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해야 건강하다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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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처드 윌킨슨(Richard G. Wilkinson) 저, 김홍수영 역 < 평등해야 건강하다 The Impact of Inequality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를 읽고 / 2008. 03., 392쪽, 후마니타스

저자의 논지는 책의 부제처럼 '불평등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출판사가 책의 제목을 잘못 정한 듯하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라는 제목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책이 '육체적인 건강'을 다루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고, 문제해결의 방향을 '불평등 축소'가 아니라 '평등 지향'으로 왜곡(?)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얻을(배울) 수 있는 점은 네 가지다. 첫째는 사회적 집단(예 : 국가) 내에서 빈곤의 구조나 수준보다 (상대적인) 소득 불평등이 더 치명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스트레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며, 셋째는 불평등이 빈자나 약자 뿐 아니라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고, 넷째는 불평등을 축소하기가 쉽지 않지만 불평등 수준의 개선은 생각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일인당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소위 선진국들에서 외형적, 물질적인 부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범죄 등 사회적 실패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여기에서 사회적 실패의 지표는 범죄율과 강력범죄,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사망율, 자살율, 사회적 관계 또는 사회적 자본지수, 건강지수, 행복지수 등의 악화를 말한다. 사회적 실패의 주요 사례는 주요 국가들, 특히 미국, 영국, 이태리, 구공산권 국가에서 나타나며 국가 내에서도 주별, 도시별로 큰 편차가 있다.
한국의 경우 OECD에 진입한 만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소득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OECD 평균보다 심한 데다가 점점 더 그 격차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연구 초기에 저자가 고민한 지점은 "사회적 실패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빈곤인가, 불평등인가"였다. 저자는 주요 국가들간 그리고 국가 내의 주와 도시들간 통계수치를 조사한 후 결정적인 요인이 '불평등'이라 결론을 내렸다. '불평등'의 출발점과 토대는 소득 불평등이다. 국민소득이 아주 작은 국가라 하더라도 소득 불평등이 작을 경우에는 미국 각 도시들보다 사회적 실패가 적다.
그는 책 속에서 20세기 초의 통계와 연구결과 뿐 아니라 1960년대 이후의 장기적인 통계와 연구조사 결과랄 토대로 자신의 분석과 주장의 근거를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그가 70~80년내 소득 불평등 격차가 줄어드는 통계수치를 반영한 덕분에 소득 불평등이 양호한 국가로 분류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하게 심각해진 불평등 통계가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저자는 소득불평등이 어떻게 사회적 실패로 이어지는지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소득 불평등이 클수록 사회적 관계의 질과 사회적 자본이 악화됨을 보여준다. 물리적인 소득 불평등이 사람들에게 사회적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생물학적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는 보건 연구성과를 적용하여 만성 스트레스의 뿌리가 되는 심리사회적 위험 요소는 '낮은 사회적 지위'와 '빈약한 사회적 관계', 그리고 '초기 아동기의 경험'임을 밝힌다.
'낮은 사회적 지위'는 물질적 생활수준 뿐 아니라 멸시당하는 느낌, 사회적 위계서열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느낌, 종속감과 낮은 통제력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감정을 포함한다. 이는 한국의 경우 봉건적인 문화와 군사독재 문화의 잔재로 인하여 일반적인 직장과 사회조직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며 물질적 지위가 비정규직, 일용직, 단순노무직, 재하청구조, 교육 및 자산 수준에 따라 더욱 심한 것이 현실이다.
'빈약한 사회적 관계'는 친구가 없고, 독신생활을 하며, 사회적 연결망이 허술하고, 참여하는 공동체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가족 붕괴 현상이 심해지고, 1인 가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며, 개인주의적 문화가 확신되는 한국의 상황에도 시사점이 큰 부분이다.
'초기 아동기의 경험'은 전체 생애에 걸쳐서 스트레스와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출생 전후의 스트레스 경험을 말한다. 이런 초기 아동기의 경험이 어떠했는지에 따라서 각 인간이 비슷한 사회적 환경에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는 소득 불평등에 따른 스트레스가 부모와 아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과 '사회적 전략'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크게 유익하다. 그는 서열이 확실한 관계에서 사람들 사이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전략이 크게 다르다고 설명한다. 전자는 당연히 권위적, 위계적이고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이며 억압적,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은 상위계층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동시에 상위계층에게서 당한 피해나 상처를 자신보다 아래계층에게 전가하는 것이다.('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사회학의 용어가 있음)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 심한 사회와 서열사회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강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학교 폭력이나 가정 폭력, 어린이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 증가, 묻지마 폭력 등은 이런 관점에서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처럼 무한경쟁을 유도하는 사회구조와 방식, 문화라면 하층, 약자층 뿐 아니라 이들에게 억압을 가하는 중간계층, 중간계층을 억압하는 상위계층까지도 온갖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최상위 계층으로 올라갈수록 스트레스나 억압은 줄어들테지만... 따라서 한국 내에서 최상위 1%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99%는 억압이나 스트레스의 강도나 수준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스트레스와 사회적 관계,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하여 악영향을 받는 취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여러가지 통계와 실험 결과들을 통해 소득 불평등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당사자들의 스트레스 완화에 크게 기여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경제 구조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데 있어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시각이 실질적인 문제해결보다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내에서 논의되는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담론의 근거는 헌법 상의 기본권이나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공정함이나 공평함이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처럼 구체적인 사회적 병폐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소득 불평등 완화'라는 관점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사람들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 연관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소득 불평등 문제를 여론화시키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 과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연방공화국인 미국이나 유럽 등과 제도나 문화, 역사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광역 시도별 소득불평등과 건강이나 사회적 자본, 범죄율 등의 데이터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 내 관련 통계들이 객관적으로 조사된다면 저자의 연구성과를 한국의 사정에 맞게 적용하여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평등한 세상'만을 꿈꾸며 힘들게 끝없이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소득 불평등 격차를 더 이상 늘리지 않도록 하고 조금씩이라도 개선시키는 것이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단기적, 실질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분석 결과는 정치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소득 불평등과 위계적인 사회문화는 스트레스와 불안은 사람들에게 개인 또는 가족 이외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협력을 멀리하고 상위계층의 가치관에 복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작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결과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저소득층의 보수정당 후보 투표 성향 관련하여...) 다시 말하자면, 일부 사람들이 빈부 격차가 더 커지고 빈곤층이 늘어나면 보수정당에게 불리하고 좌파 정당이나 진보세력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는데, 저자의 분석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도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빈곤은 단지 재화의 양이 작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빈곤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빈곤은 사회적 지위다" (마샬 샬린스)
"사회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치열한 서열체계 속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동일시하며, 자신의 지위를 잃거나 거부당하는 위험을 최소화하기위해 복종이나 다른 퇴행적 회피행동을 보인다" (길버트 P)

