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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자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병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6년 8월
평점 :
1972년 하버드는 버트 휠도블러를 교수로 초빙하였고 그는 그 초빙을 수락하였다. 에드먼드 윌슨과의 본격적인 개미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89년 고국 독일의 바바리아의 부르츠부르 대학에서 사회성 곤충을 연구하기 위한 특별과를 창설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는 하버드를 떠나는 문제를 두고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자 우리는 개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담은 책을 하나 쓰기로 하였다.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 스스로 의문을 던졌다. 어째서 역사상 그 누구도 개미에 관한 책을 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규모의 일이라면 굉장한 노력과 시간이 들겠지. 그러나 이 얼마나 한번 해볼만 한 일인가! 체구가 작은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이 한 때 비범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말한 것처럼 바로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것 말이야. 결국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90년 하버드 출판부에서 나온 <개미들>이었다. 2단 조판을 하여 732쪽 에 이르는 이 책에는 수 백개의 그림과 천연색 도판, 그리고 삼천개의 문헌 소개가 들어 있다. 이 책의 무게는 대작에 대한 나의 기준을 채우고 남을 만큼 7.5파운드나 나갔으며 3층 높이의 건물에서 떨어뜨리면 사람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305~306p)
일반인인 우리들에게는 낯설지만 세계지성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에드먼드 윌슨의 <개미들>의 탄생배경은 이렇다. 1991년 과학책으로는 다섯번째로 플리처상을 받았고 윌슨과 휠도블러에게계 최고의 개미연구의 권위자란 난공불락의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에드먼드 윌슨, 개미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그리고 환경운동가라고 그를 정의하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엄청나게 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진화생물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지적통합자 에드먼드 윌슨은 1929년 미국 앨라배마주 버킹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부모는 심한 불화를 겪고 있었고 그 결과 그는 잠시 위탁가정에 맡겨져 있었다. 결코 유복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그의 유년시절이 그의 미래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불행한 가정에 대한 은신처는 자연이었고 바다였다. 그리고 그가 어떤 종류의 자연연구가가 될것인가에 대해 결정지은 것도 그의 유년시절이었다. 어느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 해변에서 피라미로 미끼를 써서 낚시를 하다가 핀피시를 낚아올렸다. 핀피시는 등지느러미를 따라 곧바르게 서는 10개의 바늘과 같은 가시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핀피시를 낚다가 그의 얼굴을 덮혀 그의 오른 쪽 눈 동공을 찔렀다. 그 사건으로 그는 오른쪽 눈 시력을 잃었으며 성장하면서 고주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력까지 문제가 생기자 시력과 청력이 나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자연연구가의 길은 곤충밖에 없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내내 주변에 살고 있는 생물과 곤충에 빠져들었고 학교 성적은 낙제하지 않을 정도로 유지하였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의 성적은 터무니 없이 모자랐다. 후에 자연연구를 계속 하기 위하여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학교 공부에 매진하였지만 그가 처음 지망한 명문사립대인 밴터빌트대학교의 장학생이 될 수는 없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모든 고등학생에게 개방된 앨러배마 대학이었다. 그는 앨러버마 대학에서 관찰만 했던 청소년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깊은 자연탐색은 계속 되었고 놀라운 성과(논문)을 계속해서 내었다. 그의 놀라운 자연 탐색과 결과물(논문)은 윌리엄 브라운의 도움으로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하버드의 재정적 도움으로 그는 좀 더 넓은 세계(열대지방같은)로의 탐사가 시작되었고 생물학의 기초와 사유 그리고 통합을 이루며 그의 학문적 성취도 인정되어 젊은 나이(29세)에 그는 하버드 교수의 자리까지 거머쥐게 된다. 하버드 교수 시절, 그의 자연적 관찰과 생물학적 통합은 계속 되었는데,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왓슨의 분자생물학에 의해 그의 집단 생물학은 후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왓슨과의 불편한 관계속에서, 타고난 종합가인 그는 하나의 통일적 이론을 완성하게 되는데(311p), 오랜 동안 지속된 그의 자연 탐사와 관찰 그리고 이론적 통합이 이루어 낸 책이 사회생물학이었다. 사회생물학은 인간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근거를 토대로 자연의 모든 생물 심지어 인간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에 그는 논쟁과 공격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회생물학은 자칫 우생학의 빌미를 마련해 나치와 같은 인종차별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급진적인 진보세력과 좌파 지식인들(예를 들어 스티븐 제이 굴드와 특히나 르윈틴)의 공격을 받을 정도로 그의 사회생물학은 70년대를 뒤흔든 과학책이 되었다.
