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개척한 인문학자 고미숙씨의 최근 신간으로 고미숙씨를 초빙하여 공부모임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다(하지만 나는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ㅠ)
 
저자는 자신의 몸이 크게 아프개 되면서 자신의 관심을 병과 몸으로 돌렸다고 한다. 그녀가 40대 초반이던 어느 날 그녀의 몸 속에는 생활하기 불편할 정도로 종양이 자라났다. 국내 최고의 종합병원에 같더니 온갖 검사를 마친 후에 의사가 하는 말이 "수술해야 잘라내새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수술도 하기 싫었고  수술 후에 입원실에 오랫동안 누워있어야 한다는게 싫어 수술을 포기했다. 그후 그녀는 등산을 하고 요가를 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병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한다. "그동안 그만큼 나는 무지했고 또 게을렀다. 그러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대충 살 만했기 때문이다. 계급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웬만큼 살 만한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고 볼 기회를 놓인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보게'된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선배가 한 명 있다. 그분은 천성이 척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2000년대 초부터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풀리지가 않았다. 사업을 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망으로 꾸준하고 책을 읽고 클래식을 감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애주가였다. 사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의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자리가 있었고 나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간에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고 의사로부터 여러번 경고도 받았다. 하지만 술을 매개로 한 생활, 업무 스트레스는 줄어들지 않았고 급기야 간에 작은 종양이 나타났고 한 차례 수술했다. 수술 후에 술의 양을 줄이기는 했지만 횟수는 줄지않았고 급기야 조금 시간이 지나자 횟수마저 과거로 돌아갔다. 또 다시 병원을 찾은 선배는 종양이 재발했고 조금 더 심각해진다 것을 알았다. 의사와 주변의 권유에 따라 간의 대부분을 잘라내고 다른 이의 간을 이식하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대수술 후 아직까지 큰 후유증은 없었으나 선배의 생활을 철저하게 '환자'로 관리된다. 매일 먹는 약과 면역억제제에서부터 먹거리, 행동반경에 이르기까지... 면역억제제는 평생 먹어야 한다.
 
고미숙씨와 나의 선배...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갑작스러운 종양의 발견으로 인생의 기로에 섰으나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하였고 지금은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 한 사람은 '앎의 주체'에서 '자기 삶의 치유자'로, 다른 한 사람은 남은 인생을 '환자'의 삶으로...
물론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반드시 몸이 아프냐, 그렇지 아니냐를 기준으로 하여 극단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건강 말고도 직업, 비전, 가치, 그리고 가족, 사람관계 등 삶의 질을 가르는 많은 영역도 있고 누구나 상대방보다 더 나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과 병, 생활습관, 특정한 계기에 대한 태도와 선택, 앎과 인식체계 등에 있어서 사람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노력하는가에 따라 적어도 건강과 치유에 대한 전체적인 방향이 크게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자신의 병을 통해 병에 대한 앎의 주체로 나선지 10년쯤 지난 시점에 저자가 동의보감을 공부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펴낸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근현대 100년을 거쳐 수 천년 동안 이어져왔던 동양적 인식체계와 문화를 대부분 버리고(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서구의 것에 익숙해져 왔다. 우리 역시 서구인들처럼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삶과 죽음, 부자와 빈자, 항복과 불행, 건강과 병, 발전과 후퇴 등 이분법적인 사고구조에 익숙해져 있고 분석과 해체, 나누기와 가르기, 전체보다는 부분에 강한 문화가 자리잡았고 모든 문화적인 요소에 자본과 비즈니스가 결합되어 있다.
건강이나 차유(의학)도 마찬가지인데, 서양의학은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이자 자연과 소통하는 주체로 인색하지 못하고 개별 장기, 조직, 세포로 나누어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저자 고미숙씨의 이 책에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담론의 차이에 주목하며, 이 차이에 의해 한쪽은 몸과 인생, 그리고 우주로 연결되는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으며, 다른 한쪽은 삶에 필수적인 질병과 죽음을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성찰과 연구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다고 말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명할 때 내린 당부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듯이(“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p.39)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니다. <동의보감>의 탄생 자체가 삶의 방식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고, 모두가 그 지식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런 <동의보감>의 취지를 더 밀고 나가 이렇게 주장한다. “내 안의 치유본능을 깨워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자!”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동의보감>을 8개 장으로 나누어 독특하게 설명한다.
1장 허준, 거인의 무당을 탄 자연철학자. 임진왜란으로 유배지까지 허준이 <동의보감>을 펴낸 과정을 담았고 책 속의 키워드가 분류, 양생, 용법이란 점, 그리고 <황제내경>에서 <금원사대기>까지 동양의학의 '거인'들을 어떻게 책 곳에 흡수해 냈는지 설명한다.
2장 의학, 글쓰기를 만나다 : 이야기와 리듬. <동의보감> 속에 담긴 의학적 내용과 민담을 소개하면서 의사는 연출가에게 임상실험 리얼타임 예능이을 주장한다.
3장 정(精), 기(氣),신(神)  : 내 안의 자연 혹은 아바타. 몸과 우주가 화려한 대칭의 향연임을 주장하면서 정(精), 기(氣),신(神)이 어떻게 동양의학에 반영되어 있는지, 인체와 존재와 우주를 어떻게 다루는지 설명한다. 아파야 산다.
4장 '통하였느냐' : 양생술과 쾌락의 활용. 양생의 척도는 태과와 불급 넘어야하며, 정을 보호하고 기(氣)를 보호하며 신을 보호하여 한다는 허준의 명제를 설명한다. 여기서 저자는 정(精)은 애로스와 도, 기(氣)는 자금력과 소통의 윤리, 신(神)은 존재의 절대적 탈영토화로 해석한다.
5장 몸, 타자들의 공동체 : 꿈에서 똥까지.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꿈은 사라져라 하며 몸 속의 벌레와 똥오줌은 안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6장 오장육부, 그 마법의 사중주. 오장육부는 사람 몸 속의 '사계()'이다. 상생과 상극, 수승화강과 음허화동, 일정의 파노라마, 음향과 기억, 얼굴의 일곱개 창을 통해 동양의학의 구성채계를 설명한다.
7장 병과 약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병이라고 무엇이고 욕이란 무엇인지,  아프다는 갓과 처방의 의미를 설명한다.
8장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임신과 탄생은 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자궁, 폐경, 양생 등 여성들의 몸에 대한 귀중함을 말한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다”는 표현은, 동양의학의 사유체계가 어떤 땅에 발 딛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 준다.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우주(자연)와 인간의 신체는 연결되어 있다. 산업화된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에서는 마치 사회의 전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듯, 자연과 신체도 분리된 ‘개체’로 여긴다. 그렇기에 우리 신체의 각 부분도 기능별로 분화하고, 또 의학의 체계도 그렇게 짜여 있다(소화기, 순환기, 내분비, 비뇨기 등).
서양 근대철학의 시작이 ‘의심할 수 없는 나’인 것과 지금의 서양의학 담론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개체에 대한 탐구, 그것은 서양 근대에 제반 분야에서 모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서양에서는 해부학이 발전했던 것이다.
드라마 ?허준?(원작 소설 <동의보감>)에서 가장 문제가 된 장면은 바로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듯한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지금까지 많은 동양의학 전문가들이 이야기한 바 있듯이, 이것은 서양의학적 지식에 기반한 상상이다.
동양의학에서의 몸은 가르고 절개해서 보이는 해부학적 신체가 아니라 정(精), 기(氣), 신(神)이 접속하고 변이하는, 자연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는 의도적으로 해부를 무시했던 것이다.