[ '자전거 타기 반응' ]

 개코원숭이는 서열 따지기에 매우 민감하다. 위계질서와 자존심에 죽고 산다고 할까. 그렇다 보니 그 사회에선 폭력이 일상화할 수밖에 없다. 서열은 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다. 이놈들은 강자에게 얻어터지면 약자에게 반드시 화풀이를 한다. 특히 수컷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두머리에게 된통 당한 중간 서열의 수컷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이제 막 성장기가 끝나가는 수컷을 못살게 군다. 공격받은 이 젊은 수컷은 어른 암컷에게 소리를 내지르고, 이 암컷은 다시 어린원숭이를 물어뜯는다. 그리고 어린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를 찾아가 작신작신 두들겨 팬다.
이것이 어찌 원숭이 사회만의 일일까. 불평등이 심하고 서열의식이 강해지면 인간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크든 작든, 사회에서 가정까지 두루 나타나는 게 약자 학대와 화풀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전위된 공격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한 사람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다른 대상에게 분노를 전가해 표현하는 행동이다.

상위서열에게서 얻은 상처를 하위서열 학대로 치유하는 건 교도소에서도 일어난다. 이곳은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했거나 업신여김 받았던 사람들의 집합소다. 이들 역시 상처 입은 우월감과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대상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출구는 어디에나 있는 법. 격렬한 지배 경쟁과 폭력에 내몰린 이들은 만만한 상대로 성범죄자를 곧잘 선택한다. “적어도 나는 저 개자식보다 낫다”는 심리가 그들에게 열등감을 털고 우월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의 저자 리처드 윌킨슨은 이런 현상을 ‘자전거 타기 반응’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물론 이 용어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저서 ‘권위주의적 인성’에서 빌려왔다. 이 용어는 사회 위계적 관계를 경주용 자전거 타기에 빗댄 것이다. 아래(하급자)로는 마구 발길질을 해대면서도 위(상급자)로는 허리를 굽실거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경주자의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는 개인과 집단 심리에 그대로 적용된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업신여길 개인이나 집단을 찾아 폭력을 휘두르거나 차별적 언행을 퍼붓는다. 자신의 우월성을 제삼자에게서 보상받아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랄까.

