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 -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안지숙 지음 / 산지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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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독신 중년 여성들의 길 찾기.’

뒷 표지 소개 글이 내 관심을 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던 안지숙 소설집,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을 보았다. 

 

‘독신 중년 여성들’은 무조건 당기는 힘. ‘독신’ ‘중년’ ‘여성’ 가운데 나는 ‘독신’말고 두 가지나 포함되니까. (사십 초반, 중년이 맞긴 한 걸까?) ‘비정규직’은 밀어냈다가도 어쩔 수 없이 다시 당기는 힘. 어쩔 수 없이 아프고 서러운 낱말인지라. (어쩌다 한 번 일이 생기는 귀촌 프리랜서는 비정규직 축에도 못 들지만.)

 

 

책을 다 읽고 보니, 나를 밀기도 당기기도 했던 낱말들, ‘비정규직, 독신, 중년, 여성’이 천천히 서로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섞인다. 누군가에게는 있을 법한, 또 누군가에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속으로 숨어 있기 더 쉬운, ‘평범하고도 평범치 않은’ 우리네 여성들의 삶, 사랑 그리고 아픔.   

 

일곱 개 소설 차근차근 읽어 내고, 마지막에 나오는 ‘바리의 세월’까지 읽고 나니 마음이 답답하고도 뜨끈 애잔하다. 책 끝에 나오는 ‘작가의 말’까지 마저 보니 이 소설집이, 또 많은 소설들이 가진, 내게 없는 그 ‘밝음’과 ‘힘’이 무언지 조금 알 듯도 하다.   

 

 

내게 없는 소설의 그 ‘힘’이란, 작가의 말을 대폭 베껴서 써 보자면……. (작가의 말이 꼭 내 마음 같아서, 그런데 작가의 말보다 더 생생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작가의 말을 아주 제대로 빌려 본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게도 되고, 남의 상처가 헤집어진 이야기들 속에 어설픈 감정이입으로 빠져들며 통증도 같이 느껴 보고, 그러면서 내 이 상처란 놈은 곪을 건덕지도 없는, 밴드 몇 번 붙이고 말면 될 걸 째고 꼬매는 대형 수술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엄살 잔뜩 부린 나약함의 표시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내 빈약한 상처에서 비롯된 통증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없던 철도 조금이나마 들게 되었다.’

 

백수에 준하는 중년 여성인 내가 생생하게 체험한 소설이 가진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알량하게 살아온 여자의 자학개그 

 

“하나같이 알량하게 살아온 여자의 자학개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글쓴이가 작가의 말에 남긴 저 글귀. 겸손함보다는 진실함이 느껴져서 좋다. 이 소설이 자학개그에 지나지 않는다면 내 인생도 아지매개그에 불과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허나 인생은 개그가 아니다. 이 책이 들려주듯 철저하게 아프고 힘들고 외로울 때가 많은 것이 우리네 삶 아니겠나. (누구나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는.) 

 

글쓴이 스스로 ‘내 상처에 내가 무너진 이야기들’을 담았다는 이 책. 우리가 사는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잔뜩 지쳐 사는 여성들의 삶은 덤덤하게 어둡다. 때론 칙칙하게 어둡다. 그러다가는 사무치게도 어둡다. 내가 미처 겪지 못한, 알지 못했던 ‘어두움’들이 많다. 내게 없는 이 소설의 어두움은, 나를 밝은 곳으로 나가고 싶도록 이끄는 불빛 같은 어둠이다.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없을 터. 어둠은 밝음을 있게 하는, 밝음을 비추는 불빛이나 마찬가지겠지. 특히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에서는.        

 

‘체험은 작가의 밑천이고 맷집이다. 체험은 경험보다 몇 수 위이며 맷집은 현실과 소설을 버티는 힘이다.’

 

조갑상 소설가가 이 책에 남긴 헌사 가운데 한 구절. 맷집이라. 현실뿐만 아니라 소설에도 맷집이 필요한 거였구나. 작가의 경험과 체험이 얽히고설킨 맷집으로 아로새겨진 소설. 그 소설을 읽는 행위는 경험일까, 체험일까.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눈으로 글자를 읽고, 글자 속 이면을 마음에 새기는 책 읽기. 내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행위이니 소설을 읽는 것도 ‘체험’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소설을 읽는 것도 나약하고 엄살투성이인 내 현실을 버텨낼 맷집을 키우는 일이 될 수 있으려나?

