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지배적인 이론에 대해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대안 이론은 언제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수 십년 아니 수백년을 지배한 이론(예로 천동설 같은)이 굴러 오는 새 이론(예로 지동설)의 과학적인 증명을 통해 굴복함으로써 인류 역사는 거듭 비약적인 발전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이론에 대한 의심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떠한 지배적인 이론에 대한 의심은 문제를 제기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지배 이론을 낳았고, 그러한 사이클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시대에 지배적인 환경이데올로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지구 온난화는 우리가 지구를 오염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지구 역사의 사이클상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의 따뜻한 온난화는 적어도 백만 년 전부터 1,500여년(+-500년) 주기를 가지고 나타나는 자연적 기후 변동 현상의 한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p11).

두 저자는  그 예로 1984년 덴마크의 윌리 단스고르와 스위스의 한스 외슈거가 그린란드에서 처음으로 채취한 빙하 코어에서 나온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한 발표 - 이 25,000여년 동안의 지구 기후 역사는 뚜렷한 주기를 가지고 기후가 변해왔다는 것이다- 와 역사적 지역적 문헌을 통한 기후 사이클를 예로 들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1,500여년의 주기에 해당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우리 지구가 더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온난화 덕에 우리는 질병에 걸린 위험이 줄어들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 150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드는 교토의정서를 파기하면 제 3세계 국가에게 보건, 교육, 수자원, 위생시설을 공급할 수 있고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은 더욱 더 편리해지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대신 화학비료를 쓴 덕에 우리는 더 많은 식량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이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산업화 덕에 우리의 삶은 윤택해졌고 식량 걱정 없으며 테크롤노지적 삶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편리한 삶을 포기할 만한 용기도 가지도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쩡쩡한 환경보호주의자들에게는 이들의 말은 솔깃한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온난화가 1500여년 주기론의 한 부분일지라고 환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환경주의자들을 보조금이나 더 타내려고, 온난화를 뻥튀기 했다고 애쓰는 부류들로 분류하는 저자들의 시각엔 심한 반발을 일으킨다. 너무 근시안적이고 환경오염에 대해 낙관적이며 우파적 탐욕이 그래도 여과되지 않고 드러난 주장이다. 

저자들의 이론대로 지금의 온난화가 1500년 주기설이라고 치자. 지구가 탄생한 이후 18세기 전까지 지구의 환경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어떠한 변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올 초에 읽은 18세기에 최초로 미국 땅 원정에 올랐던 루이스와 클락의 <불굴의 용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수 천년동안 변하지 않은 땅을 처음으로 밟고 간다고 한 대목이었다. 그 때 그 문장 읽으면서 든 생각이 아, 우리 인류가 이렇게 세계를 누비고 지형을 바꾸고 한 것이 일세기도 되지 않았구나, 였다. 사실 우리가 지구를 성형하기 시작한 것이 일세기 조금 넘어서이다. 산업화의 시작으로 지구와 인류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오염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지구 수십억의 역사상 오염이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은 일세기 남짓이다. 산업화가 가져온 오염이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1500년 주기설을 뒷바침한다 치더라도 지금 지구는 심한 오염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더운 여름에 에어콘을 켜지 않고 살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라는 뉘앙스의 글은 이 책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내주고 있다. 아프리카 여인의 비참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교토의정서를 파기하면 교토의정서를 지키는데 드는 비용 1500억달러를 보조할 수 있다라는 인도주의적 발언에 감흥하기 보다는 그들의 입 발린 립서비스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물론 나는 물리학자도 아니고 기후학자도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맞을 지도 모르는 이론에 너무 반발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설사 그들의 1500년 주기설이 맞다하더라도 지구 환경을 지키자는 환경주의자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고 좀 불편하더라도 화학연료 덜 떼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싶다. 이 책은 미국의 우파가 어떻게 그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인도주의적 운운, 립서비스 해 가며 탐욕스럽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제발 이 이론이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랄 뿐이다. 그들에게 북극 곰에 관한 다큐멘타리 영화나 선물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린 톰슨에 대한 최초 관심은 서남희씨가 열린어린이에 연재한 것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낸  <그림책과 작가이야기>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콜린 톰슨에 대해 짧지만 알찼던 그에 대한 설명과 그림은 그림책 매니아인 나에게 어떤 스파크같은 불꽃이 튀었다. 이 겹겹히 쌓인 그림과 비범한 내용의 그림책을 꼭 구해보리라. 어찌어찌하여 이베이까지 뒤져 그의 그림책을 몇 권 건졌고 , 처음으로 구했던 작품이 바로 위의 <Looking for atlantis>라는 작품이다. 처음 이 작품을 편지함에서 꺼낼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결제를 다 하고 한 십일을 기다리다 받았는데, 그 십일간 책이 혹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 했었다. 구하고 싶은 책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다가 손에 넣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바다에서 모험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소년이 10살이었을 때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임종을 맞이하고 소년에게 아트란티스를 찾아보라며 자신의 체스트(chest)를 유품으로 준다.  