또한 서양의학에서는 감정을 뇌와 연결시켜 말하지만, <동의보감>을 비롯한 동양의학에서는 놀랍게도 오장육부와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 기쁨을 주관하는 것은 심장이고, 슬픔을 주관하는 것은 폐이며, 화(분노)를 주관하는 것은 간이다. 실제 <동의보감>에는 상사병으로 밥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여인에게 화를 내게 해서 뭉친 기를 풀어 주는 치법(治法) 사례부터 이와 유사한 예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저자는 이처럼 몸과 우주에 대한 시선에서부터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이 책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체에 대한 서양의 담론을 짚어 가며, 동양의학 담론의 특이성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양의학의 우수함이 아니다. 서양담론의 배치가 전문가들에게 의학의 영역을 넘겨주어 자기 몸과 감정을 들여다볼 계기 자체를 차단한다면, 동양의 담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몸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지금 누구보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지혜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 또는 서로 절대적인 문제일까? 저자는 질병과 죽음을 빼고 나면 삶이 너무 왜소해진다고, 아니, 그걸 빼고는 삶이라고 할 게 없다고 말한다. “태어난 이상 누구든 아프다. 아프니까 태어난다.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곧 아픔이다. 또 살아가면서 온갖 병을 앓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의 마디를 넘어가는 과정이다.”(p.429) 삶의 풍요로움은, 이 병과 죽음을 어떻게 끌어안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기 시작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어느 과(내과, 외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등등)에 갈 것인지만 잠시 생각한 후 이후의 과정은 전문가에게 맡겨 버린다. 그리고 처방을 받으면 고쳐지겠거니 생각한다. 이 병이 왜 생긴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도 자신의 경험을 들어 말한다. 자기 몸에, 자기 병에 너무나 무지하고 게을렀다고, 말이다. 왜 우리는 우리 몸인데도, 우리 몸을 고치는 건 오로지 전문가들의 몫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을까? 게다가 그 병은 우리 삶 자체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삶의 정말 중요한 부분, 내가 변할 수 있는 마디를 남의 손에 넘기는 것과 같다. 마치 수능 전문가들에게 내가 원서를 넣은 학교와 전공의 선택까지 다 맡겨 버리고, 좋은 결과만을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학교에서 그 전공으로 사는 것은 ‘나’인데도 말이다. 
저자의 이 고민은 이반 일리히의 문제의식과 동일해 보인다. 일리히의 그의 저작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현대 의학과 병원신세를 문제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정도의 수동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양의학과 병원의 건강과 치유에 대한 제도적 독점"으로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일리히의 논점을 다르지만 몸과 건강, 병에 대한 궁극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정의와 복지국가의 차원에서 의료의 독점을 막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는 의료의 수요자인 개개인들이 건강의 주체로, 자기 몸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방향이라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우리 모두가 의학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병원을 이용하지 말자는 뜻인 것도 당연히 아니다. 병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서, 최소한 병을 만난(이 병을 불러온) 내 삶에 대해 생각하며, 병원을 다니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병을 재빨리 치워버려야 할 어떤 것으로만 보는 데서 벗어나, 왜 이런 병이 오는지, 이것으로 내 감정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하기 위해서” 내가 꾸려야 할 일상은 어떤 것인지, 보고, 느끼고, 공부하자는 것이다. 환절기마다 재채기와 콧물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앎에 대한 열정’으로 나아가 보자는 것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질병과 함께하고 되고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면 질병도 죽음도 내 삶 속에서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프다는 것은 내 몸 속의 조화가 깨어졌거나 내 몸에 연관된 외부세계와의 조화가 깨어진 것이라는 인식은 내 몸안의 여러 존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지나고 외부의 세계, 즉 물과 공기와 흙과 불,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계하도록 마음먹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질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살면서 사람들과의 아픔과 번뇌와 갈등, 해어짐 역시 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내가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변해야 하는건 무엇일까?
 
* 책 속의 문장
- 언급한대로 허준의 독창성은 분류학에 있다, 특히 가장 두드러진 건 '5편 106문 목차'다. "내경편,외형편,잡병편,탕액편,침구편 등 다섯 가지 큰 묶음은 우리에게는 별로 낯설지 않은 구성이 아니다, 조선에서는 <동의보감>이 나온 이후 그렇게 의학을 보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때문이다. 너무나 익숙하다고 보니 우리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흐름에서 얼마나 이색적인 것인지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다섯 편으로 나누어 살피던 예는 이전에 결코 없었다," (p,57)

- 끝으로 <동의보감>에서 사계절에 맞추어 사는, 평생의 양생법으로 권하는 생활수칙을 소개한다. “하루의 금기는 저녁에 포식하지 않는 것이고, 한 달의 금기는 그믐에 만취하지 않는 것이고, 일 년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여행하지 않는 것이고, 평생의 금기는 밤에 불을 켜고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p.163 / <동의보감> ?내경편?에서)

- 오늘날 안채의 가능은 수백만 년 동안 감염인자와 주고받은 상호작용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감각에서 외모, 혈액 화학작용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것은 질병에 대한 진화 반응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심지어 성적 매력까지 질병에 대한 진화 반응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의 향기는 왜 그렇게 매혹적일까? 그것은 그 사람과 나의 면역 시스템이 다르다는 표시이다. 면역 시스템이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부모에 비해 더 광범위한 면역력을 갖춘다, (p.186 샤론 모알렘 <아파야 산다>)

-  "음양의 이치상, 기쁨은 발산하는 양기다. 슬픔은 침잠하는 음기이고. 그래서 전자는 쉽게 잊혀지고 슬픔은 오래 간다. 복은 내탓이고 화는 남의 탓이 되는 것도 이런 원리다. 사랑의 기쁨은 산산이 흩어지지만, 사랑의 아픔은 천년이 지나도록 절대 잊혀지지 않아야 하는 것도 이런 법칙의 산물이다. …… 특히 현대인들은 그 임계점을 넘어 버렸다. 쇼와 이벤트에 길들여지다 보면 기쁨은 더 이상 쾌락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들의 성향은 업!되지 않으면 다운된다. ……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구조가 심화되면 어떤 일을 겪어도 상처가 되어 버린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는 감정의 회로가 기억이라고 했다. 자의식이라는 구조와 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 이런 조건이라면 어떤 사람도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기 마련이다. 암과 우울증, 그리고 자의식. 이것이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삼종세트다. 이런 몸으론 외부와 부딪힐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된다." (p.265)
 
[ 2012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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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개정2판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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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民主主義)'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형태"라고 정의한다. 

세부적으로는 모든 주요 사안을 유권자가 직접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대표자를 뽑아 권한을 위임하고 유권자에게 책임지는 대의민주주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인권과 기본권을 헌법으로 규정하는 입헌주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등으로 구성된다. 한국의 경우 헌법에 그 모든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혀 '민주주의' 같지가 않다. 겉으로는 보통,직접선거가 자유롭게 보장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고 유권자가 결정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요소는 거의 배제되어 있으며, 유권자가 위임한 대표자들은 유권자에게 '전혀 책임지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 실현에 열중한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인권과 기본권은 추락할 수 있을 만큼 추락했다.

한국이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왜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의 몇 가지 핵심 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고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와 이익이 전혀 대의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1945년 해방 이후 60년... 수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피를 흘렸음에도 어쩌다가 이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을까?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이 책은 지난 60년의 현대 한국정치를 소재로 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구조, 변화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 한국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초기 형성조건과 제약, 그리고 이후의 사태 전개와 변화를 살펴본 후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저자는 "민주화 이전에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좁은 관점으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기는커녕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정의하는 첫 번째 부분에서는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안락한 보수주의에 젖어 있는 시대 상황을 비판한다. 
두 번째 부분은 한국 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변화에 비해 보수화되고 정치 계급의 일상사로 고착된 현실의 역사적, 구조적 기원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세 번째 부분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경험을 다룬다. ‘왜 한국의 국가는 강력한 데 정부는 무력한가’, ‘IMF의 경험과 시장 개혁은 한국 민주주의에 무엇을 남겼는가’, ‘시민사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검토한다. 
네 번째 부분은 이 책의 결론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현재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위기의 본질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대표하여 대안을 조직함으로써, 한편으로 대중참여의 기반을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정치는 투표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지면서 대중들의 정치참여에 위기를 가져왔다. 그 이유는 매우 협소한 이념적 대표체제, 사실상 극우와 보수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에 있다. 즉, 보수독점 정치체제이다. 그 결과는 계급구조화가 심화되고 중산층 중심의 사회가 해체되고 있으며 교육의 양극화, 지방의 배제와 서울로의 초집중화라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보수적 민주주의가 태동한 기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해방 후 국제냉전과 남북분단, 이념대립과 전쟁과 남북대치 상황에 근거한다. 그 과정에서 권력의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졌고 관료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이념적으로 협소한 정당체제가 구조화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보수정당 구조는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시작하여 양분되었다. 이승만의 정당은 대한독립촉성회 -> 대한국민당 -> 자유당 -> 민주공화당 ->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로 이어졌고 한민당은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민주당 -> 신민당 -> 민주한국당 -> 신한민주당, 민주한국당 ->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 민주당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 민주당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두 개의 정당의 역사는 협소한 이념, 즉 냉전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우익,보수정당끼리 경쟁하는 구도라 정착되어 버렸다.

