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의 나라
강준만 / 개마고원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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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모가 어떤 직업을 가졌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자식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대학입시 때문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자신의 아이가 어려서부터 공부실력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면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들어가 상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안학교나 특수학교를 찾는다. 어떤 경우든 공교육, 사교육비는 엄청나게 들어가고 부모들은 초긴장이 된다. 부모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따라서는 부부싸움이 다반사로 벌어지기도 하고 선후배, 지인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성적과 학벌에 은근히 신경쓰게 된다.
 
대학입시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전쟁이다. 이 전쟁에는 아이들, 부모들 뿐 아니라 전국의 이해관계자들이 다 동원되고 관심을 쏟는다. 보습학원, 입시학원 뿐 아니라 학교, 교육청, 대학, 언론, 기업까지 끼어든다. 사교육은 이제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역대 정부의 교육정책 실패와 언론과 학원의 돈벌이 유착, 학부모들의 '출세만능주의'가 더해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내내 공교육이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가지 책을 읽다가 결국 대학입시가 그 근원적 뿌리임을 알게 되었고 강준만 교수의 <입시전쟁잔혹사>(인물과사상사, 2009)를 읽었다. 사회 주요 분야의 SKY 독과점이 대학입시전쟁의 원흉이고 학연주의와 학벌주의가 그 기둥이라는 주장이다. 나 역시 숱하게 주변에서 겪은 바이기 때문에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 '서울대 독점'은 그 폐해가 너무나 크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정치경제 범죄를 일으키는 인물들 중 적지 않은 비율이 서울대 출신이다. 그 무도덕성, 비도덕성이나 파렴치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판검사들의 부정과 비리, 언론사의 치졸함과 부정부패, 정치권 인사들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정부패, 교수들의 무능과 부정... 서울대를 포함한 SKY이 정계, 재계, 관계, 언론계, 학계, 문화계 등을 장악한 비율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비율로 그들의 부정과 비리가 드러나곤 한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서울대 졸업자들의 상당수는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 도덕성이나 성실성과 상관없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그 이유는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 곳곳에서 주요 요직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보지 않는다. 오로지 출신 대학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대 출신은 뭔가 다르다"라는 희한한 우월의식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편견에는 학생운동이나 시민운동의 경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내 경우에 서울대 출신의 운동권이 더 심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서울대'가 무엇이 문제인가?
 
1995년(?) '서울대특별법'이 사회적 의제로 등장되면서 서울대 망국론, 폐교론, 옹호론 등이 교차했다. 그 논쟁의 한 당사자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에서 '서울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서울대 비판서가 아니다. '입시전쟁'으로 상징되는 우리 교육의 왜곡과 굴절과 파행을 서울대란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것이다. '간판제일주의'와 '학연만능주의'를 뿌리로 하여 서울대가 우리 교육 현실에서 갖는 구조적 폐해를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면, 사실상 어떠한 교육개혁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많은 자료를 토대로 입증해내고 있다. 따라서 서울대 문제는 서울대학교 당국의 문제거나 서울대 출신들만의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저자는 단과대학별, 학과별로 수많은 '서울대'를 키워내자는 대학별 특성화와 서울대 정원을 축소시켜 '소수정예'를 만들자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는 결코 '기계적 평등주의'가 아니라 서울대의 주장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진정한 의미의 '경쟁' 부활이라고 말한다.
그는 '간판' 하나로 모든 분야를 독식하려는 서울대 패권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진단한다. 서울대가 진정으로 나라를 생각하면서 학문의 국제경쟁력을 염려했다면, '서울대특별법'이 아니라 '대학 경쟁력 강화 특별법'을 제안했어야 옳았다고 주장한다.

서울대는 한국판 '싹쓸이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일종의 문화현상이다. 모든 부문에서 서울대만이 최고이고 최고여야 한다는 그 독선과 오만의 뿌리에는 '간판제일주의'와 '학연만능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서울대는 '대학입시 전쟁' 격화의 한 주범일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서울대가 갖는 이러한 의미를 꿰뚫어보지 않고서는 사실상 어떠한 교육개혁도 불가능하다.

'서울대 특별대우가 곧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어처구니 없는, 비합리적인 서울대학측의 주장은 공허하다. 엘리트로서의 책임은 지지 않은 채 권리만은 누리면서, 연줄에 기초한 기존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서울대특별법'. 그 발상의 명분이 되고 있는 국제경쟁력은 사실상 허구에 불과하다. 연줄은 내수용이지 결코 수출용이 아니다. 단과대학별로, 학과별로 수많은 명문대학을 키워내는 '대학별 특성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경쟁 부활을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 방안인 것이다.

무한 팽창과 마구잡이 독식에 탐닉하는 서울대의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다.허구에 찬 '실력사회' 논리를 방패삼아 학연*학벌주의에 바탕한 기득권을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호도하는 '서울대특별법'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공정 경쟁'을 가로막는 패권주의적 발상에 다름아니다.
 