최근 어린이와 여성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가 잇따라 발생해 충격을 던진다. 안양 초등생 납치·살해 사건, 군포 부녀자 실종 사건, 이호성의 네 모녀 피살 사건,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일선에 나섰고, 아동대상 성범죄자를 사회와 격리시키는 ‘혜진·예슬법(法)’도 만든다고 한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사회 하층부로 밀려 소외된 사람들이 자기보다 약한 어린이나 여성들을 희생양 삼아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희생자는 가해자와 직접 관계가 없거나 그에게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면서도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렸다. 여론은 이들 사건에 대해 거의 한결같이 개인적 폭력과 그 잔인성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을 텐데, 결과만 주목할 뿐 그 원인은 외면하는 셈이다. 패자 또는 낙오자를 양산해내는 사회적 폭력과 그 구조에 눈을 감는다면 유사 사건은 재발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때그때 증상만 완화하는 대증요법으론 근본치유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럼 점에서 윌킨슨의 진단과 처방은 귀 기울일 만하다. 소득격차는 불평등을 가져오고 심화한 불평등은 반드시 극단적 서열 사회를 초래하며 이는 폭력의 일상화로 이어진다. 빈곤지역일수록 폭력이 만연하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관계는 형편없이 나빠져 각종 범죄가 빈발한다는 것이다.

늘어가는 각종 강력범죄는 점점 뚜렷해지는 사회 양극화의 우려스러운 단면이기도 하다. 불평등이 심해지고 서열화가 강고해지면서 사회는 수평적 협력보다 수직적 경쟁으로 치닫게 마련이며 이런 환경에서 ‘위’에 짓눌리고 ‘아래’를 짓밟는 ‘자전거 타기’는 더 험해질 수밖에 없다. 서열사회는 높든 낮든 모두를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범죄 예방과 단속도 철저히 해야겠지만 좀 더 근원적인 발생 원인과 치유책을 찾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 하굣길 책임은 아예 사설경비 업체가 맡고, 여성들이 어둡거나 한적한 길을 마음 놓고 걷기도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 인간이 개코원숭이가 아님을 입증할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http://blog.daum.net/david872/15099394)

[ 2013년 01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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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리멘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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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레이첼 니오미 레멘(Rachel Naomi Remen) 저, 류해욱 역 < 할아버지의 기도 My Grandfather's Blessings >를 읽고 / 2005. 12., 328쪽, 문예출판사


<내가 사랑한 책들>(법정스님, 2010, 문학의숲)에는 지난 2010년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애정어린 마음으로 읽으신 책 50권이 소개되어 있다. 법정스님은 비록 불교 수행자였지만 <내가 사랑한 책들> 안에 소개되어 있는 50권의 책 중에서 불교 또는 불교 수행자에 관한 책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 등 3~4권에 불과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기독교 수행자 또는 신자들의 저서가 제법 많다. 법정스님이 소개한 책을 따라 읽다보면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어 인류와 세상, 철학과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수도자로서의 법정스님의 마음과 뜻을 느끼게 된다. 이 책도 그 중의 한 권이다.