저자는 현대 한국 정치사 60년을 관류하는 어떤 특징적인 요소, 다시 말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어떤 구조적 특성을 ‘보수적 민주화’로 정의한다. 이는 한국의 국가 형성과 산업화, 민주화에 이르는 거시적 변화를 ‘수동 혁명’ 또는 ‘위로부터의 혁명’, ‘보수적 근대화’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보수적 민주화’는 이러한 테제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민주화 이후에 우리의 경험을 보다 잘 포착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한국 민주화 과정의 특징을 ‘조숙한 민주주의’(주체역량이 미숙한 가운데), ‘운동에 의한 민주화’(6월 항쟁), ‘협약에 의한 민주화’(87년 헌법체계) 등의 개념으로 특징화했다. 이러한 개념들은 강한 냉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재벌이 지배하는 경제구조, 거대한 국가 관료제 등 권위주의에 친화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 체제가 구시대의 이념적인 틀에 얽매여' 있음으로 인해 '탈냉전과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문제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시야와 언어를 요구하는 데 반해 한국 정당 체제의 틀과 언어는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는 낙관과 비관이 교차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유권자 지지 시장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보수적 현상 유지에 편향되어 있는 유권자로서 기존 보수 양당 체제에 의해 대표된 지지 시장이다. 이 유권자 지지 시장은 권위주의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과거형 지지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의 양대 보수정당은 바로 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기존 정당 체제에 의해 대표되지 않고 있는 유권자 지지 시장이다. 이곳의 유권자들은 기존 정당 체제에 비판적이며 강한 변화 지향적 정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과거형 지지 시장과는 다르다. 
매 선거마다 사실상의 제1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투표 불참자의 규모가 보여 주듯이 이들 유권자 지지 시장은 과거형 지지 시장을 압도하는 크기로 발전했다. 이 영역의 유권자는 기존 정당들에 의해 대표되지 않지만, 노무현 현상이나 촛불 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뭔가 변화의 가능성이 나타날 때 그 존재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저자는 한국의 정당 체제가 이들의 요구가 대표될 수 있도록 변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 보수성과 협애함을 극복하는 것이 최대 과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고 기존 정당들이 현재의 상태에 안주할 때 정당 체제의 불안정은 계속될 것이며, 동시에 현 정당 체제에 대한 투표자의 비판적 저항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의 보수 편향적 정당 체제가 쉽게 변화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파생 정당과 보수 야당으로 구성된 한국 정치의 초기 질서, 즉 냉전 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보수 편향적 양당 체제는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진단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정당 체제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겠지만 그러나 현실의 정치 세계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정치 세력이 지배적이며, 보수적 민주주의의 틀을 깨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대안이 출현할 가능성은 여전히 미약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보수 편향적 정당 체제는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 세력들 사이의 분화와 재편을 통해 협소한 엘리트 구성 내부에서 권력이 폐쇄적으로 순환되는 기존의 구조를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결론에서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를 위해 좀 더 근본적이고, 동시에 다소 장기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한편으로 저자는 유권자의 선택을 대안 배제의 상황 혹은 차선의 전략적 결정 상황으로 내모는 제도적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현재와 같은 제도적 환경하에서는 정당과 정치 엘리트로 하여금 보수적 경쟁에 몰두하는 것 이외에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도록 책임성을 부과할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정치 엘리트들은 끊임없이 사회를 무시하며, 사회 역시 정치 엘리트들을 무시하게 된다. '그것은 정치를 조롱하면서 이런 정치를 정당화하는 들러리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투표율의 하락은 대안이 억압되어 있는 유권자의 절망적 항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프랑스식 결선투표제'나 비례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의 선거제도 개편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저자는 우리 사회의 민주 세력이 좀 더 현실주의적인 가치를 중시 여기는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민주 세력의 지나친 도덕주의와 도식적 이념의 과잉은 현실적 대안을 조직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끊임없는 사변적 논의만을 양산하다가 급기야 현실에 절망하여 초현실적인 외국 이론들에 무비판적으로 심취하거나 문제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문제를 개인 내면의 문제로 해체해 버리는 등의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운동 세력의 이러한 문제들은 냉전 반공주의의 거울이미지 같은 것으로, 운동이 자율적 기초와 대안적 이념의 기반을 갖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저자는 내면세계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냉전 반공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총체적 인간’을 강요하는 과도한 집단주의가 운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적 기초가 보다 튼튼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 책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를 설명하는 기존의 여러 접근과 논의들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적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주류 언론의 정치관과 민주주의관, 그리고 지식인들의 안일한 보수주의, 나아가 이성적 비판과 논쟁이 존재하지 않는 지식인 사회의 현실은, 한국 민주주의를 내용적, 질적 측면에서 저발전과 쇠퇴의 경로로 몰고 가는 핵심적 요인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금 우리는 권위주의와 접맥되었던 냉전 반공주의, 온정주의와 가부장주의, 관료적 권위주의, 기술관료주의, 시장근본주의 등 민주주의의 기반을 잠식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힘, 조류들과 대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민주화를 가져왔던 강력한 운동의 힘은 대체로 해체되거나 약화된 상태이다.
따라서 저자는 "지배적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성적인 비판과 논쟁의 장이 개척되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한국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서구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적 이념과 가치를 통해 민주정치에 대한 가치와 규범, 이해와 논의가 보다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기초를 갖게 되기를 원한다.


책을 읽는 내내 '수구,우익과 보수로 이루어진 양당 보수독점 정당체제'라는 저자의 진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중앙집중화와 권력집중 현상을 막연하게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요소의 '서울 집중'이라는 개념보다 '전방위적 엘리트 권력독점과 초집중화'이라는 지적에 크게 공감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국토균형발전을 한다고 행정부와 공기업을 지방에 이전하고 기업도시,혁신도시를 지방에 육성한다는 참여정부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한 셈이다.

최근 나에게 '엘리트 권력독점'이라는 개념은 가장 큰 화두였다. 한국의 현실을 보더라도 수구와 우익을 대표하는 한나라당, 보수를 대표하는 민주통합당, 진보를 대표하는 통합진보당, 그리고 시민단체와 언론, 종교, 문화예술, 교육계, 행정관료 등 사회 전분야에서 어떤 이념을 대표하든, 어떤 계급계층의 이익을 대표하던 그 대표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대부분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교육 수준, 경제수준, 문화수준 등이 이미 심각하게 양극화되어 가는 와중에 모든 분야의 권력을 엘리트들이 독점하는 형국이다. 그러면서 90%의 비엘리트층과 소통하지도 않는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원리가 권위주의, 절대주의, 전체주의, 중앙집중을 해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다양화, 분권화, 참여, 직접정치, 분산화, 지방화 등을 의미할 것이다. 권력과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대표자들 역시 엘리트 독점에서 벗어나 구조적으로 중산층, 서민에게도 배정되어야 한다. 의식적이고 제도적으로 교육, 훈련을 거처서 스스로 자신들의 계급,계층을 대변할 수 있어야 만이 실질적인 분권화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2002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2005년 발간된 이 책이 재판에 해당되는데, 7년이나 지난 2012년 현재 시점에서도 저자의 분석과 진단, 비판과 대안 제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처지가 암담할 뿐이다. 
 