서울대를 졸업한 한 사람으로써 창피하고 부끄럽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 인상적인 글 :
"서울대는 문화적 현상이다. 그건 논리와 이성으로 격파될 수 없다.
아무리 포항공대의 교육시설과 교수진이 좋아도 서울대라고 하는 괴물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연고대가 대학 특성화를 앞세워 아무리 발버둥쳐도 연고대는 영원히 서울대의 '밥'이다.
서울대가 그렇게 대단한 대학이라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학벌주의와 학연주의가 판을 치는 이 한국사회에서 서울대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서울대는 '서울대특별법'을 만들어 서울대의 기존 지위를 더욱 강화하겠댄다.
한국의 정,재,관계를 비롯해 언론계와 교육계까지 서울대 출신이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밀어붙이면 그런 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만, 기존의 '교육파시즘' 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서울대만 잘 되면 ...
뭐 하나?
하기야 서울대특별법을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교육 파시즘의 가장 확실한 증거에 다름 아니다.

서울대 사람들은 서울대특별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나친 평등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한다.(정말??)
그러나 내가 서울대특별법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서울대 위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이유는 엘리트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가치는 인정되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한 사회의 엘리트는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 동시에 그 특권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엘리트는 안목이 넓어야 한다. 사회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극악스러운 대학입시 전쟁은 완화되어야 하며 학벌주의와 학연주의도 극복되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사회의 진정한 엘리트라면, 그리고 그 엘리트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그런대 서울대는 무슨 고민을 했는가?
서울대특별법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그런 문제들에 대한 무슨 말을 했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울대 사람들은 단지 국가경쟁력만을 말했을 뿐이다.
이 놀라운 단순성! 이들이 정년 이 나라의 엘리트란 말인가?

누가 우리 대학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에 반대하겠는가?
문제는 서울대가 오직 서울대를 키우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는 데에 있다.
'이름'만 빼고는 포항공대는 서울공대보다 월등히 낫다. 포항공대를 키우면 나라가 망하나?
지난 10년간 공인회계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은 연세대다. 연세대 경영대학을 키우면 나라가 망하나?
농업 관련 분야의 학문은 농대까지 서울로 끌어들이는 서울대보다는 농업지역의 대학에서 꽃을 피우는 게 제 격이다. 어느 지방대학 농대를 키우면 나라가 망하나?
모든 걸 서울대가 도맡아야 나라가 잘된다니, 세상에 그런 오만과 독선이 어디 있는가!

서울대가 진정으로 이 나라를 생각하면서 학문의 국제경쟁력을 염려했다면, 몇 가지 분야만을 선택했어야 옳았다.
요컨대, 대학별 특성화를 전제로 한 '대학 경쟁력 강화 특별법'을 제안했어야 옳았단 말이다."(p.17)
 
[ 2012년 5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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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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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에서 교육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고 어떤 연유로 인하여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에 몰렸는지, 그리고 교육문제의 근본적인 사회적, 역사적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지 관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책과 의견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기정씨의 저작을 통해 사교육 현황과 중고등학교에서 가능한 제도적 해결법을 검토하고 박재원씨가 발간한 책을 통해 '쇼욱 선진국'이라 불리는 핀란드의 교육제도와 시스템, 문화를 구경했다. 교육문제 해법이 하루이틀에 사회적으로 합의되거나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당장 각 가정에서 부모들과 학생들이 실행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방법론도 알아보았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고전적인 교육론도 다시금 읽어보고...

교육문제에 관련한 책을 몇 권 읽는다고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발생하고 이어져 온 교육문제의 해법을 발견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고 초,중,고교의 교육현실이 대학교육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느껴지는 바이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생각한다. 하나는 대학문제고 또 하나는 해결방식이다. 대학교육 문제는 사회 전체 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구축되는 현상이니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여 합리적인 대안을 도출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육문제는 절대로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강준만 교수가 한국의 교육문제에 대해 몇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을 가장 먼저 선택했다. 강교수가 자신의 전공인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한국 교육문제의 가장 핵심 화두인 '입시전쟁'을 역사적으로 분석하였다는 것이 눈에 확 띄었다.
강준만 교수의 주장은 대한민국 교육문제의 핵심은 대학입시전쟁이고 그 원인은 'SKY 독점의 학벌사회'다. 그는 조선시대 봉건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간 후 일제시대, 해방후,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입시전쟁의 역사(잔혹사)를 분석한 후 역사적이고 뿌리깊은 교육문제와 그 핵심인 입시전쟁의 근원적 원인을 분석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한국에서의 '학벌사회'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음을 우리가 인정하면서 문제해결에 나서야 하며, '서울대 폐지' 등과 같은 기득권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는 방법이 아니라 SKY의 정원을 줄이는 '소수정예화'를 목표로 삼아 출발해야 함을 제시한다.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대학입시일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이날은 12년 공부의 결실을 보는 날이며, 한 인간의 평생 운명과 신분이 결정되는 무시무시한 '계급전쟁의 날'이다. 때문에 온 나라가 초긴장 살얼음판이다. 전국의 출근 시간이 늦어지고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고 내리지 못하며 버스와 전철, 택시 등이 총동원되고 경찰과 구급차가 출동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매년 뉴스를 통해 접하는 모습이지만, 오히려 우리도 직접 겪은 일이고 매년 반복되는 일이기에 그다지 ?게 생각하지 않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우스운 현상이라고 전해진다. 강교수는 학부모들과 국가 전체적으로 단합하여 발생하는 이런 '우스운' 현실의 무의식과 본능에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해마다 입시전쟁으로 인해 200여 명 이상의 아이들이 자살하고 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봐도 정부 당국이 발 벗고 나서야 함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교육정책의 변화와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보며 극과 극을 오가는 입시정책의 변화는 도리어 사태만 더욱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학력과 학벌의 경쟁 및 차별이 심화됐고 사교육비 증가를 가져왔다.

