더뎌지기만 했다.
어떤 직업군이나 연차와 경험이 쌓이면 자신이 맡은 일에 조금씩 긴장을 풀게 된다. 말하자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다. 그게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농땡이를 피우는 듯 비칠 때도 있다. 물론 직급이 오를수록 이전에 자신이 하던 많은 일을 연차가 낮은 다른 동료 직원에게 위임함으로써 어느 정도 근무 강도가 약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요령도 생기고 전에 비해 근무 강도도 약해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남는 빈도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짬이 나는 그 시간에 딴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는 점이다. 퇴임 이후의 노후 대비라거나 자식들의 진로 문제 등 결론도 나지 않을 문제를 들춰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무직이 되어 여유가 생겼으므로 인생과 함께 글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동안 썼던 글들을 다시 읽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골랐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인생에 조언할 만큼 지혜롭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판사나 재판관으로 있으면서 생각하였던 바를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저의 인생이 풍요로워질 것이고, 어쩌면 여러분의 인생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p.6 '여는 말' 중에서)
많은 이들이 퇴임 이후의 계획이나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다고 조언하지만 습관이 붙지 않은 직장인들이 짬을 내서 책을 읽는 것은 흔한 풍경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 한들 정작 독서에 매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얘기다. 그보다는 오히려 퇴임 후에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만들고자 하거나 퇴직금을 굴려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는 게 다반사이다.
"독서가 취미라고 하면 밥맛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재미있는 책도 많다는 점, 잠이 안 올 때 어려운 책을 잡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는 점만 말해둔다." (p.116 '취미 세 가지' 중에서)
법조계 인사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그쪽 직업군에 속한 사람이 이 책의 저자처럼 책을 좋아한다면 외부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부 사람들에게는 따가운 눈총이나 받기 십상일 터, 저자 역시 현직에 있을 때는 따돌림깨나 받지 않았을까 싶다. 독서는 고사하고 퇴임 후 돈과 명예를 좇는 일에만 골몰하는 대다수 법조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우아하게 책이나 읽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밥맛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자 결심했던 것도 어제 국민의힘 의원들의 국회선진화법 위반 1심 선고를 보면서 재판장 역시 자신의 퇴임 후를 생각해서 내린 판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고인들 상당수가 법조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이야기이다.
"양형 기준제 전면 확대만이 전관예우 논란을 일거에 재우고 법무부의 양형 기준법 제정 시도를 봉쇄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고, 국민의 개혁 요구에도 부합할 것입니다. 물론 양형 기준제 전면 확대에 관하여 법관들 사이에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양형 기준제라는 큰 틀에서 극복되어야 할 문제일 뿐, 양형기준제를 시행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지났다고 봅니다. 국민의 신뢰와 지지 없이 사법부가 존재할 수 없고, 사법부의 존재 없는 민주주의는 공염불에 그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p.345~p.346)
내가 만나본 여러 직업군의 사람들 중에서 법조계에 근무하는 사람들만큼 '독서지향적'이 아닌 '독서지양적'으로 사는 직업군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판,검사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물론 이 책의 저자인 문형배 전 헌재소장 권한대행처럼 책과 친화적인 인물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판,검사들이 젊어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나이가 들어서는 퇴임 후의 진로를 모색하느라 책과는 담을 쌓고 산다. 단순 무식하게도 법 외에는 아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법조계 밖을 벗어나보지도 않았으니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도 역시 다른 직업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검찰 출신의 전직 대통령만 보더라도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제1야당의 당대표도, 어제 재판을 받았던 야당의 5선 의원도 모두 법조계 출신이다. 그들 수준이 얼마나 한심한가. 그럼에도 그들은 국민 위에서 왕처럼 군림하고자 한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