* 참고할 만한 문구

- [1987년 운동권에 대한 평가]  
"1987년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극대화하고 정당성이 약한 정권의 약점을 최대한 노출시키면서 한대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권의 강권력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거리에서의 투쟁을 중심적 수잔으로 한다. 그러나 민주적 개방은 그동안 폐쇄되었거나 제약되었던 선거공간의 개방을 의미한다. 선거를 위한 전문직업 집단이자 조직이 바로 정당이고 그 전문가 집단이 구체제로부터 일정한 명망을 갖는 직업적 정치엘리트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의 무게심이 일순간 거리에서 선거공간으로 이동하면서 힘의 중심은 일거에 운동으로부터 기존의 정당으로 이동한다. 민주화를 가져온 일등공신인 운동 집단들은, 민주화라는 한 가지의 대의와 투쟁목표가 일차적으로 성취되면서부터, 이제 민주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내용의 민주화를 추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급속한 분열을 맞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정초선거가 될 1987년 12월 대선에서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할 것인가를 둘러싼 분열만큼 운동권이 제도권 야당에 종속되는 '관계의 역전'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후보단일화', '비판적 지지', '독자후보'로 불리는 운동권의 분열은 운동권의 약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애당초 '독자후보'가 당선가능성이 높거나 운동권을 대표하여 정치세력화의 강력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대문에 논외로 치더라도, '후보단일화'와 '비판적 지지'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는 운동권 스스로가 정당을 통해 정치 세력화하고 대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운동권이 정치적 엘리트 수준에서의 호남 대 반호남이라는 지역대결구도를 저지할 만큼 강한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반대로 그 구도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운동권이 선거경쟁의 공간에서 독립적인 중심으로 서지 못하고 구정치 엘리트들의 종속변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운동의 약함이 한국민주주의의 구조적 제약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운동의 주체적 역량과 관련된 것으로, 무엇보다 민주화 과정에서 운동이 어떤 대안적 이념과 비전을 발전시키고 이를 공유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운동권이 지녔던 이념은 대체로 사회주의나 급진적 민족주의처럼 도식적이고, 낭만적이고, 교리적이고, 비경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강력한 군부독재와의 투쟁 속에서 그들은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이론에서 투쟁의 무기를 발견하려 하였다. 

운동권의 이러한 이념적 급진성은 선거경쟁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함께 선거불참여주의적 경향 또는 선거에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념적 급진성은 운동권 내에서의 분파주의를 강화하고,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현실을 경험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낳았으며, 무엇보다도 정치 세력화에 장애요인이 되어 기존의 보수적 정당들과는 다른 대안적 이념과 비전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했다. 다시 말해 운동권의 이념적 급진성은 운동권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의 반영이었다. 그 결과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게 되자 운동권은 독립적 위치를 상실하고 기존의 제도권 야당의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해체되고 말았다."

?"생활수준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게 중요한 외형지상주의 사회, '부자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되는 금전만는주의 사회는 노동을 천시하게 만드는 노동배제적 정치체제의 결과이자, 이런 정치체제를 만들고 획일주의와 상층이동의 과열을 만든 냉전반공주의의 병리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독립적 위치를 상실하고 기존의 제도권 야당의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해체되고 말았다."
 
[ 2012년 1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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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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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어준, 지승호의 < 닥치고 정치 >를 읽고 / 2011. 10., 336쪽, 푸른숲

 

안철수/박원순 현상, 김진숙과 희망버스, 무상급식 등과 더불어 2011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 중 하나가 '나꼼수'이고 나꼼수의 기획자가 바로 김어준이다. 나꼼수는 "이명박 대통령 헌정방송"을 내세우며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지난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곽노현 교육감 구속, 서울시장 보궐선거 등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팟 캐스트 세계 1위를 기록한, 최대 회당 600만명이 다운로드 받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MB 정권과 집권당이 방송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장악하고 조중동 등 주류언론이 정권과 야합하면서 '알권리'와 '말할 권리'를 빼앗긴 대중들은 나꼼수의 등장에 환호하였고 첨단 미디어의 발전은 SNS와 스마트폰을 보급을 가져와 소비자들이 손쉽게 나꼼수에 접하고 주변에 전파하면서 자기 의견을 추가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김어준은 대중의 목마름과 기술발달에 자신의 콘텐츠를 담아냄으로써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셈이다.


지금까지 기존 정치권은 물론이고 진보적인 정치권과 시민사회운동 세력도 대중들의 몸과 마음에 다가가지 못해왔다. 자신들만의 언어와 자신들만의 조직으로 대중과 소통이 단절된 채 기득권 언론과 비주류 언론에 의지해 온 것이다. 정치권이든,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진짜 일단 대중들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만나는데 처음 성공한 집단이 바로 ‘나꼼수'라 할 수 있다.


최근 경향신문에 실은 우석훈씨의 말대로 "나꼼수가 없었다면, 어눌하면서도 TV 토론에서 ‘따박따박’ 나경원을 ‘발라주지’ 못하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중년의 남성이 시장이 될 수 없었을 건 분명"하다. 명실상부, 현재 "공중파와 언론을 통틀어서 지금 김어준은 최고의 기획자"이다. 그는 "지금 한국에 김어준의 감각을 따라갈 사람은 없고, 그만큼 종합적이며 기민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은 ‘시민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어준의 시대’이기도 하다."고 단언한다.

 

김어준.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철학과 정치관은 무엇일까? 

이 책은 김어준이라는 기획자에 대해, 그의 세계관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책 [닥치고 정치]에서 무학(無學)의 통찰을 약속하는 김어준은 폼 잡는 이론이나 용어, 모두 버리고 일상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한다.(그의 말투는 기성 언론인, 학자, 정치인 뿐 아니라 점잔을 빼는 '어른'들도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땅에 점장을 빼는 지식인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  '일색'이디기 때문에 김어준처럼 내뱉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사방이 꽉 막힌 세상에서는...)

그는 이 책이 "'평소 정치에 관심 없는 게 쿨한 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이번 대선이 아주 막막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정치를 멀리하는 모두에게' 외치는 정치 교본"이라고 큰 소리친다. '이명박의 여집합', '신정아와 문재인', '비자금, 도둑질', '박근혜, 과거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내고 있다.


김어준 수다의 시작과 끝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왜 정치에 관심을 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는 정치와 우리 개개인의 일상이 따로 가고 있지 않음을 환기시키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원하는 바를 위해 스스로 행동하길 바란다. 높은 물가와 등록금, 과도한 경쟁 체제 등 일상 속 스트레스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 우리 모두 정치의 '주체'임을 인식하고, 닥치고 정치한다면 그의 말대로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독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 깨닫기, 이명박 정권과 삼성을 통해 보는 우리나라 보수 권력과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실체, 유명 정치인들의 적나라한 정체, 이들을 견제해야 할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 무엇보다도 선거가 당신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무학(無學)의 통찰로 시원하게 깨우쳐준다.


안철수도, 박원순도, 곽노현도, 오세훈도 뉴스에서 볼 수 없었고, '나꼼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인 바로 그때, 이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당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현 정권은 여전히 민심과 거리가 멀었고, 주류 언론이 선택한 뉴스는 빠진 것이 많았다. 작년 6·2 지방선거와 분당 보궐선거 결과의 의미는 자명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정치 이슈가 생활화되고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분명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뭔가 불편하고 찝찝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이에 내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그는 분연히 일어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한 <진보집권플랜>처럼 옳은 소리로, 점잖게 소명의식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왜 선거에 참여해야 하며 그것도 '알고' 찍어야 하는지, 왜 사람들이 머리 아픈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잘살기 위한 길은 무엇인지, 일상 언어로 풀어헤쳐 보고자 했다. 이 엄중한 시국에 벌어진 우연을 가장한 필연. 정치 지형에 대한, 공학적 접근이 아니라 실제로 각 개인의 입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꼼꼼하고 구체적인 정치 해설 가이드북 <닥치고 정치>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책의 모토는 '알고 찍자'다. 내년 대선과 총선에 앞서 어떤 정당과 정치인이 우리의 욕망과 희망에 부합하는지 김어준은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박근혜를 비롯해 이렇게 많은 현직 정치인들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신랄하게 평가한 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김어준은 정치가 인격화된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날카로우면서도 실감나는 일상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 익살스런 입담으로 쏟아내는 적나라한 인물평 속에는 우리가 그 정치인들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을 집어내는 통찰이 있다. 단 몇 마디로 그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판가름해준다.