 

소년은 할아버지의 유언에 할아버지의 체스트를 열어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품을 뒤적인다. 그 안에는 금화, 굴비, 다이아몬드 같은 귀중품이 있었지만 색소폰 아래, 천달러 지폐 밑에 문이 하나 있는 것을 소년은 발견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말한 아틀란티스를 찾기 위해 다락방을 뒤지는 소년, 이 장면은 이 그림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이 알 수 없는, 감지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열려있는데. 

 여기저기 찾아보고... 







 

찾다가 못 찾고 실망해 계단아래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

 

낙담해 있는데 할아버지의 앵무새가 다치자 소년은 급히 지하실로 내려가 앵무새를 안고 있는다. 점차 더욱 더 어두워지고 소년은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순간, 소년은 뭔가를 깨닫는다. 

 

집아래 서 있던 그 곳에 태양이 떠 오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여기가 바로 아틀란티스군요.   


작품마다 비슷비슷한 다층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콜린 톰슨의 이 그림책은 1993년 작이다.  여타 다른 그림책 작가들의 친밀함이나 친근감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컬트적인 분위기의 이 그림책은 현재 아마존에서는 절판으로 올라와 있다. 현재의 그림 스타일은 <플러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푸키하면서 유머스럽고 익살스러운 친근한 모습으로 많이 변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가 왜 중년 시절에 그린 진지하면서도 내면적인 그림책을 다시 내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의 그림책이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림책은 아니다. 귀엽고 애교 많은 캐릭터도 익살스럽거나 개그스러운 내용은 없다. 하지만 어찌 세상을 귀엽고 이쁘고 익살스럽게만 볼 수 있을 수 있겠는가.

콜린 톰슨은 집에 집착하는 그림책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소년이 아틀란티스를 찾는장면마다 보여지는 것은 집안의 모습이다. 특히나 다락방에서 아틀란티스를 찾는 장면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환상적이면서도 몽롱한. 그가 집을 집중적으로 그리는 이유는 뭘까? 그는 "집에는 끝없는 변화와 가능성이 열려 있고 ....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할수 있으니깐요(그림책과 작가이야기,p197)"라고 답한다.  

몇년전에 받아 보았을 때는 그저 멋진 그림에 감탄한 정도였는데, 요즘 다시 꺼내 읽으면서 다층적인 그림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다층적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만 둔 작가에게 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분신일까? 아니면 주변의 사내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내면적인 고통을 아틀란티스에 비유한 것일까?  

소년의 아틀란티스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이 그림책이 소년의 성장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긴 했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과정,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 그가 성숙하고 완성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곳.  내가 누구인지 내가 설 곳이 어디인지 몰라 방황하고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그런 사춘기의 한 과정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린아이가 볼만한 책에 가깝다기 보다는 청소년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들에게 알맞은 책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정체성 확립은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고 지나야 하는 과정이다. 다른 세계로(성인) 편입되어야 하는 통로이기도 하고. 아틀란티스는 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내면화한 비유적 세계가 아닐까 싶다.     