그런 무책임하고 무능한 교육정책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뿐 아니라 문민정부였던 김영삼에 이어 민주정부라 인정받았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온갖 데이터와 결과물은 그들의 정책이 학벌사회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뿌리는 어디인가?
해방 후 사람들은 일제하에서 친일을 했던 '대역 죄인'들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누리며 떵떵거리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친일, 부일 인사와 그 자녀들은 득세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자녀들은 여전히 헐벗고 가난한 현실, 자신의 바로 이웃이 학력과 학벌을 근거로 드라마틱하게 사회 지배층으로 등극하는 현실을 목도한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현실감각에 의해 해방에서 정부 수립까지의 3년간 국민학생은 136만 6천명에서 242만 6천명, 중학생은 8만 명에서 27만 8천명, 대학생은 7,800명에서 1947년에 1만 3천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거나 사회적 위계구조에서 상승 이동하는 기회를 잡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에서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그 지식과 기술은 학교교육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학력을 출세의 결정적 도구로 확신하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학력과 학벌은 방패 또는 면죄부로서의 기능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자녀들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갖가지 위협과 경제적 어려움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여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지만, 친일인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자녀들에게 학교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었으며 사회진출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친일·부일 인사들은 자녀들에게 높은 학력을 성취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경제적 특권을 후손들에게 대물림하였다."(p.70~72)

1950년대에 들어 출세는 학력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 속속들이 증명되었다. 논 팔고 밭 팔고 소 팔아서 대학을 나온 농부의 자식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대부분 고등실업자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대학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상아탑을 빗댄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은 60년대는 물론 70년대까지 유효했으며 사람들의 생각은 점차 '학력은 기본, 학벌이 좋아야 한다'는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국민학교'부터 1류, 2류, 3류라는 구분이 생기는가 하면 '초등학교 아동보건 이상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도에 넘치는 과외공부 열풍이 불었다. 그러나 대학교육 및 학교교육의 실상은 겉만 요란했지 내용이 없었다. 대학은 돈벌이 잘되는 '장사'감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잘 몰랐지만 1960년대는 과외와 사설학원이 왕성하게 시작된 첫 번째 시기였고 당시에 대학은 병역기피 수단이었고 사립대학들은 기부금 입학으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일류 대학 입학은 일류 고등학교 출신들이 거의 독식했기 때문에 경쟁은 중학교 입시 때부터 시작되었다. ... 명문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재수가 성행했다. ...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국민학교 과외수업도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 사설학원도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 [조선일보]1964년 8월 4일자에 따르면 '과외공부생들의 행렬은 날로 늘어만 가고 있어 사설학관의 단속문제와 과중한 학습에서 오는 어린이들의 건강문제 등 문교 당국의 효과있는 장학정책이 요청되고 있다.'"(p.111~112) 
"대학교육은 우선적으로 병역 기피의 수단이었다. … … 수많은 '대학 장사꾼'들이 생겨났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엉망진창이었다. 명문 사립대학인 연세대마저도 고액의 기부금을 낸 사람의 자녀들을 입학시키는 등 뒷구멍 입학이 난무했다."(p.108~109)

박정희는 쿠테타를 일으킨 후 정당성을 만듭답시고 외형적인 경제개발에만 치중하고 교육은 강압통치와 냉전의 도구로 사용할 뿐이었다. 
"박정희는 1977년 2월 4일 문교부 연두순시에서 '충효사상'을 교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문교부는 이 지시에 따라 2개월간 열심히 연구한 후 1977년 4월 '충효교육을 중심으로 한 도의교육의 강화 방안'을 마련하고 전 학교에서 실시하도록 했다. 각급 학교에서 요란하게 진행된 '충효교육'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정치,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충'이요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효'였다. 사실상 가족 중심의 학력·학벌주의를 국가정책으로 부추긴 셈이었으며, 이는 성공을 거두어 날이 갈수록 시민사회 영역의 학력, 학벌 차별은 심해졌다."(p.132~133)