 

 

엄살투성이 현실을 버티게 해 주는 ‘맷집’

 

생각해 보니 삼십대까지는 소설이 없어도 살만 했다. 버틸 필요 같은 것도 없었다. 아픈 일도 많았지만 행복한 일이 그보다 더 많아서,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나는 밝았다. 더구나 십오 년 가까이 나는 정규직이었다. 소설을 펼쳐들 시간도, 소설이 필요한 시간도 없이 그저 잘 살아왔다.    

 

사십대 초반, 그러니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사십대 안팎’이라고 말하는 그 ‘중년’이 된 지금, 행복한 일보다 아픈 일이 조금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말로는커녕 글로도 남기기 힘든,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그런 아픔들…….) 하물며 지금은 별 계획 없이 산골로 귀촌한 백수 아지매. 나이만 먹었지 실수는 그대로, 어쩌면 더 많아지기만 하는데 세상은 중년 여성인 나를 예전처럼 곱게 봐주지만은 않는다. 버텨낼 힘이 필요해졌다. ‘소설 체험’에 기대서라도 맷집을 키우는 게 필요해졌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 덕분에 그 맷집의 한 켜가 얕게나마 보태진 듯하다. 그게 참 고맙다. 소설에, 그리고 소설가에게.

 

책날개에 박힌 작가 소개 글, 뒤표지 추천하는 글을 두루 보니 오십대 중반에 쓴 이 책이 작가의 첫 소설집이란다. 대박! 이 책이 처음이면 오십년 넘는 인생살이의 맷집을 맛볼 기회가 앞으로도 엄청 많이 남았다는 거랑 같은 말이잖아!

 

내게 없는 소설의 ‘밝음’, 그리고 ‘힘’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안지숙 작가. 오랜 시간 그이의 몸과 마음에 새겨두었을 그 체험의 맷집을 새로운 이야기로 또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좀 더 단단하게 한 켜 한 켜 쌓아 보고 싶다. ‘소설 체험’만이 안겨줄 수 있는 바로 그 ‘맷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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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산지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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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사는 사람들-우리 사회의 소수자들 이야기>(윤수종 엮음, 이학사, 2002)라는 책이 있다. 이 책 맨 앞에 트렌스젠더 여성 소설가 김비가 쓴 글이 나온다. 제목은 작은 외침.’ 내겐 무척 낯선 이야기였지만 참 아픈 글이었다. 이 글을 쓴 뒤로, 김비 씨가 잘 지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했다. 그러다 이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이 나온 걸 알았다. 소설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김비에 대한 어설픈 관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이 이야기는 그런 비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책 맨 뒤에 나오는 작가의 말.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이런 생각으로 소설을 썼을 것 같다는 생각.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므로.

 

비상계단에 갇힌 남수네 식구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은 내겐 좀 낯설었다. 그네들의 삶이 낯설다기보다는 올라도 올라도, 내려가도 내려가도 출구가 없는 공간이라는 설정이 그랬다.

 

나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주 불안하고 두려운데. 비관에 빠져 희망을 꿈꾸지 못할 때가 여전히 많은데……. 진짜로 출구가 없는, 그런 처절한 삶을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걸까. 꽉 막힌 곳에 갇힌 사람들이 아등바등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이야기에 공감이 잘 가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 사람들은 잘못이 하나도 없음에도. 오히려 억울하게 갇혀 있는 상황인데도.

 

갇힌 이들 모두가, 아니면 일부라도 비상계단을 탈출하는 마무리가 나올 줄 알았다. 아니, 기대했다. 그런데 소설은 마지막까지 출구 없는 계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 안에 그대로 남는다. 몇몇은 을 예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 밖을 알 수 없는 둥근 구멍으로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내가 아직 덜 힘들게 살았나 보다. 그리고 힘든 사람들 이야기를 덜 만났나 보다. 출구 없는 삶에서 희망까지 갖지는 못해도, 살아 보겠다고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들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 걸 보니. 이 책을 보면서 김비의 삶에 조금 더 다가서고 싶었는데 아직은 자격미달인 듯.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 태어나 서른 살 나이에 여자로서 다시 태어난 김비 당신을 마음 깊이 응원하노라고,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노라고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의 다음 작품도 꼭 읽어 보겠다는 다짐도. 그땐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해져 있기를 바라며.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