사내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푸념일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갈수록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아이가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조금씩 조금씩 변해간다. 우리 성장할 때와 달라서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빠르다. 부모의 말에 되받아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순간적으로 반항적인 눈빛을 쏘대기도 한다. 아, 처음 애가 반항적인 눈빛을 보여줄 땐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무시하고 넘어가야지 했던 사항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래, 네가 감히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봐. 한바탕 해볼테면 해보자라는 오기까지 발동했다. 아이와 한바탕 큰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도 있었다. 우리 아이 나이 또래에 나나 남동생이나 엄마를 그런 식으로 몰아부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를 그 어린 나이에도 연민의 눈으로 보았다. 월급도 제대로 갖다 주지 않은 아빠때문에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우리를 키운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기에. 반항은 커녕 절대적인 순종으로 그나마 맘 고생이 심한 엄마의 부침을 덜어주고 싶었다. 학교 다니면서 엄마에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이 아침에 준비물 사야된다고 돈 달라고 해야할 때였으니 어린 나이에도 세상 물정 어느 정도는 알았던 셈. 하긴 뭐 우리 세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 아니었는지.  물질적 풍요가  한 아이의 성장에 가능한 인자일지 모르지만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도 한 아이의 고통적인 성장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준비와  더 넓은 세상을 껴안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세상의 모든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아틀란티스를 꼭 찾기를. 세상 사는 게 뭐 그리 호락호락한 게 있겠니. 세상살이는 다 네 몫어치다.  

덧: 요즘 같아서는 능구렁이 10마리 데리고 사는 게 더 낫다 싶다. 도대체 말도 잘 안하고 입만 뽀루퉁하게 나와서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맘대로 질문하고 내 맘대로 답하고.. 

1. 당신은 몇년 차 하루키빠인가?  

한 18년차인 것 같다. 대학 초년 시절에 <상실의 시대>를 읽고 그를 처음 알았는데 지금 내 나이 마흔이니깐 20년이 채 못 되는 거 같다. 그 땐 읽을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국문학을 많이 읽었던 때인데, 그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일본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우리 문학하고는 다른 신선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상실의 시대>가 히트치는 덕분에 그의 초기작들이 우리 나라에 거진 다 발간되었고, 그의 초기작이 나오는 족족 다 사다 읽을 정도로. 최신작은 물론이고.

2. 그는 당신에게 어떤 작가인가? 

최초의 전작작가이다. 그의 <상실의 시대>는 우리 세대의 있어서 폭풍같은 작품이었다. 그의 글쓰기는 쉬운 듯 가벼우면서 진지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가벼운과 무거움이라는 추가 균형있게 자리 잡고 있는 듯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일단 그의 작품은 어렵지 않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서 그런지  출간 되면 즉시 구입해 읽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책장을 보니 책장 한 자리를 하루키의 책이 다 차지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책을 읽고 살아온 날이 꽤 되었지만 어떤 작가들은 처음엔 좋았다가 몇 작품 읽고 나가 떨어졌는데, 하루키만큼 20여년 동안 전작을 구비할 만큼 어필한 작가이고, 20여년 동안 관심을 갖고 있는 진행형의 작가는 하루키가 처음이다.  

3. 하루키의 작품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사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해변의 카프카>이다. 그리고 단편중에선 <렉싱턴의 유령>에 실렸던 <침묵>이란 작품이다. <침묵>에 등장한 오사와라는 인물이 혹시 하루키의 분신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짧지만 강렬한 캐릭터 묘사에 놀랐던 작품이다. 더불어 가장 실망한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어둠의 저편>이리라~~  

4. 그의 책에서 풍기는 느낌이나 인상은?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재즈 느낌이 날 때가 있다. 경쾌한 느낌이 날 때도 있지만 한 낮에 내리쬐는 끈적한 나른함이라든가 나른한 오후의 한 줄기 시원한 바람같은. 담배연기 퍼지는 몽롱하면서 즐겁게 웃는 듯한.

5. 하루키가 듣는 음악을 좋아하는가? 