전두환 역시 군사투테타로 집권한 이후 민심을 얻기 위해 30년간 썩을대로 썩은 교육문제에 손을 댔다. 당시 과외를 금지하고 고교 내신 반영, 본고사 폐지, 대학 졸업정원제 등을 실시했지만 근본적인 교육개혁에는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1979년 12ㆍ12 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집권한 신군부는 … … 과외 금지 및 대학의 졸업정원제를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7ㆍ30 교육개혁안'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론 그런 취지에서 단행된 것이었다.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을 발표하였다. … … 대학입시에 고교 내신성적의 반영, 대입 본고사 폐지, 고교교육과정의 축소, 대학 졸업정원제 도입, 대학입학 정원 확대, 교육방송 실시 등을 제시하였고, 사회정책으로는 불필요한 학력 제한 철폐와 학력간 임금격차의 점차적 축소 등과 같은 산업체 고용정책의 개선 등을 제시하였다."(p.145~146)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서부터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에 이르기까지 매 정권들은 교육문제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고 늘 수술 대상은 오직 입시제도 뿐이었다. 수술을 하는 자들은 늘 돌팔이 수준이었지만, 소신을 갖고 밀어붙이는 것도 늘 비슷했다. 
2001년부터 시작된 대입 수시모집의 특별전형 유형이 다양해지면서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전략적으로 수시 응시생들에게 각종 상과 경시대회 참여를 몰아주는가 하면 선행증[善行證]을 사실상 돈 주고 사다시피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2002년도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은 엄청난 사회적 분노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수험생들은 "특기와 적성만으로 대학갈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이해찬 교육정책'의 최대 피해자라며 울분을 쏟아냈다. 2005학년도 대입 요강은 더욱 복잡해져 2002년부턴 입시컨설팅 산업이 붐을 이루게 되었다. 대학입시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져 일선 학교에서 진학 상담을 해주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한국사회에서는 아무리 가정 살림살이가 어려워도 자녀 사교육비가 절대 줄지 않는다. 자식이 명문 대학을 나와야만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고, 출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에 의하면 한국의 중산층은 자녀 사교육과 명문대 학벌을 취득하기 위해 가처분소득 30% 가까이를 '입시산업'에 쏟아 붓는다고 한다. 너무 많은 돈을 조기교육이나 어학연수, 학원비, 과외비, 대학교육비에 지출하다보니 내수시장이 궁핍해지고 내수를 기반으로 하는 중소기업이 말라죽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대학생 양산과 입시경쟁에서 기인한 실업률 증가와 출산률 저하 현상이다. 경제 악화에 따른 이유도 있지만, 괜찮은 일자리를 두고 벌이는 학벌경쟁의 심화는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입시전쟁을 더욱 격화시킨다. 2세를 낳지 않는 젊은 부부의 등장도 이 같은 맥락에 있다. 시원찮은 돈벌이에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자식교육을 시키겠냐며, 아이 낳기가 두렵다는 그들의 항변은 서민경제 살리기 포인트가 바로 교육개혁임을 알게 한다. 

더 나아가 SKY 출신의 사회요직 독과점은 한국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교육 과잉과 입시전쟁의 주범이다. 나중엔 어떻게 될망정 자녀를 둔 학부모는 일단 SKY를 목표로 하는 사교육비 지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12월 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가 전주에 거주하는 20~40대 여성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교육비 무서워 자녀 못 낳는다"고 답한 사람이 42.1%로 나타났다. 2006년
6월 한 조사에서도 중산층의 출산중단 이유 1위는 교육비 부담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언론의 수준은 참 한심하다. [중앙일보]는 "서두르지 않으면 나라가 저출산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이렇게 가다간 경제는 주저앉고 복지는 부도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랍다 못해 신기한 건 '국가경쟁력'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보수신문들이 입시전쟁과 출산율의 문제를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하는 '아메바'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대학입시를 신문광고비로 생각할 뿐이니 그들에게 무엇을 바랄까마는...

한국의 대학입시경쟁과 사교육 문제의 원인은 모두 '대학'이다SKY 출신이 우리 사회의 모든 요직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대학입시제도를 바꿔도 '입시전쟁'이라는 현실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즉  기존 학벌주의를 바꾸지 않고선 사교육비 부담완화와 고교교육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 특유의 입신출세 문화와 연고주의 문화가 결합돼 있기 때문에, 획기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한국의 입시문제를 해결해나기 위해서는 먼저 '학벌, 서열, 경쟁이 없는 사회는 이 지구상에 단 한곳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SKY 입학정원을 대폭 줄여 '소수정예화'하고, 사회 각 분야 엘리트들의 출신대학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 엘리트 구성의 다양화는 필연적으로 '패자부활'이라는 풍토를 조성할 것이다. 또, 대학입시에 집중되는 경쟁의 병목현상을 깨고, 중등교육 정상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주요 '언론사 간부들의 SKY 출신 점유율'을 제시하며, [한겨레]를 비롯한 각 언론사들이 학벌주의를 긍정하는 보도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2003년 6월을 기준으로 한 '언론사 간부들의 SKY 출신 점유율'은 조선일보 90%, 동아일보 78.6%, 중앙일보 69.6%, 한겨레 57.7%, 경향신문 52.3%, 서울신문 54.8%)
SKY가 잘되는 건 곧 국익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그렇진 않다. 한국의 엘리트 시장에 있어서 SKY에 의한 기존 독과점 체제의 강화는 SKY의 이익엔 기여할 수 있을망정 대학입시 전쟁을 더욱 격화시켜 이미 충분히 피폐해진 모든 한국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다원적 경쟁체제'다. 대학의 기존 '고정 서열제'를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변동 서열제'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SKY가 기존의 문어발식 팽창주의를 지양하면서 소수정예주의로 내실화를 기해야 한다. 학벌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성에 차진 않겠지만, 방향이라도 제대로 잡자는 뜻에서 SKY 소수정예화 방안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이는 입시전쟁과 사교육 문제가 교육정책 때문 만에 형성된 것도 아니고 교육정책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식해야한다 장기적인 문화개혁을 추진하려면 기존 학벌 엘리트의 행태를 사교육 문제와 연계시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처럼 미친 척하고 평준화 문제로 싸움만 하다 보면 '학원 공화국'은 우리의 영원한 숙명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회진화론'과 '진보적 근본주의'를 넘어선 '개혁적 리얼리스트'의 자세다.

