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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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들야들하다고 말하겠다(설명할 길은 없고, 그저 '야들야들해 보이는' 첩어가 생각났는데 그게 '야들야들'이다) ㅡ 책을 덮은 후의 내 사고가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청교도적 환상이었구나, 하는 결론으로 흘렀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가브리엘의 오랜 사랑인 빨간 후드 여인을 놓고 격투를 벌일 때 그의 주먹이 왜 상대의 눈과 코만을 향했는지 생각해보라. 아마도 소설의 어느 사건을 둘러봐도 이만큼 격정적인 장면은 없겠지만(섹스할 때? 흠, 그렇다면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거웃의 덤불숲 앞에서 후퇴하고 공격하고 논쟁하고 휴전하는 상설시장 같은 리듬이 어디에 또 있을지를. 원래부터가 나는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래전 결혼한 사이인 게 분명한, 소싯적 부부란 공동명의를 사용한 사람들의 정신구조를 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탄할 때가 있다. 『오래오래』와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진 않다. 아내를 배신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파트너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게 복잡하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ㅡ 「두 집 살림하는 것도 머리가 좋아야 해!」 뭐, 어쨌든 우리의 가브리엘은 전설의 아이를 만들기 위해 전설적인 정원에서 전설적으로 행해진 한편으론 어처구니없이 추락하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처럼 사랑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빙(浮氷)마냥 영원히 한곳에 서있을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것도 정신없이 널브러지거나 웅크린 채 어깻죽지를 비벼대면서. 이 유쾌하고 불쾌한 사랑은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썩고 문드러지고 끔찍한 쇠약을 맞이해도 그칠 줄을 모르는데, 어느 누가 비열한 본능이라고 분노하며 손가락질하겠는가? 「낮에 감히 소동을 벌이지 못하는 사람은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고, 셰익스피어가 괜히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왕」) ㅡ 여기서는 다른 맥락이려나? 그럼 어쩔 수 없고……. 차가운 두뇌에서 증기가 응결되어 감각의 통로가 차단되는 것처럼, 그들도 좀 여유를 가졌으면 했다. 이건 특히 가브리엘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여간 자발스러운 게 아니니까. 작가가 <차를 마시며 배우다>란 장(章)을 중심으로 거푼거푼 산책을 했듯 그도 그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파리 식물원에서 그녀의 손에 손가락을 갖다 댄 그 '움찔'이란 반응 이후 그가 보여준 행로는, 그나마 클라라와 앤이라는 소담스럽고 안정된 산맥으로 인해 조절되었으니까 말이다(그래서 난 사실 엘리자베트보다 두 할마시들이 더 좋다니까). 켜켜이 쌓인 사랑의 일기를 넘겨보려면 때로는 가만히 앉아 침전하는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누구도 이 소설 같은 사랑을 당해낼 재간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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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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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기랄. 코벤 씨(머리털 없는 사진을 보니 왠지 '씨'라는 의존명사를 안 붙이기가 뭐하더군) 때문에 담배 피우는 걸 깜박했다. 어쩐지 2분의 1을 읽고 잠시 시계를 봤을 때 몸에 기운이 없더라니.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게 코벤을 읽어보라고 권했지만 오히려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ㅡ 오, 그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어쨌든 코벤 씨, 책 참 잘 썼어. 그전에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을 좀 짚어보겠다. 정신병자가 된 프린스턴 졸업생 켈빈 틸퍼의 입에서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키치적 문장, 초반에는 확신하다가 나중에는 의혹으로 전환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웬디 타인스식 캐릭터의 메커니즘, 굳이 등장시킨 스타벅스의 그 이름도 우스꽝스러운 얼간이 래퍼 텐 어 플라이(ten-a-fly), 웬디가 듣는 음악의 제목들 ㅡ 이를테면 스라이빙 아이보리 밴드의 「Angels on the Moon」, 윌리엄 피츠시먼즈의 「Please Forgive Me」 하는 식으로 소설 속 인물이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독자에게 알리려는 문장 말이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에 슬립낫이 나오는 것처럼. 나는 이런 패턴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ㅡ 기타 등등.



