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 사회가 경험한 대단히 빠른 변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인관관계가 전도된 발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벌떼처럼 모여드는 결과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을 찾는 일에는 무척 소극적이다. 그래서 지난 30여 년 동안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란 각종 사회갈등과 사회문제가 초고속 경제발전이 가져다준 낙관적인 정서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지금까지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휘황찬란해 보이는 오늘의 결과에서 출발하여 어쩌면 오늘의 불안이 되고 있는지도 모를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p.17)
첫번째 글 "인민"에서 저자는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개혁개방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 급작스레 중국 전역을 뒤흔든 민주화 운동인 1989년 6월 톈안문 사건을 회고하며, 그것이 중국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어떤 전환점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톈안문 사건을 통해 “문화대혁명 이래로 누적되어온 정치적 열정이 마침내 깨끗이 발산”되었으며 “그 뒤로는 부(富)에 대한 열정이 이러한 정치적 열정을 대신했고,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돈을 버는 데 집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990년대의 경제적 번영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열정을 목격하며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톄안문 사건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국사회의 변화는, 나에게 1987년 6월 항쟁과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면서 변화된 한국사회의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사회 역시 알게 모르게 두 번의 계기를 거치면서 수 십년 동안 "부자되세요"라는 말에게 지배당해 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0년이란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하지만 역사의 기억은 결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나는 1989년의 톈안문 시위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늘 어떤 입장에 서 있건 간에, 어느 날 갑자기 지난 일들을 회고하게 될 때 자신의 가슴과 뼈에 깊이 새겨진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 가슴과 뼈에도 깊이 새겨진 바로 그 느낌이 나로 하여금 ‘인민’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p.36)
"영수"에서 ‘영수’는 다름 아닌 현대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다. 이 글에서 위화는 오늘날 중국 사회 한편에서 불고 있는 마오쩌둥 부활 움직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회심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전 세계에 갈수록 그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며 “전 세계 수많은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래와 같은 해석을 내린다.
이 단락은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한국(남한)의 경우 마오쩌뚱같은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씨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영도자'가 아니라 '독재자'를 상대해 왔다. 심지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에 등록해 당선이 유력한 상태이다.
"2009년 5월 1일,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빈에서 성대한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손에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를 높이 들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광경이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어쩌면 ‘마오쩌둥 부활’이 중국 본토화의 사회심리일 뿐만 아니라 지구화의 사회심리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해답은 세계가 병들어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체에 병이 나면 염증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p.59)
"독서"는 문화대혁명 시절 성장기를 보낸 위화의 자전적 체험이 가장 진하게 드러나 있는 글이다. 마오쩌둥 어록 말고는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 저자의 책 읽기 경험이 잔잔히 재미를 준다. 특히 수많은 사람이 몰래 돌려가며 읽어 앞뒤 부분이 뜯겨나간 문학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상상력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작가 위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단초가 되어준다.
이 부분도 한국인들이 공감하기 쉽지 않다. 물론 6.25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저자와 차이가 있다면, 저자는 배고픔에 대한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읽을 책이 없어 곤란을 겪었고 한국의 전쟁세대는 읽을 책은 커녕 하루 세 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글쓰기"는 작가 위화의 문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글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발치사(拔齒師) 생활을 하며 한편으로는 소설을 써서 끊임없이 잡지사에 투고하던 시절의 이야기, 작가로 데뷔하기까지의 에피소드 등이 당대 중국 사회의 풍경과 함께 소개된다. 이 글에서 위화는 자신의 초기 단편들이 폭력의 이미지로 가득한 이유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현대 중국의 작가에게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루쉰"에는 현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에 대한 위화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다. 문화대혁명 시절 위대한 작가 루쉰의 ‘위대한 독자’는 다름 아닌 마오쩌둥이었다. 