37년 동안 의사로 일해온 레이첼 박사는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선함을 잊고 기술이나 전문직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람이나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은 전문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기쁨과 실패, 그리고 상실의 체험, 심지어는 병도 봉사하고 섬기는 데에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이첼 박사는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데 이러한 상황들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레이첼 박사의 생각과 태도는 의사, 변호사 등 현대 사회의 전문직 종사자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소위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전문성'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종교를 '인민의 아편' 정도로 생각하는 집안(그렇지만 저자의 부모는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로 사회정의와 봉사에 최선의 가치를 두었다)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축복의 말을 들려주고 감싸안아주었던 외할아버지는 삭막한 아파트에 사는 어린 레이첼에게 흙을 가득 답은 종이컵을 건네주며 매일 물을 주라고 당부한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물을 주지만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던 레이첼에게 어느 날 솟아오른 작은 싹은 큰 충격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생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도 생명은 숨어 있는 법이란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란다"라며 레이첼 박사가 평생에 걸쳐 기억하는 첫 번째 가르침을 주셨다.
그녀는 "나는 성장해가면서 조금씩 외할아버지와 멀어졌다. 외할아버지는 마치 과학이라는 거대한 바다 안에 둥둥 떠다니는 신비의 작은 섬과 같았다. 성공을 향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많은 다른 것들과 함께 외할아버지 역시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밀어 넣었다"고 말하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말씀이 서로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스스로가 중증의 지병을 앓으면서 암 환자들을 돌보는 레이첼 박사는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누군가가 우리를 축복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善)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두려움과 무기력함, 불신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지식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존재로서 봉사하고 섬길 수 있으며 때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봉사하고 섬기기도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섬기면서 축복을 보낼 때 세상과 우리 주변과 우리 안의 빛은 더욱 밝아진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 통의 전화, 가벼운 포옹,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 따스한 미소나 눈인사 등이 활기를 찾아주기도 하며 떨어진 귀걸이를 찾아주거나 장갑을 집어주는 작은 행동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되찾아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레이첼 박사는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과 죽음을 앞두었거나 죽음 같은 절망을 체험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를 기록한 이 책을 통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며, 따뜻한 삶, 자유로운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자선'과 '봉사'에 대해 독자들이 다시금 생각토록 해준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헤맨다. 그러기 위해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번다. 각종 보험을 들고 집에는 도난 방지 시스템을 설치하며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자동차에도 다양한 안전 장치를 매단다. 그러나 결코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레이첼 박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은 서로의 선(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부탁을 해서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선을 베풀며 증인을 세워 칭찬받기를 기다린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낼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타종교나 비신도에 대한 '배타주의'나 '복음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 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자세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기독교 목회자들과 열성 신도들의 '탐욕'과 '변절'에 크게 실망함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같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기에 아직은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저자에게 아쉬운 점들도 많다. 저자는 하느님의 축복을 기본으로 하여 질병의 고통에 처한 개인들의 진정한 치유와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질병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는 사회적, 구조적 인식은 부족해 보인다. 현대 보건의학과 심리사회학, 진화생물학 등의 최신 연구결과를 참조한다면, 현대적 질병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사회적 질병'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유에 힘쓰지만, 그와 더불어 그런 질병의 사회적, 구조적 원인을 찾아 질병의 조건과 가능성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 2013년 0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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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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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하엘 엔데(Michael Andreas Helmuth Ende) 저, 한미희 역 < 모모 MOMO >를 읽고 / 1999. 02., 368쪽, 비룡소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가 1973년 집필한 흥미진진한 동화로 한국에서도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소설이다.
 
독일 어느 마을 원형극장 유적지에 말라깽이 소녀 모모가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외롭거나 우울할 때, 혹은 삶에 지쳐 피곤할 때, 그녀에게 달려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다. 모모에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곤 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과 모모 앞에 아주 강력한 적들이 등장한다. 바로 시간도둑들이다. 그들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설교하러 다니는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도사들이다.
 
잠시 모모가 마을을 비운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시간도둑들에게 설득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성공(?)했다. 유명한 인물이 되고 바쁘게 돈을 벌고 있으며 또는 고립되어 노예처럼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모모를 찾아오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모모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시간관념을 주입시키면서 시간도둑들이 그들에게서 모모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마저 훔쳐간 것이다. 시간을 합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살아가면서 향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소비되는 시간 관념이 그들 마음에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작품이 우리 가슴 한 부분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우리는 자신이야말로 시간도둑에게서 시간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며 사랑하는가에 따라 시간의길이와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듯이...
 
