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개척한 인문학자 고미숙씨의 최근 신간으로 고미숙씨를 초빙하여 공부모임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다(하지만 나는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ㅠ)
 
저자는 자신의 몸이 크게 아프개 되면서 자신의 관심을 병과 몸으로 돌렸다고 한다. 그녀가 40대 초반이던 어느 날 그녀의 몸 속에는 생활하기 불편할 정도로 종양이 자라났다. 국내 최고의 종합병원에 같더니 온갖 검사를 마친 후에 의사가 하는 말이 "수술해야 잘라내새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수술도 하기 싫었고  수술 후에 입원실에 오랫동안 누워있어야 한다는게 싫어 수술을 포기했다. 그후 그녀는 등산을 하고 요가를 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병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한다. "그동안 그만큼 나는 무지했고 또 게을렀다. 그러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대충 살 만했기 때문이다. 계급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웬만큼 살 만한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고 볼 기회를 놓인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보게'된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선배가 한 명 있다. 그분은 천성이 척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2000년대 초부터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풀리지가 않았다. 사업을 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망으로 꾸준하고 책을 읽고 클래식을 감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애주가였다. 사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의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자리가 있었고 나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간에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고 의사로부터 여러번 경고도 받았다. 하지만 술을 매개로 한 생활, 업무 스트레스는 줄어들지 않았고 급기야 간에 작은 종양이 나타났고 한 차례 수술했다. 수술 후에 술의 양을 줄이기는 했지만 횟수는 줄지않았고 급기야 조금 시간이 지나자 횟수마저 과거로 돌아갔다. 또 다시 병원을 찾은 선배는 종양이 재발했고 조금 더 심각해진다 것을 알았다. 의사와 주변의 권유에 따라 간의 대부분을 잘라내고 다른 이의 간을 이식하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대수술 후 아직까지 큰 후유증은 없었으나 선배의 생활을 철저하게 '환자'로 관리된다. 매일 먹는 약과 면역억제제에서부터 먹거리, 행동반경에 이르기까지... 면역억제제는 평생 먹어야 한다.
 