당시에는 마오쩌둥과 루쉰의 말이 인민들 사이에선 곧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청년 위화에게 루쉰의 작품은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위화는 평생 루쉰을 좋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작가 루쉰임에도 저자가 학생 시절의 경험 때문에 50살이 넘어서까지 싫어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너무 강렬한 일방적 경험은 당사자가 장기간에 걸쳐 환멸을 느끼고 외면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차이’는 오늘날 중국 사회를 규정하는 중요한 단어다. "차이"에서 위화는 오늘날 중국이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 등 해결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구조적 문제들은 장밋빛 중국의 어두운 그림자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이미지에 푹 빠져 아직도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가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나는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는 중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한국사회의 주된 문제 역시 '차이'고 '차이'를 너머 '차별'이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중소기업에 대한 차별, 영세상인에 대한 차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 무수히 많은 차별이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러한 '차이'와 '차별'을 구조적,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대다수 민중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혁명"에서는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 과정에서 무수히 벌어진 문화대혁명식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혁명의 이름으로 미화되는 일은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도 만연해 있고, 그로 인한 민간의 불만 정서와 사회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다. 위화는 문화대혁명 당시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한 홍위병의 이야기 끝에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과 국방군이 공방을 거듭하던 지역에서 고스란히 나타났을 모습이다. '혁명'이나 '해방', '노동'이나 '정의', '혁신'이나 '진보', '운동'이나 '이념'등의 단어와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단어와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함을 느끼게 준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명의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p.252)
"풀뿌리"는 중국의 경제기적을 이루어낸 장본인들, 상술과 처세로 일확천금을 벌어들인 하층민 출신의 중국 신흥 부호들에 대한 글이다.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이 오늘날 중국 경제의 주축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위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경제발전의 조류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법률을 위반하거나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전혀 서슴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했다. (…) 이들 풀뿌리들은 어떤 유형의 기적이라도 창조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엄청난 담력을 갖고 있었고 뭔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일도 없었다. (…) 중국의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맨발인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고,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프롤레타리아인 그들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였다."(p.271)
"산채"(山寨 가짜 혹은 모조품)에서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자리 잡은 산채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산채 스타, 산채 TV 프로그램, 산채 유행가 등이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위화는 이러한 산채 현상에 대해 “풀뿌리문화가 엘리트문화에 던지는 도전장이자 민간이 정부에 던지는 도전장, 그리고 약자집단이 강자집단에 던지는 도전장”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국 사회의 혼란상을 드러내는 명확한 지표라고 말한다.
많은 한국 기업들과 개인들이 '산채'라는 단어의 뜻과 사회적 의미를 모르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상당수 고전했을 것이다. 중국산 '짝퉁'이 엄청나게 존재하는 현상이 중국정부의 방치나 방임도 한 몫을 하겠지만, 실제 저자의 설명이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채 현상은 중국 사회의 단편적 발전이 부른 필연적인 결과로서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 오늘날 중국 사회의 도덕성 상실과 시비의 혼돈이 산채 현상을 통해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생태에 기초하여 ‘산채’라는 단어는 중국인들의 마음속 깊이 틀어박혔다. 표절과 모방, 악의적 조롱, 비방 등 원래는 불법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간주된 행위에 존재 이유를 제공하고, 사회여론과 사회심리적인 측면에서 점차 합리적인 지위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산채’는 오늘날 중국인 사이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p.306)
이 책의 마지막 글인 "홀유"(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뭔가를 덮어씌우는 일)는 산채와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의 일상에서 하나의 처세 방식으로 자리 잡은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이야기다. 위화는 “산채가 모조품과 해적판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 것처럼 홀유는 속임수나 헛소문 같은 단어에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입혀주었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에는 민간, 정부 할 것 없이 홀유를 활용하여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위화는 중국 사회에서 '홀유'가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홀유(忽悠)"라는 단어는 빠른 속도로 전국을 풍미하면서 산채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중국 사회의 윤리 및 도덕성 결핍과 가치관의 혼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중국 사회가 최근 30년 동안 지속해온 단편적 발전의 후유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홀유 현상이 사회의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진 정도는 산채 현상을 크게 능가한다. 이처럼 홀유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진지하지 못한 사회, 또는 원칙이 중시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p.344)
이처럼 이 책에는 불과 30여 년 만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중국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온갖 부조리를 보여준다. 저자는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깊은 연민과 단단한 연대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모국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우리는 위화 문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화의 휴머니즘은 어쩌면 이 책에서 그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