강준만 교수는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진보주의자들마저 입시문제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입시전쟁으로 인한 민중의 피폐한 삶에 가장 신경을 쓴다고 하는 진보파들, 국민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입시문제의 본질과 현상을 잘못 보고 있으니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현재 보수주의자는 물론 진보주의자들까지 SKY의 정원을 대폭 줄이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거라며 '소수정예화'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SKY의 정원을 대폭 늘리면 경쟁이 약화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SKY에 저렇게 많이 들어가는데 SKY 못 나오면 더 죽는다'는 이유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도 있다. 
이에 저자는 '공정거래법' 개념을 입시문제에도 원용할 것을 주장하며, SKY 소수정예화에 벌벌 떨거나 엘리트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한다. 누구도 공정거래법 적용으로 일류 기업 입사경쟁이 치열해진다고 불평하거나 걱정하지 않으며, 아무리 평등을 추구해도 누군가는 대통령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도지사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나 역시 강준만 교수의 학벌사회 완화를 위한 'SKY 소수정예화' 전략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논의와 공감을 통해 공공기관과 공기업에서부터 SKY 독점을 완화하는 일종의 '독점방지제도'를 도입하여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서울대와 SKY 출신을 일정 비율 이하로 단계적으로 줄여나가는 방안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물론, 두 개의 방법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고 그 사이에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박재원의 핀란드식 교육제도와 이기정의 '학교개조론'을 위한 제도를 도입했으면 한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병행하여 추진해야만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치원 때부터라면 몰라도 고3이 되어서까지 "죽어도 SKY 아니면 안된다"는 사람은 어차피 극소수다. 그들의 자율 결정은 존중해주자. SKY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 3수, 아니 4수를 하더라도 장한 일이라고 격려해주자. 중요한 건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취하는 태도다. SKY의 독과점 파워가 약해지면서 대학 서열의 유동화가 일어나면 대학에 들어가서도 다시 한 번 경쟁해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주목해보는 게 옳지 않을까? 사회 각계 엘리트의 절대다수가 3개 대학에서 나오는 것과 30개 대학에서 나오는 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엘리트 충원 학교가 수적으로 대등한 수십 개 대학으로 늘어나면 서열 유동성이 생겨나게 되고, 대입전쟁의 열기를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분산시킬 수 있다."(p.310~311)

[ 2012년 5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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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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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거의 10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친구 두 명과 만나 저녁을 먹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는 일상을 돌아보면 친구들, 지인들을 충분히 연락하고 만날 수 있었음에도 나의 하루하루가 무엇이 그렇게 절실하고 중요했는지 허탈한 느낌이 들어 일부러 친구를 찾아보았고 어렵지 않게 연락처를 구했다. 친구 하나는 중견 걸설회사에서 현장 소장으로 근무하는 직장인이고 또 한 친구는 의류산업을 창업한지 4년 정도 되어 한창 열심히 사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적성을 찾아 꾸준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 반갑고 고마웠다.
다른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사들이 더러 있다. 치과나 신경외과 같은 전문분야든, 개업이나 월급쟁이냐의 의료인의 처지에 관계없이 의사로 살아가는 친구들은 적지않은 돈을 벌고 있는 대신 개인의 삶에서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산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가족의 생활비 때문에 일반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사무직,생산직,서비스직, 또는 소상공인보다는 소득 면에서 안정적이겠지만...