그의 작품 속에 녹아 든 재즈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재즈는 그렇게 와 닿지 않는 음악쟝르이다. 그냥 그의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재즈 분위기가 좋을 뿐이다. 단지 <상실의 시대 또는 노르웨이 숲>에서 틀어 준 존 레논의 <노르웨이 숲>은 존 레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다. 80년대 초반에 음악을 들은 사람들에게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의 퍼포먼스가 강한 뮤지션이었지, 음악성이 뛰어난 뮤지션은 아니었다. 그의 <이매진>이라는 곡도 사실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서서히 명곡으로 자리 잡은 곡이다. 그 때 그의 대표작은 <이매진> 한곡이었다.  비틀즈는 폴 메카트니의 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카트니의 진취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음악성, 레코딩 기법등등  존 레논의 자리는 크지 않았는데, 하루키를 통해 처음 비틀즈 시대의 존 레논을 알게 되었다.  

6. 그의 에세이가 좋은가 ,소설이 좋은가? 

물론 그의 소설이다. 그의 글은 에세이든 소설이든 어느 분야에도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라는 음악에세이에서 그가 락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미국소설가 레이몬드 카바와 비교해가면서 쓴 에세이를 보더라도, 그는 남다른 시각과 접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난 브루스에 대한 쓴 글을 몇 편 읽었지만 그런 식으로 멋지게 쓴 작가는 처음이었다. 하루키옹, 나이를 괜시리 먹은 게 아니구려~~~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농축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캐릭터가 제 자리를 잡아 이야기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루키의 캐릭터만큼 이야기를 멋지게 이끌어가는 인물들도 없다. 캐릭터가 풀어헤친 이야기를 따라 가며 읽는 재미, 그건 에세이만큼 강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7. 하루키의 최신작 1Q84에 대한 기대는? 

기대 된다! 기대 된다! 하늘에 솟아오르는 로켓만큼이나~ 

하루키의 이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내가 11살 무렵 바카라의 <아이캔 부기>에 빠져 음악을 듣기 시작해 그 문화적 영역이 책과 영화까지 확대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대중문화든 순수 문화든 간에 지난 30여년 동안 그 문화적 수명을 다 하며 거장이나 거물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우리 시대의 거장을 들라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정도. 이 십년전만 해도 그도 더티하리 시리즈로 유명세를 날렸지만 그냥 스타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를 감독해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더니 상업적 헐리우드에서 점차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내며 20여년 사이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오홋, 놀라워라~~ 사실 이스트우드같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며 멋진 작품을 내는 그런 인물 거의 없다.

동시대를 살면서 내가 젊었을 때 좋아했거나 주목했던 작가, 감독 또는 뮤지션이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행복하다. 잠시 반짝하고 스쳐 지나가는 문화적 인물들이 세고 센  대중문화 영역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재능을 끊임없이 펼치는 작가(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인물들도)를 수 십년 동안 바라보며 그의 신작에 흥분하고 셀레고 기대한다는 것은 그가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아닐까.  

그의 저력이 이번 신작에 아낌없이 펼쳐 졌다고 믿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나리님이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룻거 하우어 이야기 해 갑자기 생각나 올리는 글인데, 혹시 윌리엄 프리드킨의 <광란자>라는 영화와 룻거 하우어의 <히쳐>라는 영화를 아세요? 지금으로부터 한 20년도 넘은 영화니깐 마흔 넘으신 분들은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다 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제가 이 두 영화 보고 우리 시대의 연기파인 알 파치노와 룻거 아우어의 영화를 잘 찾지 않습니다. <광란자>란 영화가 대강 이런 내용입니다.동성애자만 연쇄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형사인 알 파치노가 범인을 잡기 위해 게이로 위장해서 게이클럽에 들어간다는 내용인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정말이지 묘합니다. 범인을 잡고 사건이 해결되었음에도 알 파치노가 게이클럽에 가서 춤을 추는데, 춤을 추다가 관객을 쳐다보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근데 문제는 알 파치노가 관객을 쳐다보는 그 눈빛을 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더라구요. 알 파치노가 수사를 하면서 자신의 성정체를 찾아 동성애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게이혐오로 자신도 연쇄살인을 저지르려고 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관객을 쳐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리얼 오싹해서, 알 파치노가 나온 다른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장면이 오버랩되어 도저히 그 눈빛의 강렬함이 떨어지질 않더란 말이죠. 알 파치노가 순수한 역을 맡았을 때도 그 눈빛의 망령이 기억에 새록새록 살아난다는.  아직도 알 파치노하면 그의 <대부>가 아닌 저 <광란자>의 그 강렬한 눈빛이 생각날 정도니... 연기를 너무 잘해도 문제죠!