이 책은 한 명의 자연연구가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정치적이든 대중적이든 오프한 채, 한 눈 팔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길을 천천히 독자들에게 안내하는 회고담이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 스며든 진솔함과 솔직함은 독자인 나에게 마음이 움직이다라는 감동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할 정도로 울림이 컸는데, 그의 깊은 사유의 문장이 젠체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불행한 어린시절, 자연연구라는 안식처에서 시작된 그가 진화생물학이라는 자연 탐험가의 마지막 은신처(206p)에 이륙하기까지 이룩한 학문적 이론과 그 이론을 위해 수모와 논쟁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은 돌탑처럼 투박했으며 묵직하다. 그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인생에 성공하기 위하여 과학을 하는 사람과 과학을 하기 위해 성공적인 인생을 이끄는 사람이다. 윌슨은 후자에 속하는데, 소년 시절의 꿈이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거대한 학문적 물줄기를 지켜보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의 단순하면서도 사려 깊은 글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의 글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나 사물의 통찰력은 그의 자서전 곳곳에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야망과 불안으로 가득찼었고 강한 사회적 양심을 소유하지 못했다. 20년 후 구시대적인 남부는 끝났다. 인종차별을 깨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시민운동가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즉 오직 한 마음으로 도덕률에 진실하고 육체적으로 용감하며 인내하는 영웅이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인해 내가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이러한 면에서 충분히 새롭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앨라매바를 떠났다.세상은 변했다 나도 변했다. 그러나 내가 소년 시절이나 쳥년 시절에 진보적 성향의 자유주의가였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어떤 선견지명이나 용기를 가졌던 사람도 분명히 아니다. 어쨌든 나를 과학으로 이끈 인생 궤도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연연구가의 길을 딸 이런 상활을 그래도 지나쳤으며, 이제 와서 자존심 강하고 고통받은 문화에 대해 겉만 번지르르한 사화의 말을 전할 만큼 오만하거나 위선적이고 싶지는 않다.
에드먼드 윌슨의 대한 나의 우연한 스침은 장대익 교수가 에드먼드 윌슨과의 인터뷰을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622004959&Section=04 그 땐 에드먼드 윌슨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거의 없어 그의 작품을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리처드 도킨스의 글을 읽고 있으면서, 그와 이론적 궤를 같이하는 에드먼드 윌슨의 글은 좀 더 쉬울까 싶어서 찾아 읽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모두 다 기본적으로 과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이론을 내 세우지만, 도킨스의 글이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딱딱한(도킨스의 글이 너무 어렵고 딱딱해 어떨 땐 그는 코미디프로를 보고 웃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데 반해, 윌슨의 글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이고 따스함이 풍겨 휠씬 더 접근이 용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이론을 이해하냐면.....큭, 전혀 아니다. 둘다 어렵긴 매 한가지다.
하지만 난 그들이 과학의 실제적인 접근법을 이용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추론하고 검증하고 이론을 도출시키는 것이 철학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맘에 든다. 이런 일류 지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좌절하는 것이 있다면, 나의 지식망에 대한 헐거움일 것이다. 그들의 지식망은 너무나 탄탄하고 빽빽하고 촘촘해서 그들의 지식세계와 이론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오기로 그들에게 질질 끌려다녀도 얻은 것은 한 줌의 용어와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의 동사뿐. 그들의 전체적인 이론은 머리 속에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의 지적 세계에 앨리스처럼 뛰어들어가 모험하고 싶다. 언젠가는 나의 헐거운 지식망이 테두리에서부터 짜여져 가운데까지 촘촘하게 짤 수 있다면, 그들의 이론을 전체적으로 현미경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싶어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적 모험심이 지식망의 올을 끊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