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산지니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르게 사는 사람들-우리 사회의 소수자들 이야기>(윤수종 엮음, 이학사, 2002)라는 책이 있다. 이 책 맨 앞에 트렌스젠더 여성 소설가 김비가 쓴 글이 나온다. 제목은 작은 외침.’ 내겐 무척 낯선 이야기였지만 참 아픈 글이었다. 이 글을 쓴 뒤로, 김비 씨가 잘 지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했다. 그러다 이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이 나온 걸 알았다. 소설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김비에 대한 어설픈 관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이 이야기는 그런 비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책 맨 뒤에 나오는 작가의 말.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이런 생각으로 소설을 썼을 것 같다는 생각.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므로.

 

비상계단에 갇힌 남수네 식구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은 내겐 좀 낯설었다. 그네들의 삶이 낯설다기보다는 올라도 올라도, 내려가도 내려가도 출구가 없는 공간이라는 설정이 그랬다.

 

나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주 불안하고 두려운데. 비관에 빠져 희망을 꿈꾸지 못할 때가 여전히 많은데……. 진짜로 출구가 없는, 그런 처절한 삶을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걸까. 꽉 막힌 곳에 갇힌 사람들이 아등바등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이야기에 공감이 잘 가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 사람들은 잘못이 하나도 없음에도. 오히려 억울하게 갇혀 있는 상황인데도.

 

갇힌 이들 모두가, 아니면 일부라도 비상계단을 탈출하는 마무리가 나올 줄 알았다. 아니, 기대했다. 그런데 소설은 마지막까지 출구 없는 계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 안에 그대로 남는다. 몇몇은 을 예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 밖을 알 수 없는 둥근 구멍으로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내가 아직 덜 힘들게 살았나 보다. 그리고 힘든 사람들 이야기를 덜 만났나 보다. 출구 없는 삶에서 희망까지 갖지는 못해도, 살아 보겠다고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들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 걸 보니. 이 책을 보면서 김비의 삶에 조금 더 다가서고 싶었는데 아직은 자격미달인 듯.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 태어나 서른 살 나이에 여자로서 다시 태어난 김비 당신을 마음 깊이 응원하노라고,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노라고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의 다음 작품도 꼭 읽어 보겠다는 다짐도. 그땐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해져 있기를 바라며.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

 

후련한 절망.’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도 없이 오고 갔을 작가의 삶이 그려냈을 저 글귀.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말만큼은 꼭 기억해 두고 싶다. 절망에 허덕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지쳐 버린 어느 순간, 그 절망을 후련하게 내려놓을 용기를 내고 싶어질 때, 이 말을 떠올리리라. 그런 순간이 오면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쳐 봐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