이렇게 작가는 도둑맞은 시간, 혹은 강탈당한 시간을 성찰해볼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실 시간의 비밀을 알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시인들에게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실을 채집하는 시간과 사냥한 것을 가족이나 부족과 나누며 향유하는 시간이 있다. 전자가 ‘노동하는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축제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원시적이고 고단한 삶을 영위했지만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행복이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 인생 전체 시간에서 사랑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완전히 노동하는 시간을 제거할 수는 없다. 어떻게 배가 고픈 사람이 어떻게 타인과 사랑을 나누며,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행복에 대한 원시인의 ‘오래된 미래’에서 우리는 진보의 잣대 한 가지를 얻게 된다. 노동하는 시간이 줄어 상대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그 사회는 과거보다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랑하는 자본주의 사회, 선진사회는 과거 사회보다 더 진보한 사회인가?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서 사회 성원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더 많이 허용하는 좋은 사회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과거 농경사회를 떠올려보자. 남루해 보이는 이 시절에도 사람들은 노동하는 시간만큼 사랑하는 시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시간, 즉 농번기만큼이나 노동에서 면제되는 사랑하는 시간이 넘치도록 충만했다. 바로 농한기이다. 겨울 동안 아이들이나 친구들과 토끼 사냥이나 꿩 사냥을 떠나는 농부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려보라.
물론 우리 시대 시간도둑들은 당시 농경시대의 낮은 GDP를 내걸며 그때가 불행한 사회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농경시대 경제난을 상징하는 보릿고개가 사라졌다고, 그래서 지금 자본주의 사회가 더 진보한 사회라고 설레발을 칠 것이다. 항상 시간도둑들은 이런 식이다. 인간의 행복이 질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의 행복은 자본의 양에 의존한다는 궤변을 펼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금 그렇게 GDP가 높은데도 우리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이웃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그리고 덤으로 알아두자.
과거 농경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보릿고개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정부나 지주의 창고에서 곡식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쨌든 최소한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다음에 정의로운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도둑들로 가득하다. 안정적 직장을 허용하지 않는 자본가들, 저임금을 유지하면서 맞벌이를 강요하는 자본가들, 농한기에 비해 너무나 작은 휴가 기간을 생색이라도 내듯이 허락하는 자본가들, 살인적인 경쟁 교육으로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앗고 있는 교육 당국자들,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분배를 더 늘리겠다는 미사여구만을 읊조리는 정치가들. 자본주의 체제가 과거보다 진보적이라고 역설하는 지식인들.
거짓말도 반복되면 진실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시간도둑들의 거짓말은 반복되면서, 우리는 지금 자신의 삶이 처한 불행에 눈을 감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리는 시간도둑들의 말에 순진하게 속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삶은 원시인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우리는 노동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소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까지 밭을 갈다가, 소는 축사에 들어오면 잠에 곯아떨어진다. 옆에 있는 소와 하루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몸을 비빌 시간도 없다. 소의 일과와 우리의 그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일주일 내내 노동하다가 주말이 되면 쉬기에 바쁜 우리가 어떻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술을 만끽하는 사랑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GDP가 그만큼 올랐으면, 사회체제는 주5일 근무가 아니라 주4일, 혹은 주3일로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함께 살자'.

불행히도 시간도둑들의 집요한 설교 탓인지 우리는 사랑하는 시간의 증가야말로 사회의 진보를 나타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가수 김만준도 [모모]를 부르며 절규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는 이 책에서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날이 흐를수록 제대로 즐길 줄 모르고,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 2012년 12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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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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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 F. 슈마허(Ernst Rriedrich Schmacher) 저, 김진욱 역 <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utiful :인간 중심의 경제학 >를 읽고 / 1999. 12., 338쪽, 범우사


1973년에 출간된 이 책은 발간 이후 현재까지 수 많은 다른 책과 보고서, 논문에 인용되고 있다. 책의 제목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제 보통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녹색연합'이라는 한국의 환경단체가는 자신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제목을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까지 정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세계인의 관심을 꾸준히 받고 있을까?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궁금하여 읽고 싶었지만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리스트 순서에 따라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빠르게, 높게, 멀리".... 이 구호는 올림픽 구호만이 아니다. 인류는 언젠가부터 빠르게, 높게, 멀리, 그리고 크게 만드는 것이 '발전'이고 '진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경향은 고대에도 존재했다. 기원전 2,500년 이집트인들의 피라미드가 그랬고, 그리스인의 파르테논 신전이 그랬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본격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가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자본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거의 신격화했다. 사회주의 주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인류의 행복과 발전의 첩경이라는 신앙에 빠졌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초음속 제트기와 바벨탑과 같은 마천루, 은하계를 벗어나는 우준선을 만들었고 거대한 도시, 거대한 항공모함, 거대한 운동장 등 물리적인 '거대함' 뿐 아니라 거대한 교통체계, 통신체계, 물류체계, 생산체계, 에너지체계 등 시스템에 적용되면서 거대한 관료조직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무한한 생산은 무한한 소비를 불러 온다.