이번엔 룻거 아우어, 아마 <블레이드 러너>를 먼저 보고 룻거 하우어의 연기에 뭉클 감탄해 하며 빌렸던 비디오였을 거예요. 저 <힛쳐>라는 영화를. 이 영화는 한적한 고속도로에서 무임승차하는 히치하이커의 연쇄살인을 다룬 영화인데 룻거 하우어가 히치하이커 연쇄살인범 역을 맡았지요. 이 영화 정말 무서운 장면 하나도 나오지 않는데 심리적으로 굉장히 무서웠던 영화였어요. 특히나 룻거 하우어가 잡혔을 때의 그 눈빛, 공포스러울 정도였거든요. 오죽하면 며칠 동안 잠에서 깨어나면 어둠 속에서 그 눈빛이 생각나  새벽에 화장실 가기가 두려웠다우. 평소 무서움도 많이 타는 사람이 그런 영화를 봤으니....솔직히 이 <히쳐>비하면 <13일의 금요일>이나 <프라이데이 나잇> 같은 영화는 넌 뭐니? 니가 공포영화니? 라고 묻고 싶을 정도라니깐요. 니네들, 히쳐나 봤니? 좀 보고 벤치마킹이나 해라... 뭐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보통의 연기력 같고는 관객이 이런 느낌을 받지도 않을 거예요. 도대체 두 연기자 모두 얼마나 캐릭터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철저했으면 관객이 그런 느낌을 들게할까요? 드니로도 눈빛 연기 잘하지만 저 두 사람만큼 못 했던 거 같아요. 물론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라 다른 분들은 그랬었나하고 의문을 던지실지도 모르겠네요. 혹 이 두 영화 보실 수 있으면 찾아 보세요. 예전에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 저런 재밌고 알찬 영화 널렸는데, 요즘은 비디오가게 가면 잘 만들어진 b급 영화 보기가 힘들더라구요. 블록버스터 영화만 들여 놓더라구요. 가만 생각하면 블록버스터가 썩 괜찮은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볼 만한 것도 아니라니깐요. 사실 요즘 영화보면 예전의 b급 영화보다 못한 스토리 라인 쎄고 쎘던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번에 드레스님의 <나의 로맨틱가이드>라는 영화리뷰 읽고 <전 로맨틱 쟝르하곤 거리가 멀어요. 왜케 저 남자주인공 느끼하죠! 라는 덧글을 단 적이 있다>. 그땐 정말 내가 로맨틱 쟝르는 소설이건 영화건간에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어글리 투루스>라는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아니다, 나도 한때 로맨틱영화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큭, 뭐 이 건조한 성격에 열광까지라는 말은 좀 과장이고, 영화보기를 한창 즐겼던 시절, 그러니깐 20대 시절 골디혼과 맥 라이언이 나오는 영화(혹은 비디오라도)라면 묻지마, 아무 것도 묻지마! 스탈로 무조건 영화관으로 냅다 달려가거나 빌려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홋, 나의 골디 혼 