(김어준은 다음 대통령 후보감으로 문재인씨를 꼽았다. 그가 문재인씨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MB 정권의 탄생이 민주정부 10년의 반동이고 자신이 공과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문재인씨가 이 시대의 패러다임인 '공감, 소통, 참여'를 상징할 수 없기 때문에 선뜻 18대 대통령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아직 1년간의 시간이 남았다. 문재인씨 역시 현재 유력한 후보이고 적극적인 유권자의 참여를 통해 그가 선택되고 스스로 시대의 패러다임을 익히고 더불어 안철수씨와 공감한다면 다음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 반대편에 있으면서도 대다수 국민들을 대변하지 못한 진보 정당의 한계 또한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식이다. 비꼬고 낄낄거리기보다 사뭇 진지한 태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집권을 위한 김어준의 로드맵을 제시한다. 책 속에 현직 정치인들을 그렇게 많이 등장시키고 날카롭게 파헤치는 이유가 로드맵을 가능토록 하는 엔진이 바로 사람,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좋은 컨텐츠와 정책을 갖고도 엘리트 의식이 빚어낸 대중 언어의 부재로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진보 정당의 폐부를 후벼 파고, 스스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임을 자처하면서 국민참여당에게 괴물의 탄생이라 칭하는 것은, 결국 문재인, 심상정, 이정희, 노회찬, 유시민 등과 같은 인물들이 다 함께 나서서 대중적 지지를 끌어냈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꼼수' 현상과 김어준 시대의 효과는 대선까지라 할 수 있다. MB로 상징되는 막가파 기득권은 현재의 '선수'들이 합심하여 다음 대선에서 교체할 수 있지만, '엘리트에 의한 정치&경제 독점'과 대의정치의 한계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노동,NGO까지 포진해있는 인물들의 면면은 대부분 엘리트이고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과 문화는 이를 확대,심화시키면서 재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어쩔 것이냐? 이 책은 '할 수 있다!'라는 구호에서 멈추거나, 맥 빠지는 선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김어준은 기존 정치권에서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정치'가 나타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 사례가 바로 현재 진행 중인 '나꼼수' 광풍이다. 이 책의 인터뷰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나꼼수'의 인기몰이는 김어준이 말하고 있는 변화 가능성이 현실화된 사례다. 시대정신과 기술의 진보가 마련한 플랫폼이 합쳐지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구태의연한 정치 공학이나 보수 언론의 프레임을 가뿐히 뛰어넘어 새롭게 판을 짜는 혁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책에서 제시된 주장이 '나꼼수'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증명되고 있다. 즉, 새로운 유통 플랫폼이 등장한 이 시대에는, 철저한 자발성, 대중을 지향하는 언어, 쫄지 않는 자세만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프레임 밖으로 나가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꾸 기득권의 프레임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 바로 혁명의 시작이고, 그가 말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자 진보집권플랜이다.



김어준의 생각과 주장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고 나와 다른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가 책에서 말하는 요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사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앞으로 참여하는 만큼 한국사회가 바뀌리라는 것을...

모두가 닥치고 정치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김어준의 희망이고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것이리니 관심이 참여로, 참여가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김어준은 김어준의 길을 갈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역할,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목표와 목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하고 놀고 웃고 즐기면서 조금씩 더 나은 사회와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를 보고 싶다.

 

* 인상 깊은 문단


- 노무현의 애티튜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상황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을 때...(p.17)


- 자유주의자들의 낭만을 비판하는 21세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휴머니스트였던 마르크스의 낭만을 생각해봤을까 몰라.(p.46)


- 어?e든 당시(마르크스 시대)의 주석은 지나치게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한 한계가 있다고 봐. 경제적 계급은 공포가 만든 결과일 뿐이거든. 원인이 아니라. 그 공포를 통제하지 않고서는 계급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공포는 본능의 영역이라고. 이걸 과학이나 신념으로 해결할 순 없다고. 다만 관리할 수 있을 뿐이지. 그래서 계급의 문제를 풀려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공포를 줄이고 관리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전정치가 사회적으로 더 절실하다고 봐. 그게 사회구조적 장치여야 하는 건 맞지만, 혁명으로도 공포 자체를 삭제할 순 없다는 거지.(p.46)


- 사람들이 대통령을 선택할 때 논리를 동원하는 건, 그 사람에게 꽂힌 마음을 정당화할 도구로 쓰는 거지, 논리의 귀결로 누군가를 선택하는게 아니라고. 그런데 진보 진영에선 언제나 논리르 먼저 내세우지. 뇌 구조가 그럴 수 밖에 없긴 한데, 지금 사람들이 찾고 있는 건 그게 아니야. 자기 마음을 줄 사람. 그리고 그 마음이 배신당하지 않을 사람을 찾는 거지.(p.73)


-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저조한 득표는 종북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투표하게 된 시대성, 노무현 정부로 인한 피로감, 민주당의 탁월한 등신 인증에 따른 콜래트럴 데미지였다고. 진보정당은 선거에서 그렇게 민주당의 종속변수라고. 탄핵 정국처럼, 한나라당이 완전히 지그려져서, 진보를 폭 넓게 받아들일 여력이 생기고 그래서 두 번째 선택까지 고려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야 별도로, 추가 배려를 받는...(p.185)


- 그런데 진보정당의 방식은 이런 식이야. 처음 만난 상대 앞에 재무계획서와 신혼방 설계도를 딱 꺼내놔. 그리고 입주할 주택의 입지 조건과 구입할 차량의 대출조건 및 주변 교육환경의 우수성에 대해 부동산과 금융, 교육 전문용어를 섞어 진지하게 프리젠테이션하지. 그런 다음 건조한 표정으로 바로 결혼하재. 만약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속물이라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에 넘어간 방증이라며. 그걸 당한 상대는,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당신 패션부터 좀 후줄근한 것이 촌스러운 데다, 자료는 열심히 준비는 한 것 같지만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겠고, 결정적으로 내가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냐며 일어나 떠나버려. 남겨진 진보군은 자기 프로포즈가 실패한 요인을 열심히 분석하다가 입지 조건과 대출조건의 우수성을 다른 결쟁자들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 내리지. 그렇게 연애 한 번 못해봤으면서 꼭 결혼할 거라고 혼자 다짐을 하지. 

욕심 많고 잇속 빠른 보수군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진보군이 책상 위에 남기고 간 계획서와 설계도를 집어와서는 표지만 엄청 화려하게 바꾸고 총천연색 칼라로 인쇄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난 국민양을 찾아가 계획서를 다시 내놓는다는 거지. 하지만, 그 내용은 읽어주지 않아. 휘리릭 페이지만 넘기면서 대신 장미 한 송이 안겨주고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엄청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시키지. 그들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해버리네.(p.223)


- 하지만 대중정당이 왜 자꾸 학술원처럼 구냐고. 진보진영이 대중의 모호한 인식체계를 계몽해서 어떻게든 민주당을 포함한 보수와 자기들을 분리해내겠다는 나홀로 전략, 바로 거기서부터가 거대한 실패의 시작이라는 걸 알아야 해. 내가 한 번 이야기했잖아. 마음은 한정된 자산이라 비슷한 곳에 여러 번 나눠줄 만큼의 여력이 없다고. 게다가 우리 마음을 그렇게 나눠 쓸 만큼 한가로운 정치 지형 속에 있지 않아. 

아주 쉬운 예로, 어떤 분야든 업계 1,2위 정도가 머리에 입력되고 나면 3위부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해서 나머지 모두 군수 업체로 처리된다고. 기억이 잘 안나. 정치는 훨씬 더 그렇다고. 내 일상에 매일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내가 매일 쓰고 있는 상품도 아니기 때문에 큰 덩어리의 이미지로 1차 분리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을 쓰는 일 자체가 대단한 정신노동이야. 그래서 진보진영이 자신들을 구분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보편적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라고. 자기들이 뭔데 그게 가능해. 