 

후련한 절망.’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도 없이 오고 갔을 작가의 삶이 그려냈을 저 글귀.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말만큼은 꼭 기억해 두고 싶다. 절망에 허덕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지쳐 버린 어느 순간, 그 절망을 후련하게 내려놓을 용기를 내고 싶어질 때, 이 말을 떠올리리라. 그런 순간이 오면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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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음악과 대중 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0
최유준 지음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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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제목은 참 중요하다.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이 제목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책을 사거나 읽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했을까. 무슨 논문 제목처럼 길긴 하지만 제목이 , , 마음에 들어서 샀고, 읽었다.

 

어째서 특정 음악은 음악이라는 말을 독점해 쓰고 있는데, 다른 음악들은 스스로 알아서 대중음악이나 국악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음악은 음악이고 어떤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니. () 음악을 구분하는 불합리한 구분법이 한 가지 더 있다. 앞의 음악-대중음악-국악의 삼분법보다 더 이상한 모양을 한 이분법이다. 바로 예술 음악-대중음악이라는 이분법이다. 예술 음악이라니? 예술 문학, 예술 미술, 예술 무용, 이런 말들도 있던가? 예술 영화라는 말이 간혹 쓰이지만 그것은 특정한 영화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여러 경우에 탄력적으로 쓰일 수 있는 비평적 용어일 뿐이다. 도대체 예술 음악이란 무엇인가? 속을 들여다보면 예술 음악이란 기실 음악 대학의 학과를 점유한 음악, 제도권 교육 내의 주류 음악을 가리킨다(제도권 음악 대학에 국악과가 있으니 국악도 예술 음악인 셈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6)

 

책 맨 앞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나온다. 형식에서 나름 파격이다. 보통은 들어가는 글부터 나오니까. 시작부터 은근 재미난 책이다, 사람이다.

글쓴이도 말하듯 우리 사회에서 음악또는 예술음악하면 흔히 클래식 음악을 떠올리게 된다.(국악을 떠올리는 경우는 잘 없는 듯하지?) 나 또한 어느새 그러고 있는 건 아닌지. 음악을 장르로 나누는 것은 상관없겠으나 모든 음악이 예술일진데 어떤 건 예술음악, 대중음악, 또 국악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다.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당연함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이 책은 던지고 있다. 참으로 마땅한 물음표가 아닌가.

 

, 그러면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에 그어진, 뭔가 잘못된 그 경계선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글쓴이가 내민 방법은 자율음악론실용음악론이라는 새로운 대안이다.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에 바탕을 둔 방법으로 어떤 음악 장르도 편견 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책 안에 표까지 그려서 새로운 이분법이 어떤 내용인지 밝혀 놓았다. 표를 풀고 몇 가지만 적어 본다. 아래와 같이.

 

*자율음악론 : ‘진실한 음악(작품)은 무엇인가’/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음악 내적인 것을 향해 구심적/ 제의, 오락으로부터 거리 유지/ 음악 미학적

*실용음악론 :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음악(행위)는 무엇인가’/ 공동체주의적(평등주의적)/ 음악 외적인 것을 향해 원심적/ 제의, 오락과의 연속성 유지/ 음악 인류학적 (155)

 

눈으로 스스륵 읽을 땐 그런가 보다 싶더니, 옮겨 적으며 다시금 살피니 꽤 말이 된다. 내 식대로 짧게 해석하면, 자율음악론은 음악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고 실용음악론은 음악이 어떤 몫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하자는 말인 듯.

 

맞아, 이거야!” 하고 무릎까지 치기에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예술 음악 대중음악 어쩌고 하는 구분보다는 훨씬 낫다.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잔뜩 묻어나는 새로운 구분. 이 책이 나온 지 10년도 더 되었던데 글쓴이는 이 새로운 음악 이론을 어떻게 넓혀 나가고 있는지 무척 알고 싶다.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감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우리 삶의 환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음악을 들어왔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음악을 통해 말을 배우고 생활 습관을 익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음악적 환경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다. () 음악은 그렇게 우리 삶의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 음악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우리의 담론이 생태론과 닮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령 우리 삶에서 민요가 사라진다는 것은 때가 되면 찾아오던 철새 한 마리가 자취를 감추는 것과 같다. 음악에 대한 담론은 우리 삶을 둘러싼 이러한 음악 환경에 대한 진지한 생태론적 시선에서 출발한다.”(163)