'의사'라는 고귀하고 명예로운 역할이 말 그대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으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다. 아니 황금만능과 약육강식이 판치는 우리 시대에는 그런 '고귀한 존재'라는 표현이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현재 의사로서 자신의 삶에 고민하는 이들과 장차 의사가 되고자 하거나 '가치 있는 삶'을 고민하는 아이들, 학생들을 위해 노먼 베쑨의 전기는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이들과 학생들이 아니라 우리 세대들도 꼭 한번은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그 이유는 노먼 베쑨의 인생역정이 우리 세대에게도 큰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닥터 노먼 베쑨의 20대와 30대는 아주 자유분망하고 한 편으로는 방탕한 생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36세에 당시(1926년) 불치병이라고 알려진 결핵에 걸려 삶을 포기하고 요양원에 입원하게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던 어느 날 그는 결핵을 치유할 수술방법(인공기흉술)을 스스로에게 시술하여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극적으로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고 44세에 결핵의 외과적 처치에 큰 업적을 남김과 동시에 보건의료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먼 베쑨은 46세에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1936년 당시 스페인은 만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공화국 정부를 군부 파시스트 프랑코 일당이 독일의 히틀러과 이탈리아의 무솔로니를 등에 업고 쿠테타를 일으켜 내전이 격화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히틀러와 무솔로니의 군사파시즘 야욕이 유럽 전역을 공포와 암흑으로 덮고 있음에도 서구국가들, 미국과 캐나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스페인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이동식 혈액은행'을 설립, 운영하여 전시 의료분야를 개척하고 수 많은 중상자를 살려냈다. 그는 스페인 내전 상황에서 2년간 활동하면서 전시 의료체계를 수립한 후 스페인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제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우는 중국 의료봉사대에 자원하였다. 그리고 18개월 후 중국 땅에서 수술 중 손가락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체 게바라와 살바도르 아예데와 같이 세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위인들 중 의학분야 출신, 또는 의사 출신이 여러 명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노먼 베쑨은 외과의사이면서도 발명가이고 의료정책가이면서도 휴머니스트이고 교사이면서도 혁명가였다.
그는 결핵의 수술적 치료법 개발 등으로 의학발전에 기여한 탁월한 흉부외과 의사이자 캐나다의 공중보건제도 확립에 앞장섰던 보건의료 운동가이며, 스페인의 반파쇼 투쟁,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과 항일투쟁의 최전선에서 종군의사로서 몸바쳐 싸웠던 혁명가이기도 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했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찬사 받을만 하다. 이 책은 비단 그의 전기뿐 아니라, 그가 생전에 남긴 회고담, 일기, 편지 등을 적절히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좇아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인간으로써의 노먼베쑨의 사실적인 모습을 접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은 전과 달리 매우 복잡다단해졌다. 이제 국가의 문제는 그 국가 속의, 또는 그 국가 주변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으며 세계적인 문제성을 지니게 되었다. 심지어 한 사람의 질병에서부터 한 민족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제대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인 대의에 참여하여 그것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닥터 노먼 베쑨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온 몸으로 실천한 인물인 것이다.

그는 특히 3개국에서 생활하고 투쟁했다. 첫째는 그이 조국 캐나다였으며, 둘째는 만국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암흑의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군집한 스페이었고, 셋째는 일본 군사 파시스트들이 득실거리는 중국 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기는 달랐다. 베쑨은 그가 가장 잘 아는 무기, 즉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무기로 투쟁에 참여했다. 뛰어난 흉부외과 의사였던 그는 의술을 단지 사람들의 질병만을 돌보는 것이 아닌, 몸의 질병과 사회의 질병을 통합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걸하는 것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 그는 몸의 질병과 사회의 질병이 함께 고쳐질 때에야 바로소 제대로 된 인술을 펼칠 수 있다고 믿었다.
베쑨은 전장의 와중에도 학생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최초로 혈액은행을 운영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부상별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대들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시오."라는 그의 가르침은 세계의 민중들에게 짐 지운 투쟁에 의사들 또한 일부로서 참여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내가 우리 세대들이 이 책을 꼭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베쑨의 삶이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의 의사로서의 능력, 보건의료인으로서의 자질, 반파시스트로서의 열정, 목숨을 건 혁명가로서의 그의 삶은 본받을 만 하다. 그의 삶과 열정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위대했다. 미래의 아이들에게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고 제시할 만한 그런 위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베쑨의 삶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그가 자유분망하고 부유한 의사로서의 삶에서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한 나이가 44였다는 것이다. 즉 이미 청춘도 지나고 열정도 사라지고 가족들을 위한 밥벌이에서 벗어나지 멋한 '한물간 세대'라고 자조하고 있는 우리 세대의 40대라는 나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누군가를 위해, 개인과 가족만을 위한 삶을 넘어서,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아니면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고 익히면서 살아갈 날이 아직도 창창하다는 것이다.

- 책 속의 문장 :

다시는 결코 메스를 들면서 그 어떤 생명체일지라도 단순한 기계적인 유기체로 취급하지 않으리라. 사람이란 꿈을 가진 존재다. 이제부터 나의 칼은 육체와 동시에 그 꿈을 구하리라.(베쑨의 '일기' 中)

나는 살인과 부패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그 모순을 묵과하기를 거부하오. 나는 우리가 소극적인 탓에 또는 태만한 탓에 탐욕스런 인간들이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소... 
스페인이나 중국이나 모두 다 같은 투쟁의 일부인 것이오. 내가 중국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곳이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오. 또한 나의 능력이 가장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오. -베쑨의 편지 中(p.341-342)


