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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개정2판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6월
평점 :
'민주주의(民主主義)'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형태"라고 정의한다.
세부적으로는 모든 주요 사안을 유권자가 직접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대표자를 뽑아 권한을 위임하고 유권자에게 책임지는 대의민주주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인권과 기본권을 헌법으로 규정하는 입헌주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등으로 구성된다. 한국의 경우 헌법에 그 모든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혀 '민주주의' 같지가 않다. 겉으로는 보통,직접선거가 자유롭게 보장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고 유권자가 결정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요소는 거의 배제되어 있으며, 유권자가 위임한 대표자들은 유권자에게 '전혀 책임지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 실현에 열중한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인권과 기본권은 추락할 수 있을 만큼 추락했다.
한국이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왜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의 몇 가지 핵심 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고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와 이익이 전혀 대의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1945년 해방 이후 60년... 수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피를 흘렸음에도 어쩌다가 이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을까?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이 책은 지난 60년의 현대 한국정치를 소재로 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구조, 변화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 한국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초기 형성조건과 제약, 그리고 이후의 사태 전개와 변화를 살펴본 후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저자는 "민주화 이전에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좁은 관점으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기는커녕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정의하는 첫 번째 부분에서는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안락한 보수주의에 젖어 있는 시대 상황을 비판한다.
두 번째 부분은 한국 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변화에 비해 보수화되고 정치 계급의 일상사로 고착된 현실의 역사적, 구조적 기원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세 번째 부분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경험을 다룬다. ‘왜 한국의 국가는 강력한 데 정부는 무력한가’, ‘IMF의 경험과 시장 개혁은 한국 민주주의에 무엇을 남겼는가’, ‘시민사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검토한다.
네 번째 부분은 이 책의 결론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현재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위기의 본질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대표하여 대안을 조직함으로써, 한편으로 대중참여의 기반을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정치는 투표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지면서 대중들의 정치참여에 위기를 가져왔다. 그 이유는 매우 협소한 이념적 대표체제, 사실상 극우와 보수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에 있다. 즉, 보수독점 정치체제이다. 그 결과는 계급구조화가 심화되고 중산층 중심의 사회가 해체되고 있으며 교육의 양극화, 지방의 배제와 서울로의 초집중화라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보수적 민주주의가 태동한 기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해방 후 국제냉전과 남북분단, 이념대립과 전쟁과 남북대치 상황에 근거한다. 그 과정에서 권력의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졌고 관료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이념적으로 협소한 정당체제가 구조화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보수정당 구조는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시작하여 양분되었다. 이승만의 정당은 대한독립촉성회 -> 대한국민당 -> 자유당 -> 민주공화당 ->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로 이어졌고 한민당은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민주당 -> 신민당 -> 민주한국당 -> 신한민주당, 민주한국당 ->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 민주당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 민주당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두 개의 정당의 역사는 협소한 이념, 즉 냉전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우익,보수정당끼리 경쟁하는 구도라 정착되어 버렸다.
저자는 현대 한국 정치사 60년을 관류하는 어떤 특징적인 요소, 다시 말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어떤 구조적 특성을 ‘보수적 민주화’로 정의한다. 이는 한국의 국가 형성과 산업화, 민주화에 이르는 거시적 변화를 ‘수동 혁명’ 또는 ‘위로부터의 혁명’, ‘보수적 근대화’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보수적 민주화’는 이러한 테제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민주화 이후에 우리의 경험을 보다 잘 포착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한국 민주화 과정의 특징을 ‘조숙한 민주주의’(주체역량이 미숙한 가운데), ‘운동에 의한 민주화’(6월 항쟁), ‘협약에 의한 민주화’(87년 헌법체계) 등의 개념으로 특징화했다. 이러한 개념들은 강한 냉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재벌이 지배하는 경제구조, 거대한 국가 관료제 등 권위주의에 친화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 체제가 구시대의 이념적인 틀에 얽매여' 있음으로 인해 '탈냉전과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문제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시야와 언어를 요구하는 데 반해 한국 정당 체제의 틀과 언어는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는 낙관과 비관이 교차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유권자 지지 시장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보수적 현상 유지에 편향되어 있는 유권자로서 기존 보수 양당 체제에 의해 대표된 지지 시장이다. 이 유권자 지지 시장은 권위주의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과거형 지지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의 양대 보수정당은 바로 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기존 정당 체제에 의해 대표되지 않고 있는 유권자 지지 시장이다. 이곳의 유권자들은 기존 정당 체제에 비판적이며 강한 변화 지향적 정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과거형 지지 시장과는 다르다.