고미숙씨와 나의 선배...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갑작스러운 종양의 발견으로 인생의 기로에 섰으나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하였고 지금은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 한 사람은 '앎의 주체'에서 '자기 삶의 치유자'로, 다른 한 사람은 남은 인생을 '환자'의 삶으로...
물론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반드시 몸이 아프냐, 그렇지 아니냐를 기준으로 하여 극단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건강 말고도 직업, 비전, 가치, 그리고 가족, 사람관계 등 삶의 질을 가르는 많은 영역도 있고 누구나 상대방보다 더 나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과 병, 생활습관, 특정한 계기에 대한 태도와 선택, 앎과 인식체계 등에 있어서 사람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노력하는가에 따라 적어도 건강과 치유에 대한 전체적인 방향이 크게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자신의 병을 통해 병에 대한 앎의 주체로 나선지 10년쯤 지난 시점에 저자가 동의보감을 공부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펴낸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근현대 100년을 거쳐 수 천년 동안 이어져왔던 동양적 인식체계와 문화를 대부분 버리고(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서구의 것에 익숙해져 왔다. 우리 역시 서구인들처럼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삶과 죽음, 부자와 빈자, 항복과 불행, 건강과 병, 발전과 후퇴 등 이분법적인 사고구조에 익숙해져 있고 분석과 해체, 나누기와 가르기, 전체보다는 부분에 강한 문화가 자리잡았고 모든 문화적인 요소에 자본과 비즈니스가 결합되어 있다.
건강이나 차유(의학)도 마찬가지인데, 서양의학은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이자 자연과 소통하는 주체로 인색하지 못하고 개별 장기, 조직, 세포로 나누어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저자 고미숙씨의 이 책에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담론의 차이에 주목하며, 이 차이에 의해 한쪽은 몸과 인생, 그리고 우주로 연결되는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으며, 다른 한쪽은 삶에 필수적인 질병과 죽음을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성찰과 연구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다고 말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명할 때 내린 당부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듯이(“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p.39)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니다. <동의보감>의 탄생 자체가 삶의 방식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고, 모두가 그 지식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런 <동의보감>의 취지를 더 밀고 나가 이렇게 주장한다. “내 안의 치유본능을 깨워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자!”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동의보감>을 8개 장으로 나누어 독특하게 설명한다.
1장 허준, 거인의 무당을 탄 자연철학자. 임진왜란으로 유배지까지 허준이 <동의보감>을 펴낸 과정을 담았고 책 속의 키워드가 분류, 양생, 용법이란 점, 그리고 <황제내경>에서 <금원사대기>까지 동양의학의 '거인'들을 어떻게 책 곳에 흡수해 냈는지 설명한다.
2장 의학, 글쓰기를 만나다 : 이야기와 리듬. <동의보감> 속에 담긴 의학적 내용과 민담을 소개하면서 의사는 연출가에게 임상실험 리얼타임 예능이을 주장한다.
3장 정(精), 기(氣),신(神)  : 내 안의 자연 혹은 아바타. 몸과 우주가 화려한 대칭의 향연임을 주장하면서 정(精), 기(氣),신(神)이 어떻게 동양의학에 반영되어 있는지, 인체와 존재와 우주를 어떻게 다루는지 설명한다. 아파야 산다.
4장 '통하였느냐' : 양생술과 쾌락의 활용. 양생의 척도는 태과와 불급 넘어야하며, 정을 보호하고 기(氣)를 보호하며 신을 보호하여 한다는 허준의 명제를 설명한다. 여기서 저자는 정(精)은 애로스와 도, 기(氣)는 자금력과 소통의 윤리, 신(神)은 존재의 절대적 탈영토화로 해석한다.
5장 몸, 타자들의 공동체 : 꿈에서 똥까지.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꿈은 사라져라 하며 몸 속의 벌레와 똥오줌은 안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6장 오장육부, 그 마법의 사중주. 오장육부는 사람 몸 속의 '사계()'이다. 상생과 상극, 수승화강과 음허화동, 일정의 파노라마, 음향과 기억, 얼굴의 일곱개 창을 통해 동양의학의 구성채계를 설명한다.
7장 병과 약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병이라고 무엇이고 욕이란 무엇인지,  아프다는 갓과 처방의 의미를 설명한다.
8장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임신과 탄생은 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자궁, 폐경, 양생 등 여성들의 몸에 대한 귀중함을 말한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다”는 표현은, 동양의학의 사유체계가 어떤 땅에 발 딛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 준다.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우주(자연)와 인간의 신체는 연결되어 있다. 산업화된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에서는 마치 사회의 전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듯, 자연과 신체도 분리된 ‘개체’로 여긴다. 그렇기에 우리 신체의 각 부분도 기능별로 분화하고, 또 의학의 체계도 그렇게 짜여 있다(소화기, 순환기, 내분비, 비뇨기 등).
서양 근대철학의 시작이 ‘의심할 수 없는 나’인 것과 지금의 서양의학 담론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개체에 대한 탐구, 그것은 서양 근대에 제반 분야에서 모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서양에서는 해부학이 발전했던 것이다.
드라마 ?허준?(원작 소설 <동의보감>)에서 가장 문제가 된 장면은 바로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듯한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지금까지 많은 동양의학 전문가들이 이야기한 바 있듯이, 이것은 서양의학적 지식에 기반한 상상이다.
동양의학에서의 몸은 가르고 절개해서 보이는 해부학적 신체가 아니라 정(精), 기(氣), 신(神)이 접속하고 변이하는, 자연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는 의도적으로 해부를 무시했던 것이다.