슈마허는 근대의 사상, 과학, 기술에 의해 형성된 세계는 세 가지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본성은 비인간적인 기술과 조직 속에서 질시하고 쇠약해져 가고 있다. 둘째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생활환경이 파괴도이어 절반쯤 붕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셋째로, 인간 경제에 없어서는 안되는, 재생이 불가능한 자원, 특히 화석원료 자원의 고갈이 눈 앞에 보이고 있따. 슈마허는 이런 현상의 근원이 되는 것은 "물질 지상주의와 거대 기술 신앙, 그리고 탐욕과 질투심에 다름 아닌 풍요의 추구"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가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오류 중 하나를 "인류에게 '생산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라고 규정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은 '생산'에서 인간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닌 자연을 무가치한 것으로 다루었고 중세 이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했기(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생각)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는 아담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학자들은 생각하는 '자본'의 대부분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생산의 문제는 재생가능하지 않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거대한 생산에 따른 자연의 허용 한도, 그리고 인간성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이고 결국 인류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인류의 파국의 위기에 대해 저자는 '영속성'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생산 방법과 소비 생활에 의한 새로운 생활 양식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한다.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사회 구조와 인간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는 과학적 내지 기술적인 '해결'은, 그것이 아무리 능란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쓸모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도출하는 과제가 바로 "값이 싸서 거의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고, 작은 규모로 응용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방법이나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중간기술"이다.

저자는 또한 '규모'의 문제를 중요하게 제기한다. 그는 "거대주의와 기계화의 경제학은 19세기의 환경이나 사고의 '유물'로서, 오늘의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전혀 새로운 사고의 체계가 필요해지고 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고 체계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자연히 뒤따라 온다."고 말하면서 "대량 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을 제시한다.
저자에게 '대중에 의한 생산'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기도 하다. 대규모 산업사회는 대규모 조직을 만들어내고 대규모 조직은 관료주의와 비능률, 생산성 저하 등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영국의 석탄공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대규모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이외에 저자는 책 속에서 불교경제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너지 위기를 다루면서 원자력의 이용이 인류에게 저주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원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쟁점인 '사적 소유'와 '생산수단의 소유' 등 '소유권'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을 가하면서 새로운 소유의 형태를 제시한다.

1970년대 전반과 후반의 두 차례 석유위기는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준 바 있다. 이 위기를 10여 년 전에 예견해 경고했던 인물이 슈마허였고 그러한 경고의 사상적 바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 공업문명을 그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다. 슈마허가 제기한 산업사회의 문제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가 한쪽에서는 더욱 거대해지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더욱 파편화되고 있다.
유한한 자원을 무작정 써버리는 일, 인간의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일, 대규모 조직을 무조건 선호하는 일 등이 비판의 대상이다. '성장' 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달려온 우리의 경제 개발도 그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중간기술'과 '새로운 조직'의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제가 보여 주고 있듯, 그의 주장은 경제 체계에 속박되어 버린 인간을 다시 주인공의 위치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며, 그것만이 인간을 파멸의 길로부터 구해내는 방법인 것이다.

슈마허의 문제의식은 이반 일리히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반 일리히 역시 1970년대에 산업생산사회와 제도화, 그리고 거대 전문관료체계의 폐해를 지적했다. 일리히는 경제 뿐 아니라 교육, 의료, 운송, 노동 등 전반적인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성장을 멈춰라!"라고 선언했다. 슈마허가 '중간기술'과 '인간 중심의 경제'를 제창했다면, 일리히는 '자율적 공생사회'를 제창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명제는 일리히의 대안과 연결된다. 나는 일리히의 방향에 좀 더 공감이 된다.

[ 2012년 1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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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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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위화(余?) 저, 김태성 역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China in Ten Words>를 읽고 / 2012. 09., 358쪽, 문학동네


오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뀌면 십중팔구 이명박 정권이 망쳐버린 중국측과의 외교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전혀 다른 현대사를 거쳐오고 있는 중국, 북한에 무시할 수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현재 모습이 어떤지 알아야 새 정권의 중국 외교나 경제협력, 교류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 터, 밖에서 들여다보는 중국이 아니라 중국인의 목소리로, 그것도 비판적 지식인의 목소리로 듣는 중국사회의 이야기는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열 개 단어 속의 중국(十個詞彙中的中國)’이다. 저자는 인민,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열 개의 단어 속에 중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열 개의 단어를 열 쌍의 눈으로 삼아 열 개의 방향에서 중국을 응시하는 책’이다. 더불어 그는 이 책에서 “끊이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당대 중국의 삶의 모습을 열 개의 단어 속에 축약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일러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굴지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 사회의 “뿌리와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 사회가 경험한 대단히 빠른 변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인관관계가 전도된 발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벌떼처럼 모여드는 결과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을 찾는 일에는 무척 소극적이다. 그래서 지난 30여 년 동안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란 각종 사회갈등과 사회문제가 초고속 경제발전이 가져다준 낙관적인 정서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지금까지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휘황찬란해 보이는 오늘의 결과에서 출발하여 어쩌면 오늘의 불안이 되고 있는지도 모를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p.17)