 

음악 담론이 생태론과 닮아 있다는 말이 눈에 쏘옥 들어온다. 음악은 공기처럼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어왔지. 너무 흔해서 소중함을 잊을 때도 많지만. 그러니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은 사실 쓸데없는 말이지. 공기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는 자꾸 말하고만 싶으니 어쩐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아스팔트 위 탁한 공기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까지 맑게 해주는 산 속 깨끗한 공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랑 비슷하게 여기면 그나마 말이 되려나.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은 모 아니면 도식의 위험한 물음이 된다. 같은 취향임이 확인되면 둘 사이의 동질감이 크게 늘어나지만, 취향이 다르면(특히 클래식 음악 취향과 대중 음악 취향으로 나뉘면) 둘 사이의 이질감은 수습하기 힘든 지경으로까지 깊어지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사람들의 취향을 확인하는 것이 이처럼 위험을 동반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취향이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화해하기 힘든 위계적 질서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물론 이 점은 취향의 사회학을 구성하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음악의 경우 그 양상이 극단적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음악에 관한 한 우리의 취향은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취향 사이에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29~30)

 

그러고 보니,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본 적도, 그런 물음을 받아본 적도 잘 없는 거 같다. 윗글대로라면, 위험한 물음이어서 그랬을 수 있다는 말인데. 이제라도 누군가 내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할까? 여전히 나는 흔히 민중가요라고 말하는 노래들이 가장 좋은데. 그렇게 대답하면, “그건 무슨 노랜데요?” 하고 되묻거나, ‘운동권이었나 보네하는 선입견이나 주기 십상일 테고. 그러니 아마도, 머뭇거리다가 그냥 이거저거 들리는 거 다 좋아해요.’ 적당히 말하고 말 것도 같다. 팝송도 재즈도 판소리도 클래식도 내 귀와 마음에 와 닿는 건 다 좋아하지만, 어설피 말했다가는 본전도 뽑지 못할 가능성, 여전히 클 테니. 물어 온 상대방이 저 가운데 어느 한 쪽에 깊숙한 관심이 있다면,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어지겠지. 그러면 난 좋아한다는 말 말고는, 더 구체로 들려줄 이야기가 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괜히 이거저거 다 좋다고 말했네하면서 자괴감에 빠져들 테고.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늘 있던 음악인데, 어쩌다가 우리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뭔가 많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올 때, 그 음악의 제목을 선뜻 말하지 못하면 왜 저절로 부끄러운 기운에 빠져들어야만 했을까. ‘음악에 관한 우리의 취향이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는 말보다 좀 더 쉽고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종다양한 음악적 현상들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과 음악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폭넓은 전망, 이 두 가지는 대중적이며 민주적인 음악 담론을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가 된다. 혹 음악 담론이 왜 필요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면, 나는 록 음악 동아리의 후배를 다시 만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음악 담론은 우리 삶의 ()’을 찾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말이다.” (164)

 

다양한 음악과 음악 현상들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 나부터 그러자고 다짐해 본다. 왠지 나부터 음악 민주주의에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던 것도 같으니. 음악은, 나에게는, 살아가는 낙을 찾는 한 가지 방식을 넘어, 살아가는 까닭이자 살고 싶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삶에서 자꾸 희미해져 가려는 음악을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야 사는 낙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여러 모로 잘 만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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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엉 -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2017 부산문화재단 우수도서, 2017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북투필름 참가작 선정도서
서성란 지음 / 산지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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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불편한 내 처지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소설을 만났다. 내 삶이 소설에 나올 법하다는 말은 아니고, 귀촌한 사람으로서 시골에서 이방인비슷하게 살고 있는 처지를 말하는 것. 글에 나오는 소설가 이령이나 베트남 여자 쓰엉과 닮은 점은 그뿐이다. 그럼에도 감정이입이 너무 잘 돼서는 이 책을 보며 내가 사는 곳과 내 삶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게 됐다.