처음 골디 혼 영화를 접했던 것은 바로 요,요--------->영화, 멜 깁슨과 함께 나왔던 로맨스 짬뽕 액션 영화 <전선 위의 참새>, 죽은 줄 알았던 옛 애인인 멜 깁슨과 우연히 만나 한바탕 대 소동을 치룬다는 내용의 영화인데,  마피아인가 뭔가 하여튼 죄질이 나쁜 범죄자에 대한 증언을 하고 그 보복이 두려워 신분위장을 하면 피해사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는 멜 깁슨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그녀가 보여 준 연기, 파란 동그란 두 눈을 뜨며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는 멜 깁슨이 진짜 자신의 전 애인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 특유의 슬랩스틱한 연기. 어찌나 그 과정스러운 표정연기가 압권인지, 영화 내용은 기억나진 않지만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만큼 골디 혼의 매력이 듬뿍 들어있는 영화도 없을 것이다. 금발의 맹하면서도 못된(좋은 말로 도도한) 부잣집 마님인 골디 혼이 저 커트 러셀과 처음 대면했을 때 오죽 커트 러셀을 기분 상하게 했으면 골디 혼이 기억 상실증에 걸려 그의 집에 왔을 때 그녀의 집을 찾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부려먹을 생각을 했을까. 그녀와 그가 한 집에 동거하며 그의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동안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아이들에게는 모성애를 보여주며 결국에는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영화. 이 영화에서 그녀는 맹하면서 순진한, 그녀의 낙천적인 모습을 다 보여주었다. 보는 내내 그녀의 건방은 불쾌함보다 순간적인 유쾌함을 유발하고 그녀의 텅빈 듯한 맹함은 가슴이 따스해지는 그 무엇이 있다. 한마디로 요즘 유행하는 칙릿 소설같으면서도 골디 혼이 아니면 절대로 이 정도의 품격이 나오질 않는 영화. 게리 마샬의 <귀여운 여인>을 언급할 때 나에게 귀여운 여인은 줄리아 로버츠가 아니고 골디 혼!  

아, 이 영화도  생각난다, 생각나! 환상의 커플 보고 골디 혼 영화라면 무조건 오키! 하던 때에 나왔던 시간 떼우기용 영화. 밀고 당기며 헐리웃 공식 해피 앤딩 그대로 따라한 영화지만 이 영화도 또한 골디혼의 무한 매력을 볼 수 있는 영화! 사실 골디 혼의 영화는 이야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녀 보는 맛에 본다. 그녀의 생뚱 맞은 둥그런 눈, 그녀의 속살포 같이 빠른 말, 뭔가 생각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짓는 맹한 표정. 비관과는 거리가 먼 낙천적인 성격. 이런 모습 없으면 골디 혼의 영화는 영화라는 태그가 붙여질 수 없다. 이 영화 내용은 완전히 기억나지 않지만, 세트가 무지 이뻤던 영화! 

   

 

이 영화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둘 다 나온다. 하지만 저메스키가 아무리 뛰어난 감독일지라도 골디 혼의 매력을 살리지 못한 영화라고 밖에..골디 혼은 옵션같은 느낌의 배우였다. 이 영화 보면서 골디 혼은 작은 영화에 어울리는 배우가 아닐까생각 좀 들었더랬다. 하지만 전선위의 참새는 ? 결국 감독 중에선 배우의 성향을 잘 파악하는 감독과 그렇지 못하는 감독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골디 혼의 매력이 전혀 없잖아. 세간에 머리 텅빈 금발배우라는 이미지 박힐까 겁났던 영화였다. 어찌하였든. 브루스도 그렇고 그 걸출난 배우들이 다들 따로 노는 느낌이었던 영화!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였지만 끝내 구해보지 못했던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명성이 확고하게 다지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젊은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녀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하다.

 

 

 

 

2000년 이후, 그녀가 나온 영화를 챙겨보지 못 했다. 애 키우면서 영화 보는 것이 무서웠던 시절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와일드 클럽>이나 <에브리원세즈아이러브> 같은 영화는 비디오로 빌려 왔지만 잠시도 시간이 나지 않아 보지도 못한 채 갔다 주기도 했다. 어찌하다가 요즘 최근에 그녀의 데뷔작 <선인장꽃>을 토토에서 다운(토토에서 골디 혼이라고 쳐야 나온다. 선인장꽃하면 불건전한 용어라고 검색이 안된다나 뭐라나)  받았다. 그녀의 청초하고 이쁜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저 때도 저랬구나 싶었다. 이쁜 그녀! 지금도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인걸!   













 





하하핫, 무섭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