이제 앞서 언급했다시피 내게서 담배를 빼앗을 정도로 마음에 든 점을 적어야겠다. 이런 스릴러물이 자랑하듯 무절제한 속도감은 마약을 향해 달려가는 경찰견의 뒷다리에 모터를 달아준 것처럼 느껴진다. '재미있는 책'의 정의는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는』은 읽어나갈 페이지가 적어지는 게 아쉽다기보다 어떻게든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끝장을 보고 싶게 만드는 쪽이다. 굳이 OMR 판독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 학생의 답안지가 어떨지 상상이 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풍경 묘사로 종이를 허비하는 쪽이 아닌, 알 수 없는 결말과 파워풀한 장르적 특성이 버무려낸 가독성이라 생각한다(이런 말은 너무 상투적인가? 어쨌든!). 또 하나 소설은 익명성과 파괴성에 대한 초상화를 제공한다 ㅡ 인터넷의 위험성과 낙인효과. 『변신』· 『파리 대왕』 그리고 『투명 인간』 · 《반칙왕》에서의 외모 변화가 가져오는 인간심리와 가면 뒤에 숨은 익명성의 폭력, 자유스러움. 영화 《반칙왕》을 조금 꼬아서 보자. 주인공 대호가 반칙왕이 될 수 있는 건 익명성 때문이다. 같은 구조로써 인터넷은 욕망의 바다로 변모한다. 대호에게 가면은 목숨만큼이나 중요한데, 오직 그 속에서만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반대로 보면? 가면을 뒤집어쓰면 저게 내 아버지인지 어제 내 성적표에 F를 뿌려댔던 안경잡이 교수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면의 주인공은 자유와 해방을 맛보지만(물론 진심을 말할 수 없는 단점도 있다) 상대방은 그 탈개인화로 인해 자신의 현실성이 무너질 따름이다. 스스로의 악의적 행동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책임을 익명성이라는 원웨이 미러(one-way mirror) 뒤쪽에 던진다 ㅡ 사실 웬디 역시 자신에게 보이는 앞면만을 이용해 덫을 치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 덫에 빠지기도 한다…….



코벤(씨)의 『용서할 수 없는』과 영화 《밀양》에는 '용서'라는 모호한 이름이 공통분모로서 버티고 있다. 물론 서로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인간이 하는 용서와 신이 하는 용서라는 점에서 그런 것인데, 둘 다 원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복수를 하거나 용서를 하는 것뿐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걸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용서는 인간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한다(그럴 수밖에 없다). 바로 나를 위해서다.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데, 영상이나 텍스트를 빠져나와 현실세계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귀결이 쉬 가능하겠냐는 거다. 공포영화나 범죄영화를 보고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건 현실에서는 나에게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 그레이슨은 웬디에게 말한다. 내 자식이 전사자 명단에 오를 확률이 적을 거라 여기기 때문에 전쟁터로 내보내는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거라고. 코벤의 소설은 현실에서의 가능성이 적은(을) 확률, ㅡ 「설마 나는 아니겠지!」 ㅡ 이런 스릴러의 특질과 용서라는 잘 연결되지 않음직한 명제를 골랐다. 뜨악하게도 소설에서 '사냥의 희생양이 된 스카페이스'는 너무나 선선하게 보일 정도로 '용서할 수 없는'을 '용서할 수 있는'으로 바꿔놓았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책의 카피 문구처럼 「용서할 것인가? 단죄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뭘 믿을 것인가?



