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리멘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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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레이첼 니오미 레멘(Rachel Naomi Remen) 저, 류해욱 역 < 할아버지의 기도 My Grandfather's Blessings >를 읽고 / 2005. 12., 328쪽, 문예출판사


<내가 사랑한 책들>(법정스님, 2010, 문학의숲)에는 지난 2010년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애정어린 마음으로 읽으신 책 50권이 소개되어 있다. 법정스님은 비록 불교 수행자였지만 <내가 사랑한 책들> 안에 소개되어 있는 50권의 책 중에서 불교 또는 불교 수행자에 관한 책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 등 3~4권에 불과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기독교 수행자 또는 신자들의 저서가 제법 많다. 법정스님이 소개한 책을 따라 읽다보면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어 인류와 세상, 철학과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수도자로서의 법정스님의 마음과 뜻을 느끼게 된다. 이 책도 그 중의 한 권이다.

37년 동안 의사로 일해온 레이첼 박사는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선함을 잊고 기술이나 전문직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람이나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은 전문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기쁨과 실패, 그리고 상실의 체험, 심지어는 병도 봉사하고 섬기는 데에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이첼 박사는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데 이러한 상황들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레이첼 박사의 생각과 태도는 의사, 변호사 등 현대 사회의 전문직 종사자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소위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전문성'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종교를 '인민의 아편' 정도로 생각하는 집안(그렇지만 저자의 부모는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로 사회정의와 봉사에 최선의 가치를 두었다)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축복의 말을 들려주고 감싸안아주었던 외할아버지는 삭막한 아파트에 사는 어린 레이첼에게 흙을 가득 답은 종이컵을 건네주며 매일 물을 주라고 당부한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물을 주지만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던 레이첼에게 어느 날 솟아오른 작은 싹은 큰 충격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생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도 생명은 숨어 있는 법이란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란다"라며 레이첼 박사가 평생에 걸쳐 기억하는 첫 번째 가르침을 주셨다.
그녀는 "나는 성장해가면서 조금씩 외할아버지와 멀어졌다. 외할아버지는 마치 과학이라는 거대한 바다 안에 둥둥 떠다니는 신비의 작은 섬과 같았다. 성공을 향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많은 다른 것들과 함께 외할아버지 역시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밀어 넣었다"고 말하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말씀이 서로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스스로가 중증의 지병을 앓으면서 암 환자들을 돌보는 레이첼 박사는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누군가가 우리를 축복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善)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두려움과 무기력함, 불신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지식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존재로서 봉사하고 섬길 수 있으며 때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봉사하고 섬기기도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섬기면서 축복을 보낼 때 세상과 우리 주변과 우리 안의 빛은 더욱 밝아진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 통의 전화, 가벼운 포옹,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 따스한 미소나 눈인사 등이 활기를 찾아주기도 하며 떨어진 귀걸이를 찾아주거나 장갑을 집어주는 작은 행동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되찾아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레이첼 박사는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과 죽음을 앞두었거나 죽음 같은 절망을 체험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를 기록한 이 책을 통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며, 따뜻한 삶, 자유로운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자선'과 '봉사'에 대해 독자들이 다시금 생각토록 해준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헤맨다. 그러기 위해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번다. 각종 보험을 들고 집에는 도난 방지 시스템을 설치하며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자동차에도 다양한 안전 장치를 매단다. 그러나 결코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레이첼 박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은 서로의 선(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부탁을 해서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선을 베풀며 증인을 세워 칭찬받기를 기다린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낼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타종교나 비신도에 대한 '배타주의'나 '복음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 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자세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기독교 목회자들과 열성 신도들의 '탐욕'과 '변절'에 크게 실망함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같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기에 아직은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저자에게 아쉬운 점들도 많다. 저자는 하느님의 축복을 기본으로 하여 질병의 고통에 처한 개인들의 진정한 치유와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질병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는 사회적, 구조적 인식은 부족해 보인다. 현대 보건의학과 심리사회학, 진화생물학 등의 최신 연구결과를 참조한다면, 현대적 질병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사회적 질병'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유에 힘쓰지만, 그와 더불어 그런 질병의 사회적, 구조적 원인을 찾아 질병의 조건과 가능성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 2013년 0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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