첫번째 글 "인민"에서 저자는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개혁개방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 급작스레 중국 전역을 뒤흔든 민주화 운동인 1989년 6월 톈안문 사건을 회고하며, 그것이 중국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어떤 전환점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톈안문 사건을 통해 “문화대혁명 이래로 누적되어온 정치적 열정이 마침내 깨끗이 발산”되었으며 “그 뒤로는 부(富)에 대한 열정이 이러한 정치적 열정을 대신했고,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돈을 버는 데 집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990년대의 경제적 번영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열정을 목격하며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톄안문 사건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국사회의 변화는, 나에게 1987년 6월 항쟁과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면서 변화된 한국사회의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사회 역시 알게 모르게 두 번의 계기를 거치면서 수 십년 동안 "부자되세요"라는 말에게 지배당해 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0년이란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하지만 역사의 기억은 결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나는 1989년의 톈안문 시위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늘 어떤 입장에 서 있건 간에, 어느 날 갑자기 지난 일들을 회고하게 될 때 자신의 가슴과 뼈에 깊이 새겨진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 가슴과 뼈에도 깊이 새겨진 바로 그 느낌이 나로 하여금 ‘인민’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p.36)

"영수"에서 ‘영수’는 다름 아닌 현대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다. 이 글에서 위화는 오늘날 중국 사회 한편에서 불고 있는 마오쩌둥 부활 움직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회심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전 세계에 갈수록 그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며 “전 세계 수많은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래와 같은 해석을 내린다.
이 단락은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한국(남한)의 경우 마오쩌뚱같은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씨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영도자'가 아니라 '독재자'를 상대해 왔다. 심지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에 등록해 당선이 유력한 상태이다. 

"2009년 5월 1일,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빈에서 성대한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손에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를 높이 들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광경이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어쩌면 ‘마오쩌둥 부활’이 중국 본토화의 사회심리일 뿐만 아니라 지구화의 사회심리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해답은 세계가 병들어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체에 병이 나면 염증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p.59)

"독서"는 문화대혁명 시절 성장기를 보낸 위화의 자전적 체험이 가장 진하게 드러나 있는 글이다. 마오쩌둥 어록 말고는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 저자의 책 읽기 경험이 잔잔히 재미를 준다. 특히 수많은 사람이 몰래 돌려가며 읽어 앞뒤 부분이 뜯겨나간 문학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상상력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작가 위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단초가 되어준다.
이 부분도 한국인들이 공감하기 쉽지 않다. 물론 6.25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저자와 차이가 있다면, 저자는 배고픔에 대한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읽을 책이 없어 곤란을 겪었고 한국의 전쟁세대는 읽을 책은 커녕 하루 세 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글쓰기"는 작가 위화의 문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글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발치사(拔齒師) 생활을 하며 한편으로는 소설을 써서 끊임없이 잡지사에 투고하던 시절의 이야기, 작가로 데뷔하기까지의 에피소드 등이 당대 중국 사회의 풍경과 함께 소개된다. 이 글에서 위화는 자신의 초기 단편들이 폭력의 이미지로 가득한 이유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현대 중국의 작가에게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루쉰"에는 현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에 대한 위화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다. 문화대혁명 시절 위대한 작가 루쉰의 ‘위대한 독자’는 다름 아닌 마오쩌둥이었다. 당시에는 마오쩌둥과 루쉰의 말이 인민들 사이에선 곧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청년 위화에게 루쉰의 작품은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위화는 평생 루쉰을 좋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작가 루쉰임에도 저자가 학생 시절의 경험 때문에 50살이 넘어서까지 싫어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너무 강렬한 일방적 경험은 당사자가 장기간에 걸쳐 환멸을 느끼고 외면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차이’는 오늘날 중국 사회를 규정하는 중요한 단어다. "차이"에서 위화는 오늘날 중국이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 등 해결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구조적 문제들은 장밋빛 중국의 어두운 그림자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이미지에 푹 빠져 아직도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가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나는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는 중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한국사회의 주된 문제 역시 '차이'고 '차이'를 너머 '차별'이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중소기업에 대한 차별, 영세상인에 대한 차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 무수히 많은 차별이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러한 '차이'와 '차별'을 구조적,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대다수 민중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혁명"에서는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 과정에서 무수히 벌어진 문화대혁명식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혁명의 이름으로 미화되는 일은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도 만연해 있고, 그로 인한 민간의 불만 정서와 사회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다. 위화는 문화대혁명 당시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한 홍위병의 이야기 끝에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과 국방군이 공방을 거듭하던 지역에서 고스란히 나타났을 모습이다. '혁명'이나 '해방', '노동'이나 '정의', '혁신'이나 '진보', '운동'이나 '이념'등의 단어와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단어와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함을 느끼게 준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명의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p.252)