매 선거마다 사실상의 제1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투표 불참자의 규모가 보여 주듯이 이들 유권자 지지 시장은 과거형 지지 시장을 압도하는 크기로 발전했다. 이 영역의 유권자는 기존 정당들에 의해 대표되지 않지만, 노무현 현상이나 촛불 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뭔가 변화의 가능성이 나타날 때 그 존재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저자는 한국의 정당 체제가 이들의 요구가 대표될 수 있도록 변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 보수성과 협애함을 극복하는 것이 최대 과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고 기존 정당들이 현재의 상태에 안주할 때 정당 체제의 불안정은 계속될 것이며, 동시에 현 정당 체제에 대한 투표자의 비판적 저항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의 보수 편향적 정당 체제가 쉽게 변화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파생 정당과 보수 야당으로 구성된 한국 정치의 초기 질서, 즉 냉전 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보수 편향적 양당 체제는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진단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정당 체제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겠지만 그러나 현실의 정치 세계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정치 세력이 지배적이며, 보수적 민주주의의 틀을 깨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대안이 출현할 가능성은 여전히 미약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보수 편향적 정당 체제는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 세력들 사이의 분화와 재편을 통해 협소한 엘리트 구성 내부에서 권력이 폐쇄적으로 순환되는 기존의 구조를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결론에서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를 위해 좀 더 근본적이고, 동시에 다소 장기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한편으로 저자는 유권자의 선택을 대안 배제의 상황 혹은 차선의 전략적 결정 상황으로 내모는 제도적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현재와 같은 제도적 환경하에서는 정당과 정치 엘리트로 하여금 보수적 경쟁에 몰두하는 것 이외에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도록 책임성을 부과할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정치 엘리트들은 끊임없이 사회를 무시하며, 사회 역시 정치 엘리트들을 무시하게 된다. '그것은 정치를 조롱하면서 이런 정치를 정당화하는 들러리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투표율의 하락은 대안이 억압되어 있는 유권자의 절망적 항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프랑스식 결선투표제'나 비례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의 선거제도 개편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저자는 우리 사회의 민주 세력이 좀 더 현실주의적인 가치를 중시 여기는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민주 세력의 지나친 도덕주의와 도식적 이념의 과잉은 현실적 대안을 조직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끊임없는 사변적 논의만을 양산하다가 급기야 현실에 절망하여 초현실적인 외국 이론들에 무비판적으로 심취하거나 문제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문제를 개인 내면의 문제로 해체해 버리는 등의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운동 세력의 이러한 문제들은 냉전 반공주의의 거울이미지 같은 것으로, 운동이 자율적 기초와 대안적 이념의 기반을 갖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저자는 내면세계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냉전 반공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총체적 인간’을 강요하는 과도한 집단주의가 운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적 기초가 보다 튼튼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 책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를 설명하는 기존의 여러 접근과 논의들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적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주류 언론의 정치관과 민주주의관, 그리고 지식인들의 안일한 보수주의, 나아가 이성적 비판과 논쟁이 존재하지 않는 지식인 사회의 현실은, 한국 민주주의를 내용적, 질적 측면에서 저발전과 쇠퇴의 경로로 몰고 가는 핵심적 요인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금 우리는 권위주의와 접맥되었던 냉전 반공주의, 온정주의와 가부장주의, 관료적 권위주의, 기술관료주의, 시장근본주의 등 민주주의의 기반을 잠식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힘, 조류들과 대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민주화를 가져왔던 강력한 운동의 힘은 대체로 해체되거나 약화된 상태이다.
따라서 저자는 "지배적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성적인 비판과 논쟁의 장이 개척되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한국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서구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적 이념과 가치를 통해 민주정치에 대한 가치와 규범, 이해와 논의가 보다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기초를 갖게 되기를 원한다.
책을 읽는 내내 '수구,우익과 보수로 이루어진 양당 보수독점 정당체제'라는 저자의 진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중앙집중화와 권력집중 현상을 막연하게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요소의 '서울 집중'이라는 개념보다 '전방위적 엘리트 권력독점과 초집중화'이라는 지적에 크게 공감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국토균형발전을 한다고 행정부와 공기업을 지방에 이전하고 기업도시,혁신도시를 지방에 육성한다는 참여정부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한 셈이다.