 

한국음식을 능숙하게 요리한다고 해도 쓰엉은 외국인일 뿐이었다. () 산골에서 나고 그곳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고 선량한 노인들은 낯선 나라에서 며느리를 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인들은 여자를 믿지 않았다. 가일리에서 평생을 살다 죽는다고 해도 쓰엉은 결코 한국인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더라도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18)

 

메콩 강 처녀뱃사공으로 살다가 한국으로 시집 온 지 7년이 된 쓰엉. 그이는 이령의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는 일로 돈을 받으며 살림을 꾸린다. 굳이 외국 사람이 아니어도 할매, 할배가 많은 시골에서 낯선 젊은이는 무조건 관심 대상이다. (귀촌 3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관심이 부담스럽다.) 그러니 마을 토박이 남자와 혼인한, 그것도 그 남자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외국 여자를 두고는 얼마나 말들이 많았을까. 보통 관심이라면 좋은 뜻으로 해석할 때도 많지만, 시골에서는 좀 다르다. 특히 마을 사람이 되겠다고 눌러앉은 낯선사람에게는. ‘신기함에서 출발해 의심경계까지 포함된 그 눈빛을 나는 알고 있다. 늙고 선량한 어르신들한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 눈빛은, 마을 토박이가 아닌 한, 수십 년을 눌러 살더라도 평생 이방인들의 뒤를 쫓아올 거라는 사실도.

 

젊은 사람들 씨가 마른 시골 동네에 무 할라고

 

마을 밖에서 온 소설가 이령은 쓰엉처럼 젊은 여자지만 외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조금은 덜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고 할 수 있으려나.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하얀집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고자 바깥으로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이령. 작은 마을에서 그이를 두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을지 안 봐도 훤하다. 그런 삶은 도시에서라면 수도 없이 많을 터인데, 작은 시골마을에선 이야깃거리를 넘어 마저 된다.

 

젊은 사람들 씨가 마른 시골 동네에 무 할라고 집을 짓고 들어앉았을까나?” 마을 할머니가 이령 부부한테 갖는 궁금증은 애교에 불과하다. (나도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산길에서 이령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사고 원인에는, 이령의 몸 상태에는 관심이 없다.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부부가 지붕이 높이 솟은 집을 짓는 바람에 동티가 난 거라고, 마을에 닥친 액을 막고자 조상들이 알아서 손을 쓴 거라고 수군거렸을 뿐이다. 외지인을 대하는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과연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일까? 산골마을에서 외지인으로 살다 보니 왠지 남 일 같지만은 않아서 씁쓸하다.

 

시골 공동체 정서를 외면한 이령은,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조금이나마 잘못이 있다 치자. 그럼 쓰엉은? 늦은 밤 시도 때도 없이 남편과 같이 있는 방으로 쳐들어오고, 며느리 뺨 때리는 것쯤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시어머니 구박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온 죄밖에 없다. 집에 불이 나면서 삶터도 시어머니도 불길과 함께 사라진 뒤, 술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는 남편 종태를 돌보며 집안을 건사한 쓰엉에게 돌아온 건 남편의 의심과 폭력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수년 동안 살 맞대고 살아온 부인을, 시어머니를 죽이고자 불을 냈다고 의심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출처는 과연 어디인 걸까. 쓰엉이 베트남 여자가 아닌 한국 사람이었어도 감히 그런 의심을 품을 수나 있었을까.

 

그래, 거기서라도 멈췄다면 내 마음이 이다지도 허망하지는 않았겠지. 하루아침에 삶터와 어머니를 잃은 종태는, 원망의 씨앗을 도시에서 온 이방인들한테까지 뿌리고야 말았으니. , 신이시여! 그 씨앗은 급기야 그 이방인들의 집을, 집 안에 꼭꼭 숨어 있던 이령마저 태우는 불씨가 되고야 만다. 그리고 그 불씨는 위태하게 이어져 온 쓰엉의 삶마저 태워버린다. 남편의 거짓 증언으로 불을 낸 죄인이 돼버린 것. 정작 불을 낸 것은 남편이건만. 한국말을 잘하던 쓰엉이 조사를 받는 순간부터 갑자기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대신 가서 사실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을 잃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이럴진데, 쓰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진실을 알고 있는 마음 좋은 벙어리 동주 아저씨는 얼마나 답답하고 애가 탔을까. 나와 동주 아저씨가 현실과 소설 속 인물이라는 차이는 제껴 두고 말이지.