"풀뿌리"는 중국의 경제기적을 이루어낸 장본인들, 상술과 처세로 일확천금을 벌어들인 하층민 출신의 중국 신흥 부호들에 대한 글이다.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이 오늘날 중국 경제의 주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위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경제발전의 조류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법률을 위반하거나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전혀 서슴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했다. (…) 이들 풀뿌리들은 어떤 유형의 기적이라도 창조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엄청난 담력을 갖고 있었고 뭔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일도 없었다. (…) 중국의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맨발인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고,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프롤레타리아인 그들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였다."(p.271)

"산채"(山寨 가짜 혹은 모조품)에서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자리 잡은 산채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산채 스타, 산채 TV 프로그램, 산채 유행가 등이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위화는 이러한 산채 현상에 대해 “풀뿌리문화가 엘리트문화에 던지는 도전장이자 민간이 정부에 던지는 도전장, 그리고 약자집단이 강자집단에 던지는 도전장”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국 사회의 혼란상을 드러내는 명확한 지표라고 말한다.
많은 한국 기업들과 개인들이 '산채'라는 단어의 뜻과 사회적 의미를 모르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상당수 고전했을 것이다. 중국산 '짝퉁'이 엄청나게 존재하는 현상이 중국정부의 방치나 방임도 한 몫을 하겠지만, 실제 저자의 설명이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채 현상은 중국 사회의 단편적 발전이 부른 필연적인 결과로서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 오늘날 중국 사회의 도덕성 상실과 시비의 혼돈이 산채 현상을 통해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생태에 기초하여 ‘산채’라는 단어는 중국인들의 마음속 깊이 틀어박혔다. 표절과 모방, 악의적 조롱, 비방 등 원래는 불법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간주된 행위에 존재 이유를 제공하고, 사회여론과 사회심리적인 측면에서 점차 합리적인 지위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산채’는 오늘날 중국인 사이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p.306)

이 책의 마지막 글인 "홀유"(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뭔가를 덮어씌우는 일)는 산채와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의 일상에서 하나의 처세 방식으로 자리 잡은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이야기다. 위화는 “산채가 모조품과 해적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 것처럼 홀유는 속임수나 헛소문 같은 단어에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입혀주었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에는 민간, 정부 할 것 없이 홀유를 활용하여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위화는 중국 사회에서 '홀유'가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홀유(忽悠)"라는 단어는 빠른 속도로 전국을 풍미하면서 산채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중국 사회의 윤리 및 도덕성 결핍과 가치관의 혼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중국 사회가 최근 30년 동안 지속해온 단편적 발전의 후유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홀유 현상이 사회의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진 정도는 산채 현상을 크게 능가한다. 이처럼 홀유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진지하지 못한 사회, 또는 원칙이 중시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p.344)


이처럼 이 책에는 불과 30여 년 만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중국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온갖 부조리를 보여준다. 저자는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깊은 연민과 단단한 연대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모국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우리는 위화 문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화의 휴머니즘은 어쩌면 이 책에서 그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미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10여 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중국어판은 2011년 1월 대만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현재까지 출간이 불가능한 상태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중국 정부 당국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만의 한 기자가 저자에게 “<형제>와 이 책 두 권 모두 상당한 비판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인데 어째서 전자는 중국에서 출판이 가능하고 후자는 불가능한 건가요?”라고 묻자, 저자는 허구와 비허구의 차이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주제가 둘 다 오늘날의 중국이긴 하지만 <형제>는 허구 작품이라 서술에서 우회적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출판할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비허구 작품이라 서술에서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출판이 불가능하다."('p.07)

저자 위화는 서구 사회에서 현재 중국어권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저자가 처음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장편소설 <형제>였고, 이 책은 <형제> 이후 4년 만에 쓴 것이다. 그는 <형제>에서 보여준 중국 사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이 책에서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했다고 하니, <형제>도 한 번 읽어 봐야겠다...^^

[ 2012년 1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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