덧) 써놓고 보니 두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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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ㅣ 홍신 세계문학 8
A. J. 크로닌 지음, 김성운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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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직 정신 하나만으로도 신앙 한가운데에 계속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정신은 항시 깨어있어야 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어떤 자명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신앙 자체보다 지속적으로 신앙 속에 있으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막스 피카르트가 그의 책 『침묵의 세계』에 쓴 말이다. 나는 이 문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서 나타나듯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성채’ ㅡ 그의 다른 작품 『성채』의 주인공처럼 ㅡ 를 좇는 인간의 세계관과 어렴풋이 닿는 것 같기도 하다……. ‘이성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앙이 먼저인가?’ 이 물음은 ‘인간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이 먼저인가?’ 라는 의문과 궤를 같이 한다. 소설 속에서 어린 시절 종파가 다른 부모님을 보며 「왜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놔두지 않는 것일까?」 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프랜시스의 독백은 종교와 믿음이라는 화두의 속병에 접근하고 있다. 나는 오컴의 ‘하나님이 가진 전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보편자는 오직 정신 속에서 사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에는 찬성한다. 그런데 소설에는 개개인의 사유를 한 가지 형태로 끄집어내고 집합시켜 사람들을 오도하려는(이를테면 ‘마리아의 샘’)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불[火]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은 오히려 어두컴컴할 때가 아닌가? 수천 개의 말이 뒤섞여 마치 신비의 경이로움처럼, 혹은 수천 개의 번잡함으로 인해 침묵하지 못하고서 뭔가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혼탁한 한숨처럼, 크로닌은 프랜시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과연 자기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명제를 그리려고 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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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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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패턴이 그랬고, 프레임 자체도 어딘지 모르게 단조로운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범타인지 잘 맞은 안타인지 좀체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작품 「이십 년 뒤의 숙제」를 읽으며 생각했다. 답장에 대한 답장이란 형태도 중요하지만 일방적 독백에서 발견되는 '시간과 공간의 단절'과 '마음의 기대'란 측면에서 보면 어떨는지, 하고. 『왕복서간』과의 접점은 없지만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레드(모건 프리먼)의 「지질학은 압력과 시간의 연구」라는 독백이 흐른다. 앞서 말했듯 패턴은 빤하지만 거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역시 '시간'이다. 사건의 시발과 한참 후의 소회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답장을 받고 재차 편지를 쓸 때까지 생각을 추슬러 펜을 잡는 시간의 공백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내가 보기에 시간의 흐름이란 질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또한 타자가 없으면 미래란 불가능하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내 삶은 타자의 시선 혹은 타자로 인해 과거와 미래가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전혀 달라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ㅡ 타자와 관계하지 않으면 나의 내일은 오늘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과연 소설 속에서의 편지라는 것으로 내 생각을 오해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 메를로 퐁티의 논의처럼 「말하는 사람의 말은 생각 자체이므로, 말하는 동안에(편지를 쓰는 동안에)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남과의 의사소통으로 인해 절망에 노출되기 쉽다고 해도 침묵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을 넘어 그렇지 않은 것까지 써내려가고 있다. 여기서 재등장하는 것이 '일방적 독백'이다. 답장이라는 것을 보면 타자와의 의사소통은 쌍방의 모양새를 띠지만,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그 편지를 보낸 상대로부터 답장을 받을 때까지 시간의 단절이 발생한다(물론 '과거의 일'과 '현재'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 상대방과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야말로) 그 시간의 단절이란 빈 공간에서 더욱 더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는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말이다 ㅡ 수록작 「십 년 뒤의 졸업문집」에서는 교묘한 위장도 가능했으니.



덧)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로 수록된 「이십 년 뒤의 숙제」가 가장 흥미로웠다. 여기에는 소담스런 반전까지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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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 - 1
신아인 지음 / 아이웰콘텐츠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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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살이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으니 '1535'의 뜻을 적어보자면, 이것은 쇳덩이가 불에 녹는 온도를 말한다(얼마 되지 않는 내 지식으로는 순수한 철을 기준으로 할 때다) 책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한일단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신분 확인 암호가 바로 이 '1535'란 숫자다. 쇳물이 녹아드는 온도 1,535℃, 누군가는 그 쇳물로 피를 거두기 위한 칼을 만들었고, 다른 이는 그 칼끝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산다(2권 p.455) ㅡ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매일 쇳물을 붓고 두들겨 무기를 만드는 경성대장간이 있다.



① 만일 조선철도를 역행하는 지하통로가 존재했다면?

② 만일 자살권총으로 통하는 일본군의 94식 남부권총이 조선인의 철저한 계획에 의해 제작된 거라면?

③ 지배자 위에 선 조선인, 일본인들을 쥐락펴락하는 조선귀족이 존재했다면?

④ 총독을 암살하려는 일본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독립군이 있다면?



작가가 말미에 써놓았듯 『1535』에는 크게 위와 같은 4가지의 가설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지배자 위에 선 조선인 정민석'이란 인물은 총독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 거의 슈퍼맨처럼 그려진다. 영웅담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필수적 요소는, 히어로는 항상 고독해야 한다는 거다. 정민석 역시 매국노 아비를 둔 조선 최고의 친일귀족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주목했던 점은 네 번째 가설이다. 소설에서 총독은 책상에 앉아 결재나 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해서, 정민석의 헤게모니가 그들을 잠식함에 따라 일본 군부는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워 정민석을 위축시키려 한다. 물론 암살의 배후를 독립군으로 몰아가면서 말이다(그럼 독립군의 입장은 어떠한가 하면, 이거야말로 헤살이므로 여기에는 적지 않는다). 이로써 다소 낡아보일 수 있는 시대극이 멋진 활극으로 변모해 이야기에 힘을 부여한다.



덧) 개인적으로 느낀 아쉬움이라면, 서사들이 파편적으로 그려져 너무 시나리오적 냄새가 난다는 것. 또 하나는 곳곳에 설치된 지하의 비밀 통로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아서 다소 맥이 빠질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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