[ 2012년 5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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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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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인들의 부러움과 칭찬을 한 몸에 받는 북유럽 국가와 '교육지옥'으로 평가받는 우리나라의 교육 실태를 공부하면서 '미국의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한 때는 민주주의 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서 아시아와 유럽사회로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미국사회의 교육. 우리나라처럼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을 무한경쟁 시스템에 몰아넣고 입시전쟁이 치열하고 사교육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을까?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최첨병 국가로 등극했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선두주자를 달리고 있는 미국이다. 아무래도 자본주의 사회경제구조와 신자유주의적 교육방식이 철저하게 적용되지 않을까하는 선입견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교육이라는 표현을 적고 보니 언젠가 케이블TV에서 봤던 영화에서 미국 중소도시 내 극빈자들의 교육실태가 199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아주 열악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현황을 알아볼 수 있는 책을 고르던 중, 인터넷서점에서 노엄 촘스키 교수의 저서를 발견했다. MIT 언어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는 그는 촘스키는 1967년 [뉴욕 리뷰 북스]에서 특별부록으로 발행한 '지식인의 책무'라는 글을 통해 '지식인은 거짓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고 역설하면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등 이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미국의 대내외 정책에 대한 뛰어난 사회 비평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서구사회에서는 플라톤, 셰익스피어, 프로이트와 더불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 시대의 가장 소중한 지식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에서 촘스키는 미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교육의 문제점을 포괄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학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공공교육의 새로운 본보기를 향해 우리의 시각은 어떻게 넓혀가야 하는가? 촘스키는 범세계적인 테크놀로지의 발전, 언론의 중요성, 학교와 고등교육의 민주적 역할을 꼼꼼하게 지적한다. "어떤 형태의 교육이든지, 교육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않는 한, 진정한 민주사회는 요즘처럼 급변하는 사회에서 결코 꽃피지 못할 것이다"라고 촘스키는 목소리를 높인다. "현재의 교육체계는 학생들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있다"는 촘스키의 비판은 미국 뿐 아니라 미국을 모방하려고만 하는 이 땅의 교사, 부모, 학교 운영자, 시민운동가만이 아니라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귀기울여야 할 말이라고 할 수있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쳐야 하는 미국의 학교가, 순종을 강요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막는 통제와 억압 시스템으로 제도화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누구라도 이런 시스템 내에서 교육을 받게 되면, 권력구조를 지탱하도록 사회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권력층에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다른 전문가 집단과 다르지 않다. 국가에서 봉급을 받는 교사는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12살의 학생도 알 수 있는 진실을, 교육받은 교사들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교사만이 아니다. 공공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의 정책과 언론이 모두 촘스키의 비판에 올라 있다. 그 동안 촘스키가 다른 저작물에서도 다루었던 미국 정치의 음모를 이 책에서도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최근에 일어난 국제 분쟁과 지역 분쟁에 미국 정치의 계산이 깔리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중남미 국가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미군이 개입하고 폭력도 서슴지 않은 사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면서 교묘하게 언론을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이 발표하지 않았다고 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촘스키는 아니라고 말한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이면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캐어보려는 노력이 있다면 언제라도 그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촘스키가 서구 강대국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지만,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책에서 촘스키는 그 대안으로 깨어있는 교육을 말하고 있다. 진실을 가르치고,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방관자'가 아닌 '행동하는 참여자'로 나서라고 말하고 있다. 촘스키가 말하는 훌륭한 교사란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고, 진실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학생들이 스스로 진실을 깨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는 교사라고 말한다. 민주적으로 살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보라고 말한다. 현 사회의 지배계급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것 이면의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관행을 직시하면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지식인은 스스로 역사의 방관자로 남지 말고 역사의 참여자가 되라고, 그리고 그 대열에 학생들을 제외시키지 말고, 동참하게 하라고, 지식인 교사들에게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교육제도나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교육 내용과 정책, 그리고 교사들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애초에 이 책을 선택하면서 알고자했던 미국의 교육제도나 시스템, 대학입시제도, 교육문화, 사교육 등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정부의 행태를 보면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교육제도나 시스템 뿐 아니라 교육철학과 내용도 홀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상식과 진실과 합리성이 아니라 전경련 등 재벌기득권의 이해와 요구에 맞추어 교과서를 개편해야 한다거나 일제 식민지나 해방 후 한국현대사에 대한 내용을 교과서에서 제거하려는 '불순한 목적'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 2012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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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공부혁명 - 소설로 풀어쓴 핀란드식 5단계 공부개조 프로젝트 핀란드 교육 시리즈 2
박재원.임병희 지음 / 비아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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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은 과연 지구상의 '선진국'으로 불릴 수 있을까? <복자국가 스웨덴>(2011, 후마니타스)에 이어 이번에 연이어 읽은 '핀란드 교육 시리즈' 3권을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언뜻 든다. 비록 북유럽 제도와 문화에 대해 몇 권 밖에 읽지 않았기에 아직은 섣부른 생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류 유럽국가와 달리 그들 국가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념이나 진영논리가 아니라 '실사구시'와 합리성과 상식이다.

 

저자 박재원은 <핀란드 교육혁명>에서 존재 그대로 아이들의 수준과 능력, 특성을 존중하고 아이들의 성장과 학습을 키워주는 핀란드의 교육제도와 학교의 합리적인 실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핀란드 부모혁명>에서는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중심으로 교육과 성장을 위해 생각하고 대응하는 핀란드 사회와 부모들의 모습을 전달하면서 우리나라 교육당국과 학교, 교사, 학부모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고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제시하였다. 두 권 모두에서 저자는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문화가 하루아침에 '혁명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을 전제로, 양식 있는 학교의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학교 현장과 각 가정에서 아이들을 위해 진정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저자가 실제로 공부를 하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학생 당사자들이 '공부'에 대해 더 명확하게 알게 됨으로써 공부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바꾸고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려고 한다.