그게 쉽게 되는 소수의 진보정당 열성 지지자들은 그런게 대단한 정신노동이라는 것부터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억울해하지. 우리 가치를 모른다고. 바로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굴러먹기 시작한다.(p.299)

 

[ 2012년 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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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작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집권당이 한미FTA 조약을 기습으로 날치기 처리한 이후 한 달 넘게 전국이 항의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한미FTA 조약은 5년 전 참여정부에서 추진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했고 당시에는 이번 날치기 이후 상황보다 더 큰 국민적 저항이 있었다. 
한미FTA는 2007년 체결 전후의 상황버섯 시작하여 그 처리과정에서도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무시했고 내용도 '불평등 조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명칭인 '자유무역협정'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정부나 집권당에서 '통상협정'이라고 우기지만, 자세히 공부해보면 볼수록 실제는 통상협정 이상의 법적,제도적,문화적 변화를 가져올, 가히 '혁명적'인 조약이라는 본질이 드러난다.(통상관료나 총리가 여러번 그런 취지의 발언을 언론에 내비치 경우도 있지만...) 
 
2007년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미국과 조약 체결 당시보다 현 이명박정부의 FTA 내용이 상당히 후퇴한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전정권처럼 참여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2007년 FTA 내용은 괜찮고 2011년 FTA는 나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FTA 관련 책을 한 권 만 읽어보아 알 수 있다. 실제 누구라도 한미FTA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공부한 시간 만큼, 알아본 내용만큼 더욱 맹렬하게 한미FTA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미FTA는 우석훈씨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50~100년 이상의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약이고 그 내용과 국내 처리과정, 미국과 협상과정, 비준 후 처리과정 등이 모두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느냐, 전진시키느냐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앞으로더 크게 그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가 1%의 기득권 사회로 더 심하게 고착되고 공동체가 붕괴되느냐, 아니면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줄어들어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면서 공동체가 재건되느냐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한미FTA가 가져올 여파 중 하나가 바로 '의료민영화'에 대한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료민영화'란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한국의 의료기관은 대부분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들이 '의료민영화'라고 하면서 문제를 삼는 핵심부분은 사실 '영리병원'이다. '영리병원'이라 함은 현재 한국민 전체에 적용되는 국민건강보험 공공시스템에서 벗어나 영리만을 목적으로 영업하는 민간병원을 말한다. 정부는 송도지역 등 이미 전국 수십 곳에 지정되어 있는 경제자유구역에 이러한 민간병원을 허용하는 것을 계획 중이다(최근 정부관계자가 그 사실을 인정). 영리병원은 의료비의 폭등을 불러오고 기득권만의 전유물로만 이용되면서 사회의 의료양극화를 초래하고 그렇지 않아도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민감보험이 건강보험을 좀 먹을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된다. 그렇게 되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병원들도 경쟁이나 형평성을 이유로 점차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건강보험 재정을 붕괴시키는대 기여하기 된다. 

이미 치료시설 기준으로는 우리나라 역시 '민영화'되어 있다. 공공의료시설은 전국 병의원 중 10%도 안된다. 건강보험 보장이라도 아직 60% 선에 머물고 있다. 삼성의료원 등 재벌병원은 고급화, 대형화를 선도하면서 대학병원에서 국공립병원까지 경쟁 대열에 끌어들이고 과다한 진단과 의료시설을 투입하여 건강보험 재정을 좀 먹고 환자들의 자부담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건강복지 차원에서 앞으로 의료의 공공성을 늘려가고 함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는 오히려 공공성을 약화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미FTA와 의료만영화, 영리병원은, 의료공공성을 모두 인정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버릴 수가 없다. 
한 나라의 모든 정책과 복지가 공공성을 키우는 것으로 만사형통일까? 의료공공성에서 우리나라보다 백년 이상 앞섰던 서구에서도 궁극적으로 공공성을 달성하는데 실패했기 오히려 20세기 후반부터 의료복지가 축소되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건강을지키기 보다 조금만 기인하고 아픈 것 같으면 의사에게 가고 약국에서 약을 사는 상황에서 정말 의료가 필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도대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근원적으로 해결방안이있을 것인가? 
한국의 경우 건강복지 뿐 아니라 생계복지, 아동복지, 교육, 주거복지 등 무수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경제성장 역시 이제 저성장 구조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재정운영 여력도 한정되어 있다. 현재 구조에서 전체적인 복지수준을 늘려가면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늘려간다면 아마도 보장을 90%를 달성하는데 것은 요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는 크게 병을 앓은 적이 없다. 그래도 살면서 여러차례 식중독이나 급성 근육걸림, 몸살, 감기 등 누구나 한 번쯤 앓을 만한 불편은 겪었다. 다년 간의 경험으로 생각컨대 몸살, 감기는 의사가 처방전을 내리고 약을 사 먹은 것은 병을 치유하기 보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정도였다. 즉 며칠 간 집에서 끙끙 앓으면서 내 몸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음에도 그 자연치유 시간이 아깝고 고열과 무기력을 피하기 위해 약을 사 먹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식중독의 경우에도 결국은 구토, 설사를 여러번 반복하고 난 후 병원에 실려가면 포도당 주사를 맞고 쓰린 위와 장을 진정시키는 약을 처방할 뿐인 것 같다. 구토, 설사를 반복하여 기진맥진할 때까지 내 몸속의 식중독 균을 모두 배출하고 몸이 자연치유하는 과정이 기본적인 진행과정일 뿐이고 나머지는 보조수단이라는 것... 병원은 식중독에 걸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피를 뽑아 혈액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소변검사를 하는 등 병원은 자신들의 진단시설의 유지비와 인건비를 뽑아내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 내 건강과 치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입원 소감이다. 급성 근육걸림의 경우에는 의사와 약사에게 의존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진단비용만 낭비될 뿐 파스와 알약을 조제해 주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움직임을 조심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근육통은 웬만한 한의사를 찾아가면 돌리지도 못하던 목이 하루 만에 움직일 수 있고 숨쉬기도 고통스러웠던 근육통이 단 한번의 침 치료로 절반 이상 낫게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아도 나와 비슷한 사례는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병원과 의사가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이 책은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 책은 1973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서구와 아메리카 대륙의 건강과 현실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21세기 한국에서도 의료현실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크게 '병원병'과 '건강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다. 먼저 1장 ~ 3장에서 의사와 의료제도가 만들어 내는 '병원병(病院病)'을 다룬다.
우선 1장 <임상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기술성과의 대차대조표를 제시하고 있다. 과거 3세대에 걸친 비교 검토를 통해 질병의 변화와 소위 의료의 진보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병을 일리히는 임상적 병원병이라고 불었다. 
제 2장 <사회적 병원병>에서는 의료의 사회적 조직이 건강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효과를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사회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제 3장 <문화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활력에 대해 초래하는 부정적 영향을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문화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건강의 정치학'과 관련하여 저자는 4장 <건강의 정치학>을 통해 의료제도의 불합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일리히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최근 세대 동안 건강관리에 대한 의료(제도)의 독점은 한 번도 점검되지 않고 확대되어 왔으며 우리들의 몸에 관한 자유를 침해해 왔다. 이것이 일리히의 주장이다.