또한 서양의학에서는 감정을 뇌와 연결시켜 말하지만, <동의보감>을 비롯한 동양의학에서는 놀랍게도 오장육부와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 기쁨을 주관하는 것은 심장이고, 슬픔을 주관하는 것은 폐이며, 화(분노)를 주관하는 것은 간이다. 실제 <동의보감>에는 상사병으로 밥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여인에게 화를 내게 해서 뭉친 기를 풀어 주는 치법(治法) 사례부터 이와 유사한 예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저자는 이처럼 몸과 우주에 대한 시선에서부터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이 책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체에 대한 서양의 담론을 짚어 가며, 동양의학 담론의 특이성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양의학의 우수함이 아니다. 서양담론의 배치가 전문가들에게 의학의 영역을 넘겨주어 자기 몸과 감정을 들여다볼 계기 자체를 차단한다면, 동양의 담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몸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지금 누구보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지혜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 또는 서로 절대적인 문제일까? 저자는 질병과 죽음을 빼고 나면 삶이 너무 왜소해진다고, 아니, 그걸 빼고는 삶이라고 할 게 없다고 말한다. “태어난 이상 누구든 아프다. 아프니까 태어난다.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곧 아픔이다. 또 살아가면서 온갖 병을 앓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의 마디를 넘어가는 과정이다.”(p.429) 삶의 풍요로움은, 이 병과 죽음을 어떻게 끌어안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기 시작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어느 과(내과, 외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등등)에 갈 것인지만 잠시 생각한 후 이후의 과정은 전문가에게 맡겨 버린다. 그리고 처방을 받으면 고쳐지겠거니 생각한다. 이 병이 왜 생긴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도 자신의 경험을 들어 말한다. 자기 몸에, 자기 병에 너무나 무지하고 게을렀다고, 말이다. 왜 우리는 우리 몸인데도, 우리 몸을 고치는 건 오로지 전문가들의 몫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을까? 게다가 그 병은 우리 삶 자체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삶의 정말 중요한 부분, 내가 변할 수 있는 마디를 남의 손에 넘기는 것과 같다. 마치 수능 전문가들에게 내가 원서를 넣은 학교와 전공의 선택까지 다 맡겨 버리고, 좋은 결과만을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학교에서 그 전공으로 사는 것은 ‘나’인데도 말이다. 
저자의 이 고민은 이반 일리히의 문제의식과 동일해 보인다. 일리히의 그의 저작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현대 의학과 병원신세를 문제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정도의 수동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양의학과 병원의 건강과 치유에 대한 제도적 독점"으로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일리히의 논점을 다르지만 몸과 건강, 병에 대한 궁극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정의와 복지국가의 차원에서 의료의 독점을 막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는 의료의 수요자인 개개인들이 건강의 주체로, 자기 몸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방향이라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우리 모두가 의학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병원을 이용하지 말자는 뜻인 것도 당연히 아니다. 병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서, 최소한 병을 만난(이 병을 불러온) 내 삶에 대해 생각하며, 병원을 다니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병을 재빨리 치워버려야 할 어떤 것으로만 보는 데서 벗어나, 왜 이런 병이 오는지, 이것으로 내 감정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하기 위해서” 내가 꾸려야 할 일상은 어떤 것인지, 보고, 느끼고, 공부하자는 것이다. 환절기마다 재채기와 콧물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앎에 대한 열정’으로 나아가 보자는 것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질병과 함께하고 되고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면 질병도 죽음도 내 삶 속에서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프다는 것은 내 몸 속의 조화가 깨어졌거나 내 몸에 연관된 외부세계와의 조화가 깨어진 것이라는 인식은 내 몸안의 여러 존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지나고 외부의 세계, 즉 물과 공기와 흙과 불,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계하도록 마음먹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질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살면서 사람들과의 아픔과 번뇌와 갈등, 해어짐 역시 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내가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변해야 하는건 무엇일까?
 
* 책 속의 문장
- 언급한대로 허준의 독창성은 분류학에 있다, 특히 가장 두드러진 건 '5편 106문 목차'다. "내경편,외형편,잡병편,탕액편,침구편 등 다섯 가지 큰 묶음은 우리에게는 별로 낯설지 않은 구성이 아니다, 조선에서는 <동의보감>이 나온 이후 그렇게 의학을 보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때문이다. 너무나 익숙하다고 보니 우리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흐름에서 얼마나 이색적인 것인지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다섯 편으로 나누어 살피던 예는 이전에 결코 없었다," (p,57)

- 끝으로 <동의보감>에서 사계절에 맞추어 사는, 평생의 양생법으로 권하는 생활수칙을 소개한다. “하루의 금기는 저녁에 포식하지 않는 것이고, 한 달의 금기는 그믐에 만취하지 않는 것이고, 일 년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여행하지 않는 것이고, 평생의 금기는 밤에 불을 켜고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p.163 / <동의보감> ?내경편?에서)

- 오늘날 안채의 가능은 수백만 년 동안 감염인자와 주고받은 상호작용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감각에서 외모, 혈액 화학작용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것은 질병에 대한 진화 반응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심지어 성적 매력까지 질병에 대한 진화 반응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의 향기는 왜 그렇게 매혹적일까? 그것은 그 사람과 나의 면역 시스템이 다르다는 표시이다. 면역 시스템이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부모에 비해 더 광범위한 면역력을 갖춘다, (p.186 샤론 모알렘 <아파야 산다>)

-  "음양의 이치상, 기쁨은 발산하는 양기다. 슬픔은 침잠하는 음기이고. 그래서 전자는 쉽게 잊혀지고 슬픔은 오래 간다. 복은 내탓이고 화는 남의 탓이 되는 것도 이런 원리다. 사랑의 기쁨은 산산이 흩어지지만, 사랑의 아픔은 천년이 지나도록 절대 잊혀지지 않아야 하는 것도 이런 법칙의 산물이다. …… 특히 현대인들은 그 임계점을 넘어 버렸다. 쇼와 이벤트에 길들여지다 보면 기쁨은 더 이상 쾌락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들의 성향은 업!되지 않으면 다운된다. ……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구조가 심화되면 어떤 일을 겪어도 상처가 되어 버린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는 감정의 회로가 기억이라고 했다. 자의식이라는 구조와 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 이런 조건이라면 어떤 사람도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기 마련이다. 암과 우울증, 그리고 자의식. 이것이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삼종세트다. 이런 몸으론 외부와 부딪힐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된다." (p.265)
 
[ 2012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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