최근 나에게 '엘리트 권력독점'이라는 개념은 가장 큰 화두였다. 한국의 현실을 보더라도 수구와 우익을 대표하는 한나라당, 보수를 대표하는 민주통합당, 진보를 대표하는 통합진보당, 그리고 시민단체와 언론, 종교, 문화예술, 교육계, 행정관료 등 사회 전분야에서 어떤 이념을 대표하든, 어떤 계급계층의 이익을 대표하던 그 대표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대부분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교육 수준, 경제수준, 문화수준 등이 이미 심각하게 양극화되어 가는 와중에 모든 분야의 권력을 엘리트들이 독점하는 형국이다. 그러면서 90%의 비엘리트층과 소통하지도 않는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원리가 권위주의, 절대주의, 전체주의, 중앙집중을 해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다양화, 분권화, 참여, 직접정치, 분산화, 지방화 등을 의미할 것이다. 권력과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대표자들 역시 엘리트 독점에서 벗어나 구조적으로 중산층, 서민에게도 배정되어야 한다. 의식적이고 제도적으로 교육, 훈련을 거처서 스스로 자신들의 계급,계층을 대변할 수 있어야 만이 실질적인 분권화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2002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2005년 발간된 이 책이 재판에 해당되는데, 7년이나 지난 2012년 현재 시점에서도 저자의 분석과 진단, 비판과 대안 제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처지가 암담할 뿐이다.
* 참고할 만한 문구
- [1987년 운동권에 대한 평가]
"1987년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극대화하고 정당성이 약한 정권의 약점을 최대한 노출시키면서 한대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권의 강권력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거리에서의 투쟁을 중심적 수잔으로 한다. 그러나 민주적 개방은 그동안 폐쇄되었거나 제약되었던 선거공간의 개방을 의미한다. 선거를 위한 전문직업 집단이자 조직이 바로 정당이고 그 전문가 집단이 구체제로부터 일정한 명망을 갖는 직업적 정치엘리트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의 무게심이 일순간 거리에서 선거공간으로 이동하면서 힘의 중심은 일거에 운동으로부터 기존의 정당으로 이동한다. 민주화를 가져온 일등공신인 운동 집단들은, 민주화라는 한 가지의 대의와 투쟁목표가 일차적으로 성취되면서부터, 이제 민주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내용의 민주화를 추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급속한 분열을 맞게 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정초선거가 될 1987년 12월 대선에서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할 것인가를 둘러싼 분열만큼 운동권이 제도권 야당에 종속되는 '관계의 역전'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후보단일화', '비판적 지지', '독자후보'로 불리는 운동권의 분열은 운동권의 약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애당초 '독자후보'가 당선가능성이 높거나 운동권을 대표하여 정치세력화의 강력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대문에 논외로 치더라도, '후보단일화'와 '비판적 지지'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는 운동권 스스로가 정당을 통해 정치 세력화하고 대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운동권이 정치적 엘리트 수준에서의 호남 대 반호남이라는 지역대결구도를 저지할 만큼 강한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반대로 그 구도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운동권이 선거경쟁의 공간에서 독립적인 중심으로 서지 못하고 구정치 엘리트들의 종속변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운동의 약함이 한국민주주의의 구조적 제약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운동의 주체적 역량과 관련된 것으로, 무엇보다 민주화 과정에서 운동이 어떤 대안적 이념과 비전을 발전시키고 이를 공유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운동권이 지녔던 이념은 대체로 사회주의나 급진적 민족주의처럼 도식적이고, 낭만적이고, 교리적이고, 비경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강력한 군부독재와의 투쟁 속에서 그들은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이론에서 투쟁의 무기를 발견하려 하였다.
운동권의 이러한 이념적 급진성은 선거경쟁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함께 선거불참여주의적 경향 또는 선거에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념적 급진성은 운동권 내에서의 분파주의를 강화하고,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현실을 경험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낳았으며, 무엇보다도 정치 세력화에 장애요인이 되어 기존의 보수적 정당들과는 다른 대안적 이념과 비전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했다. 다시 말해 운동권의 이념적 급진성은 운동권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의 반영이었다. 그 결과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게 되자 운동권은 독립적 위치를 상실하고 기존의 제도권 야당의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해체되고 말았다."
- ?"생활수준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게 중요한 외형지상주의 사회, '부자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되는 금전만는주의 사회는 노동을 천시하게 만드는 노동배제적 정치체제의 결과이자, 이런 정치체제를 만들고 획일주의와 상층이동의 과열을 만든 냉전반공주의의 병리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독립적 위치를 상실하고 기존의 제도권 야당의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해체되고 말았다."
[ 2012년 1월 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