저자 일리히는 "의료기술의 진보와 질병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
14세기 전 유럽을 강타했던 페스트(흑사병)는 16, 17, 18세기에 걸쳐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페스트 균을 발견한 건 19세기, 그것도 한참 후반인 1894년이다. 중세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분석에 따르면 페스트가 잦아들게 된 것은 의사의 치료나 항생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도시의 대화재들 때문이었다. 화재가 주택형식을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목재 주택에서 석조 주택으로 주거형식을 변형시켰고 이에 따라 실내와 사람들이 청결해지기 시작했으며, 작은 가축들이 사람들의 주거 공간과 멀리 떨어지게 됐다. 이것이 사람들과 페스트를 멀어지게 했다.
이 책에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도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한다. 일리히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뉴욕에서의 결핵 사망자수는 1812년에 1만 명당 7백 명 이상의 비율이었다. 코흐가 처음으로 결핵균을 분리 배양했던 1882년에는 1만 명당 3백7십 명까지로 저하되었다. 나아가 최초로 결핵 용양소가 설치된 1910년에는 1만 명당 1백80명까지로 저하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항생물질의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결핵에 의한 사망률은 1만 명당 48명이었다. 결핵은 그 병원(病原)이 이해되고 특수한 치료법이 발견되기 전에 그 독성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따라서 그 사회적 중요성도 대체로 잃고 말았다.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등도 이와 유사하게 의사나 병원의 통제와 무관하게 정점에 이르렀다가 차차 감소해왔다. 이런 질병을 잡아낸 것은 의사나 병원이 아니었다. 우선 주택의 개선과 미생물 유기체가 갖는 독성의 감퇴 등이 지적될 수도 있겠고, 역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영양의 개선으로 인간의 저항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항상 이런 문제는 뒤로하고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 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오해에 젖어 있다. 사람들은 의료의 진보와 질병의 상관관계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의료비는 매년 치솟고 평균수명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철저한 오해다. 1970년을 기준으로 과거 20년 간 미국의 물가지수는 74% 상승되었으나, 의료 관리 경비는 330%나 급상승하였다. 1950년부터 1971년 사이 건강보험을 위한 공적 비용의 지출은 10배나 증가되었고, 사적 보험의 급여는 8배나 증가되었다. 그리고 직접 주머니에서 지불된 액수는 3배나 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총 의료비도 미국에 병행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산업국가-대서양, 스칸디나비아, 동구-에 있어서 보건 부문의 성장률은 GNP 그 자체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건강에 대한 경비는 1969년부터 1974년 사이에 40%나 증가되었다. 이건 부유한 국가만의 특권이 아니다. 콜럼비아-부유한 자를 우대하는 곳으로 악명 높은 빈곤국이다-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10% 이상이 건강관리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료비용의 급상승이 평균 수명을 눈에 띄게 연장시키거나 결정적 질병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사가 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론적으로 의사는 첫 진단으로 그의 환자가 어떤 질병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안전 장치(fail-safe)의 원칙에 의해 환자에게 질병이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질병이 있다고 말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의학적 결정의 규칙이 의사를 압박하여 건강하다기 보다는 질병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안전함을 추구하게 한다. 하지만 의사의 이런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 병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와 같은 왜곡의 고전적 실례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1934년에 행해진 뉴욕 공립학교에서의 실험을 들 수 있다. 뉴욕 시의 공립학교 1천 명의 11세 아동에 대한 조사에서는 61%가 편도선을 제거하도록 요구되었다. 61%의 아동 외에 39%가 다시 다른 의사 그룹의 진단을 받았는데, 그 중 45%가 편도선 절제를 받아야 하고 나머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이 필요 없다고 했던 아동이 또 다른 의사 그룹에 의해 재진단을 받게 되자 남은 아동의 46%가 편도선 절제를 권고 받았다. 이 중에 또 다시 남은 학생을 대상으로 제 3회의 진단을 받았을 때, 거의 같은 비율의 아동이 편도선 절제를 필요로 한다고 보고가 나왔다. 그 결과 편도선 절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아동은 1천명 중 단지 65명에 불과했다. 기하급수적인 의료비 상승을 유발하는 고가의 장비에 의한 검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66년 미국에서 실시한 한 검사에 의하면 83개의 골반 수술을 권유받은 증세 중 인간과 기계 모두가 옳았던 것이 22개, 그리고 37개의 예는 컴퓨터가 옳았고 의사의 진단은 틀렸으며, 11개의 예에서는 의사가 컴퓨터가 틀렸음을 입증했고, 10개의 예에서는 의사도, 기계도 모두 틀렸다. 단순히 진단만이 문제는 아니다. 1968년을 기준으로 1968년, 영국의 경우 캐나다에서 보다 남자가 1.8배 여자가 1.6배의 외과 수술을 받았는데 대부분 편도선 절제술, 치질 절제술, 사타구니 탈장 수술과 같은 임의의 수술이 2배 이상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는 이용 가능한 침대 수, 지불 가능한 병원비, 외과의사의 수 등이었다. 현재 의료비 중 가장 급격한 상승을 보이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다. 그것도! 충분히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가 급상승하고 있다.

일리히는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건강한 세상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의료의 개입이 최저한으로 우연적으로 밖에 행해지지 않는 세계가, 건강이 가장 좋은 상태에서 너리 행해지는 세계이다. 건강한 사람들이란 출산, 성장, 노동, 치료, 죽음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적합한 환경 속에서 건강한 집에 살고 건강하게 식사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인구의 제한, 노화, 불완전한 회복, 그리고 항상 절박한 죽음의 의식적인 수용을 높이는 문화에 의해 유지된다. 건강한 사람들은 결혼, 출산, 인간조건의 공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료적 간섭을 최소한으로 요구한다.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유지되는 위약함, 개성, 관련성은 고통, 질병, 죽음의 경험을 삶의 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 이 셋과 자율적으로 싸우는 능력은 그의 건강에 기본적인 것이다.(p.296)"


저자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공생의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 일련의 저작 속에서 일관되게 주장해 왔듯이 타율적 관리를 배제하고 자율적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 패러다임을 꿈꾸고 있다. 의료부분의 있어서의 자율적 공생의 계획을 꿈꾸는 일리히는 보건 전문가에 의한 관리에 대해 제한을 목표로 삼는 정치적 계획 그리고 자신의 건강 관리를 위한 힘을 민중들이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계획은 산업적 생산양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근대 이후 국가의 안전은 무력(군사력)의 균형이라고 선전되었다. 사회복지 사업은 사회생활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못박아 놓았다. 경찰의 증가와 경찰의 보호는 안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호도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생산활동인 것처럼 인식케 했다. 심지어 아동이 학교에 가는 것과 학습은 동일시되고 있다. 또 의사한테서 치료를 받기만 하면 건강치료를 받은 것처럼 누구나 오해하게 만든다. 건강, 학습, 존엄성, 독립, 창조적 노력 등의 가치가 이들 가치에 봉사하고 있는 제도의 수행보다 못한 것으로 ‘신화화’된 것이다. 때문에 이런 분야의 예산이 늘어나거나 인력이 확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오해되거나 반동으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일리히는 이런 오도된 가치관, 타율이 지배하는 사회에 메스를 들이댔다. 때로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한 분석은 서구 학자들과 언론이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 한명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게 했다.
<학교 없는 사회>와 더불어 일리히의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일리히는 전문가의 의료 통제가 낳은 파괴적 경향에 대해 다룬다. 그는 진찰과 치료가 도리어 병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목하고, 질병의 치료에 의해 생기는 역설적인 피해에 대해 고발한다. 그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우리는 이미 의사와 병원이라는 전문가에게 너무 많이 속아왔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발간한 1970년대 미국과 2012년 한국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크게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산업생산양식에 근거한 사회경제구조, 무한경쟁 시스템, 모든 가치의 상품화와 제도적/근원적 독점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21세기 한국이 20세기 미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새롭게 꿈꾸는 미래사회,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희망이 무엇일까? 단순히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전문가와 단일한 제도에 의존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얽어매는 족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와 선생에게 아이들의 학습을 의존하고 에너지와 교통시스템에 이동의 자유를 의존하고 의사와 전문가에게 우리의 건강을 의존하고 정치가와 관료에게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의존하고 기업가와 시스템에 우리의 생활을 의존하는 근본적인 독점구조에서는 다양한 가치와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에 닥친 학교와 교육의 개선 문제, 에너지 문제, 정치와 경제, 사회복지 문제 등을 현재의 커다란 제도와 시스템 내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내어 시급한 현안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제도와 시스템에 가려 우리가 꿰뚫어보지 못하는 근원적, 근본적인 독점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점은 경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사회 각 분야의 독점과 그 독점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이야말로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우리가 풀어내야 할 숙제이지 않을까 싶다. 이 사회를 벗어나 무인도로 도망갈 계획이 아니라면...
 