 

대다수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공부 지옥'에 빠트리고 있는 우리의 교육제도와 문화가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저자는 개인들의 변화와 노력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저자의 전략과 방법에 대한 평가를 명확하게 내릴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저자 스스로의 솔직하고 냉정한 평가로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저자는 교육제도와 문화가 쉽사리 변하지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학생들에게 필요한 '두뇌과학학습법'을 오랫동안 꾸준하게 설명하고 다녔음에도 눈에 띄는 진척이 없는 이유를 '잘못된 학습방법과 태도'로 진단하고 이 책에서 새로운 학습방법과 태도를 제시한다. 그는 공부 때문에 고민하는 일만 명이 넘는 학생과 학부모를 상담했고 이들이 가진 문제점은 모두 비슷했다고 진단한다. 이 책은 한국식 공부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며, 그 대안인 핀란드식 공부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살피고 있다.

 

저자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핀란드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2003년 PISA(국제학업성취도조사)에 의하면 평일 기준 우리 학생들의 전체 공부시간은 8시간 55분이다. 학업성취도가 비슷한 핀란드는 4시간 22분, 일본은 6시간 22분이다. 대한민국 학생들이 두 배나 더 오랜 시간 공부를 하는데 성적은 비슷하다는 말이다. 

왜 핀란드의 학생들은 우리 아이들의 반만 공부하고 비슷한 성적을 내는가? 우리 아이들과 부모와 선생님은 매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왜 핀란드의 학생과 부모와 선생님은 행복할까? 그건 핀란드 학생들이 우리 아이들보다 똑똑해서가 아니다. 그들과 우리는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공부를 즐기고 대한민국 학생들은 공부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핀란드에서는 다니는 학원으로, 사는 동네로, 부모의 수입으로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다. 고액과외, 스타강사, 대형학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 때문에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고, 부모가 미안해하지도, 학생이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부모의 학력과 소득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서로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한다. 우리가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수준별 수업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가시키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핀란드 학생을 보고 얻은 결론은 단 하나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은 무죄라는 것이다. 공부를 못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공부를 못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생존게임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핀란드의 학습법이 지금껏 저자가 연구했던 두뇌과학학습법과 일맥상통하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의지나 투입시간 만으로 성적을 올릴 수 없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학생들이 저자의 학습태도와 방법을 체화하면 소기의 목적과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말해 <핀란드 교육혁명>과 <핀란드 부모혁명>을 읽고 나서 저자에 대해 적지 않게 기대를 하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책장을 덮고나서는 실망이 컸다. 그것은 앞의 두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 책의 방향과 내용이 의도 사이에 너무 거리가 컸기 때문이다.

 

먼저, 나 역시 저자가 주장하는 두뇌과학학습법, 즉 공부에 대한 태도와 효과적인 학습방법이 일부 학생들의 학습능력 향상과 성적향상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학습태도와 방법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오랫동안 검증된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하게 표현하면)조금만 공부를 해본 어른이라면 공부를 왜 하는지, 교과서의 발간 목적이 무엇인지, 집중력이나 기억력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시험을 치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 정도의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닥친 실제 문제는 학습태도나 방법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무한경쟁과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저자의 학습태도와 방법이 쉽게 체화되기 어려운 것이 실상일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저자의 학습방법은 결국 저자의 학습방법을 체화사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개인적인 수준 차이로 학생들의 격차가 확대될 것이라는 점이다. 초중고교에서 교육정책과 교사들이 일관된 제도와 문화, 시스템을 적용하는 핀란드에서는 평등하고 균등한 학습방법이 통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무척이나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저자의 주장에 있어서 또 하나 큰 문제점은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바꾼다는 것이다.(앞의 문제의식과 동일한 것이지만) <핀란드 교육혁명>과 <핀란드 부모혁명>의 내용은 한두 명의 개인이나 가족이 감당하기 어렵듯이 저자의 학습태도와 방법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시험을 통해 아이들끼리의 무한경쟁을 유도하고 아이들 수준에 맞지 않게 일방적으로 학습 진도만을 나가는 한국의 교육방식과 교육제도를 고치지 않고서, 아이들의 우열을 가르기 위한 일제고사나 내신평가를 수정하지 않고서, 수능시험을 통해 고등학생을 전국 석차 1위에서 꼴등으로 서열화 시키는 현행 입시제도 등의 교육정책의 방향과 방법을 개선시키지 않은 채, 학교와 교사들의 교육방침과 태도가 바뀌지 않은 채 아무리 학습태도와 방법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해도 그 결과는 일부에게만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학부모들이 전체적인 제도와 시스템, 문화를 함께 노력하여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이렇게 하면 우리 아이의 성적이 다른 아이보다 올라가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나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2년 전부터 교육자치의 제도 내에서 현행 교육정책 구조 속에서 가능한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정책이나 방법이 현행 교육제도와 학교문화, 또는 학습방법을 합리적으로 개선시키고 교사들이게 도움을 주며 궁극적으로 아이들의 행복한 학교생활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현행 교육제도와 문화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집단적인 정치적, 사회적 노력과 더불어 현재 수준에서 아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줄여주려는 방향에서의 노력이 모두에게 필요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슨 공부연구소가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뜻있는 부모들과 교사들, 정치가와 전문가들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가 처음 '핀란드 교육'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려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그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 2012년 4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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