 

뒤엉켜 버린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동정과 위로를 바라지 않았다. 헛된 꿈을 좇아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향을 떠났고 돌아갈 수 없었다. 수년 동안 갇혀 살았지만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젊고 아름다웠다.” (98)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손금을 읽듯 빤히 읽히는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쓰엉. 바다 건너 근본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 했다. 그 모험이, 늙고 야윈 할머니께 평생 만질 수 없었던 것을, 깨끗하고 아늑한 집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선택이라고 믿었건만. 그리하여 언제까지라도 할머니의 자랑이자 이웃들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이고 싶었건만.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뒤엉켜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가 어느 곳을 향해 달려갈지 짐작할 수 없었다.” (140)

 

그녀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순응하며 살려면 고향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대신 가난하고 비루하지만 안전한 삶을 선택했어야 했다.” (239)

 

쓰엉은 젊고 활기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를 꿈꿨다. 산골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동경했던 게 죄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가난하다고 해서 고향을 떠나는 것은 위험하고 배은망덕한 일이라고 화를 내던 쓰엉 할아버지의 말씀이 무거운 납덩이처럼 내 마음속을 내리누른다. 할아버지는 쓰엉 앞에 닥칠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단 말인가. 쓰엉은 정녕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인가.

 

쓰엉은 꾸억의 손을 뿌리쳤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또다시 꾸억을 외면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도 외딴집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239~240)

 

오토바이를 장만하고, 날마다 품을 팔러 바깥을 다니면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쓰엉.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그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건 무엇이었을까. 도시의 삶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해 준 외딴집과 그 주인들이었을까. 아니면 베트남이나 산골 마을이나 벼랑 끝이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일까.

 

이방인이방인을 만났을 때

 

날이 저물면 어둠과 침묵에 싸이는 마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명명되지 않은 채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존재였다. 쓰엉은 부피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212)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두운 밤이다. 벌레 숨소리라도 들릴 듯한 조용한 마을이 유독 낯설게 느껴진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딱 저 글처럼, 우리 집이 마을과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령의 하얀집처럼 외딴집이 아님에도.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과 함께.

산골 마을에 살면서 버스를 타거나 읍내에 나갔을 때 더러 외국 여자들을 볼 때가 있다. 안 그러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다. 어디서 왔을까, 몇 살일까, 잘 살고 있을까, 이것저것 혼자 마음속으로만 물어볼 때가 많았다. 이 책을 보고 나니 그동안 내가 본 사람들 가운데, 아니 한국으로 건너온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쓰엉처럼 모질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고,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겁이 난다. 어딘가에 분명 있는 삶일 것만 같아서. 어쩌면 쓰엉보다 더 지독한 모습일 수도 있을 듯하고.

 

쓰엉과 이령은 가일리라는 한 산골 마을에서 비슷한 이방인처지로 만났다. 서로 다른 까닭으로 그곳에 왔고, 그곳에 사는 것이 힘겨웠던 두 여자. ‘이방인이라는 공통분모가 둘을 엮어 주었고, 낯선 땅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주었는데……. 마을은, 아니 세상은 그 둘을 갈라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참하게 짓밟았다. 한 사람은 목숨을 잃고 또 한 사람은 남편의 죄를 덧없이 뒤집어쓰게 하는 것으로.

이방인은 다른 나라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도 한국 사람인 이령마저 이방인으로 그려낸 소설, 쓰엉. 이 글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아팠던 건, 나 또한 산골마을에서 외지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외지것이 어쩌구~’ 하는 소리 안 듣고 싶어서 보이지 않게 발버둥친 시간들이 자꾸 생각나서일 거다. 나름 무난하게 귀촌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내 생각뿐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살기는 한다만)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데, 쓰엉과 비슷한 처지로 한국에 온 많은 여자들은 이 소설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지 너무나 궁금하다. 그 가운데 누구라도,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왔구나, 참 행복하다면서 환하게 웃어 준다면 이 불편한 마음이 좀 가라앉을 것도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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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하차피의 달 - 2010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2011 이주홍문학상 수상도서 테하차피의 달
조갑상 지음 / 산지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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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에는 이집 저집 할머니들이나 어머니들이 모여서 정구지든 묵은 김치든 그런 걸로 부침개 부쳐 먹으며 궁금한 입을 달랬잖아요. 궁금한 입이 뭐겠어요. 주전부리도 주전부리지만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얘기, 가슴에 막힌 이야길 한다는 거지. 누구 이야기든, 무슨 이야기든, 또 지어낸 얘기처럼 에둘러 한들 어때요. 제 나름으로 하고 싶은 말,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75)