[ 2012년 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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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있어 '내가 얼마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가'하는 것은 자주 고민하는 사항이다. 이미 1년도 훨씬 전부터 기본적인 이동수단을 자동차에서 '도보 + 대중교통'으로 바꾸었고 집안에서 에어콘을 제거했으며, 난방도 '외출' 밖에 설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와 이동(교통)에 대한 고민을 계속된다. 무언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내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했고 내 삶에 있어서 '자유'와 '자율'을 추구하는데 있어 한 가닥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KTX와 고속도로 등과 우리나라의 교통.수송 정책에 대한 문제의식도 많았다. 일차적인 문제의식은 물론 '토건발전' 패러다임과 토건시스템으로 인한 '부정부패'다. 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인프라)는 현 정권 들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그것은 '국가 정책과 예산의 사익화'다. 아직까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래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무리한 토건사업을 추진하고 국가의 세금으로 외국계 회사(또는 재벌회사)에게 이익을 보장해주는 정책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권, 정치권의 성격이나 구성원과 관계없이 이러한 사회간접시설 투자가 계속 이루어지는 상황의 이면에는 국민 전체적으로 이에 대한 무관심 또는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늘 있었다. 저자는 그런 문제제기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Energy and Equity'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에너지와 공정(공평)'이다. 즉, 이 책은 에너지를 매개로 하여 '평등'을 고찰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에너지의 양적인 확대,발전이 생산을 향상시키고 생활을 산업화시키고 물질적인 풍요함을 이룩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산업사회의 '신화'이며 '오류'라고 주장한다. 곧 그것은 사회적 '공정(공평)'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산업 중에서 교통을 예로 들어 '속도'를 패러다임으로 하여 에너지-소비의 한계 설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저자는 18세기 경 서구에서 시작하여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근대화(또는 현대화)란 병의 가장 심각한 증세인 에너지 중독 내지 속도 중독이 이미 우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도 기술 산업화를 향한 '발전'과 '개발'이 초래한 에너지의 찬미와 과잉소비는 자연파괴를 가속화시켰고 인간에게서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아 사회적 불공정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도 자신의 일관된 논리로서 근현대 산업사회가 초래한 하나의 법칙을 주장했다. "산업생산물이 어떤 것이던 간에 1인당의 양이 일정한도를 넘기게 되면 욕구의 충족에 대한 근원적인 독점이 발휘된다."

그는 이 책에서 이동을 뜻하는 '교통', 신진대사 에너지의 소비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통행', 기타의 에너지원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수송'을 구별한다. 그리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이 깨어진 산업적 교통을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에 의해 복구시키고자 한다. 대안의 방향은 참여를 통해 수송의 속도에 제한을 가하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을 제도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역자인 박홍규교수는 '역자 해설'에서 이에 더하여 도로 건설, 자동차 이용에 대한 명확하게 대가를 요구해야 함을 주장한다. 보행자와 주민의 피해 보상과 권리 획득, 환경훼손에 대하여 자동차 회사와 자동차 이용자에게 '사회적 비용'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1970년대 기준으로만 보아도 미국에서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45%가 수송수단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 곧 수송수단을 제조하고, 움직이게 하며, 그 주행, 비행,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은 장소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동시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2억 9천의 미국인을 수송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에만 할당하고 있는 연료는 13억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모든 목적에 사용하고 있는 연료를 양적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이 연료의 거의 대부분이 가속을 촉진하는 마술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소비가 아무리 높아지고, 수송수단이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안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수송수단에 의해 하루 평균 32km정도를 움직이고 있으나 이러한 수송수단은 사실상 반경 8km 이하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수송수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발은 결코 지면에 닿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은 자기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자신이 급속도로 수송되어 갈 때에 창밖을 흘러가는, 직접 접촉할 수 없는 풍경을 자기의 활동범위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의 영토를 확립하고 그것에 스스로의 발자취를 남기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는 힘을 우리는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시간에 가치를 부여할 때 공정성과 수송수단의 속도는 반비례한다. 무제한의 속도는 엄청난 고가이고, 그에 비례하여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어지고 있다. 고속은 극소수 인간의 시간을 거액의 값으로 자본화시키지만, 동시에 불합리하게도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노상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의 5분의 4는,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결코 없는 통근자와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이 보내는 시간이다. 한편 회의나 휴양지에 가기 위하여 이용하는 항공기 비행거리의 5분의 4는, 매년 정해진 인구 중 동일한 1.5%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우리가 속도에 의해 생활시간을 박탈당하고 있는 사례로 들어가 보자.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은 자기의 차와 관련해 1년에 1,600시간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차가 달리고 있을 때에도, 정지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차 속에 앉아 있다. 차를 주차장에 넣고, 주차한 차를 찾기도 한다. 또한 차를 사기 위한 계약금과 다달이 지불해야 할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고속도로 통행료,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시의 벌금 등을 지불하기 위해 노동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일어나 있는 16시간 중 4시간은 차를 운전하거나 그것을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모으기 위하여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숫자는 수송에 의해 강제되어 다른 활동에 소비되는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즉 사고로 병원이나 검?경찰, 법원, 또는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다음에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자동차 광고를 보거나 소비자 교육집회에 참가하여 소비하는 시간 등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결국 전형적인 미국인은 7,500마일을 달리는 데에 1,600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이는 시속으로 치면 5마일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수송산업이 없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시속 5마일 이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에라도 걸아갈 수 있다. 이미 1천8백만대가 넘는 자동차를 보유한 우리나라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걷도록 만들어졌다. 모든 움직임의 기본은 걸음이다. 그리고 길은 인간의 걸음터였다. 인간의 걸음은 그 본래의 기능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걷는 기능, 걷는 권리가 쇠뭉텅이 기계에 의해 박탈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4,500만의 걸음을 단 몇 백만 대의 자동차가 정지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동차화된) 가속도의 무익성을 주장하며 자전거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전거는 보행자보다 3~4대 빠르고 현실에서 종합적인 계산으로 따지면 자동차보다 빠르다. 또한 공간 점유, 도로 구성, 제반 설치/운영비용, 사고와 환경 등 간접비용 등 모든 면에서 자동차, 전차보다 인간에게, 사회에게 유리함을 설명해 놓았다.

그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요약하면, 대량의 에너지 소비는 필연적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까지도 파괴한다는 것이다. 곧 높은 에너지 소비가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설령 오염이 없는 에너지가 발견된다고 하여도 한계를 넘는 에너지의 사용은 인간을 정치적으로 불능으로 만들고 자율적 공생사회를 위한 조건들을 제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소위 정치적인 '좌파'나 '진보주의자'들도 받아들이는 '발전, 성장,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히 저작은 모두 ‘타율적 관리’ 사회에 대한 ‘자율적 공생’ 사회의 대응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 책 역시 타율화된 학교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 관료화된(타율화된) 병원제도가 만들어낸 병원(病原)에 대해 다룬 <병원이 병을 만든다 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처럼 자율화된 인간을 지향하는 그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 책에서 이반 일리히는 최적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며 그 한도를 정치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일리히는 산업의 근본적 독점으로부터의 해방은 최적교통의 옹호를 기초로 한 정치과정에 사람들이 참가한 경우에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한 몇 개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 특히 '근원적 독점'이 나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대사회의 근본적 문제, 특히 사회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99% 일반대중의 자유와 자율성 상실, 중앙집중의 가속화와 분권화의 실패 등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주장하는 '산업사회의 근원적 독점'은 경제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근원적 독점'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행정, 문화, 미디어(여론), 과학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정치와 행정분야는 '엘리트 독점'이란 현상으로, 문화 역시 '산업화,상품화'와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자본과 엘리트에 의한 독점'으로, 미디어와 여론 역시 마찬가지의 독점 현상이, 과학기술 분야 역시 '전문기술관료 독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는 현존하는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산업생산양식을 고려할 때 막연하게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가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대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에너지 및 '이동의 자율'과 관련하여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음력 설 이전에 자전거를 구해 나의 '자율적인 이동' 거리를 더 늘리는 것이리라...^^

[ 2011년 12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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