 

입이 궁금한 게 아니라, 마음이 궁금해서 자꾸 소설책을 펼쳐드는 요즈음. 남들의 가슴속에 묻어둔,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고자 이 소설 저 소설 자꾸 기웃거린다. 그렇게 나는 소설을 보며 이 아닌 마음을 달랜다. 인적 드문 산골마을에 살다 보니, 누군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텔레비전도 없이 살다 보니, 그런 시간이 더 많아진다. 글로라도 다른 사람의 삶을 만나고 그네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 소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마음 하나 어떻게 먹느냐가 사는 것 그 자체가 아니냐, 그런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소.” (90)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산 자가 맞설 수 없다.” (101)

 

그렇지, 그래. 내 마음은 내가 씻고 지우지. 지워 오기도 했을 거고.” (130)

 

살면서 숙제야 언제나 있는 거 아닙니까. 견해의 차이도 있을 수 있는 거고. 그냥 둘 건 둬야지 억지로 봉합해서야 되겠습니까.” (132)

 

조금 낯선 제목을 가진 소설 <테하차피의 달>.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담담한 이야기들은 잔잔하고도 시릿하게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삶의 허무를 견뎌보고자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든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죽고, 친척 보증을 잘못 서서 가정이 파탄 나고, 젊은 시절 사랑하던 여자의 죽음을 우연히 알게 되고, 팔순 넘은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는 식구들 이야기까지…….

 

한두 이야기를 빼고는 범상한 소재와 줄거리들이 이어진다. 빨갱이라는 누명 아닌 누명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을 지우려는 어느 형제들의 제사 풍경과 식민지 시절 부산에서 벌어진 조선 여자 살인사건을 다룬 글조차 평범한 삶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다, 그네들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삶과 죽음에.

 

삶이 소설을 모방하는지 아니면 소설이 삶을 모방하는지는 여전히 이론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갑상은 삶이 어떤 정형의 플롯으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선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플롯을 위반하기 일쑤이고, 또한 우리들의 삶에는 그다지 의미 있는 기복이 있다기보다는 인간 개개인이 곱씹어가면서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 같은 문제가 반복해서 제기되는 것일 뿐이라는 전언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 그러니 그의 소설에 어떤 파격적인 결말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떤 대안이나 답이 제시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250~251)

 

삶의 매 순간에서 그 자체의 행위와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삶은 반추를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런 회상 행위를 통해서만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아의 현재로 편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 과거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종의 수하물 같은 것으로, 현재 삶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53)

 

소설이 끝나고 작품해설을 본다. 소스라치게 깨닫는다. 내가 왜 자꾸만 소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는지, <테하차피의 달>을 읽는 동안 내 마음에 아스라하게 피어오른 그 감정의 조각들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아직이미사이에 놓여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것이 가상임에도, 내 지나온 삶과 다가올 삶을 찬찬히 곱씹게 만들었다. 때론 수도 없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던 수수께끼 같던 내 지난 과거의 이야기들마저도 이 소설은 그건 너한테만 닥친 문제가 아니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파격적인 소재나 결말도 없고 어떤 대안이나 답도 내밀어 주지 않는 이 소설을 보면서 그렇게나 위안을 얻었나 보다.

 

비록 절대적인 고립자라는 유한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런 인생 자체가 생판 남인 사람들에게 감각되고 이해되고 결국은 공유될 수 있는 바탕이 있음으로 해서 개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255)

 

그런 세상에 소설마저도 없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상처를 치유할 것인가라는, 자의식적인 질문이 그의 소설에는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소설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절실함을 담고 있는 우리 일상의 곤혹스러움의 정체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256)

 

김경수 문학평론가의 작품해설 말미를 읽다가는 하나를 위로해 주는 것을 넘어 소설이 우리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까닭을 느끼고야 만다. 소설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로 건넴으로써 그것과 만나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때론 따뜻한 입김이 묻어나는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말보다 더 애틋하고 포근하게.

 

나 대신 울고

나 대신 아파하고

나 대신 힘을 내는

소설 속 사람들 덕에,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을

글로, 이야기로 만들어 준 작가 덕에

 

나는 오늘

울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운다.

그러면서 마음속

상처가

후회가

미움이

아픔이

미련이

 

조금씩 옅어진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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