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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제기랄. 코벤 씨(머리털 없는 사진을 보니 왠지 '씨'라는 의존명사를 안 붙이기가 뭐하더군) 때문에 담배 피우는 걸 깜박했다. 어쩐지 2분의 1을 읽고 잠시 시계를 봤을 때 몸에 기운이 없더라니.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게 코벤을 읽어보라고 권했지만 오히려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ㅡ 오, 그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어쨌든 코벤 씨, 책 참 잘 썼어. 그전에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을 좀 짚어보겠다. 정신병자가 된 프린스턴 졸업생 켈빈 틸퍼의 입에서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키치적 문장, 초반에는 확신하다가 나중에는 의혹으로 전환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웬디 타인스식 캐릭터의 메커니즘, 굳이 등장시킨 스타벅스의 그 이름도 우스꽝스러운 얼간이 래퍼 텐 어 플라이(ten-a-fly), 웬디가 듣는 음악의 제목들 ㅡ 이를테면 스라이빙 아이보리 밴드의 「Angels on the Moon」, 윌리엄 피츠시먼즈의 「Please Forgive Me」 하는 식으로 소설 속 인물이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독자에게 알리려는 문장 말이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에 슬립낫이 나오는 것처럼. 나는 이런 패턴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ㅡ 기타 등등.
이제 앞서 언급했다시피 내게서 담배를 빼앗을 정도로 마음에 든 점을 적어야겠다. 이런 스릴러물이 자랑하듯 무절제한 속도감은 마약을 향해 달려가는 경찰견의 뒷다리에 모터를 달아준 것처럼 느껴진다. '재미있는 책'의 정의는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는』은 읽어나갈 페이지가 적어지는 게 아쉽다기보다 어떻게든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끝장을 보고 싶게 만드는 쪽이다. 굳이 OMR 판독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 학생의 답안지가 어떨지 상상이 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풍경 묘사로 종이를 허비하는 쪽이 아닌, 알 수 없는 결말과 파워풀한 장르적 특성이 버무려낸 가독성이라 생각한다(이런 말은 너무 상투적인가? 어쨌든!). 또 하나 소설은 익명성과 파괴성에 대한 초상화를 제공한다 ㅡ 인터넷의 위험성과 낙인효과. 『변신』· 『파리 대왕』 그리고 『투명 인간』 · 《반칙왕》에서의 외모 변화가 가져오는 인간심리와 가면 뒤에 숨은 익명성의 폭력, 자유스러움. 영화 《반칙왕》을 조금 꼬아서 보자. 주인공 대호가 반칙왕이 될 수 있는 건 익명성 때문이다. 같은 구조로써 인터넷은 욕망의 바다로 변모한다. 대호에게 가면은 목숨만큼이나 중요한데, 오직 그 속에서만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반대로 보면? 가면을 뒤집어쓰면 저게 내 아버지인지 어제 내 성적표에 F를 뿌려댔던 안경잡이 교수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면의 주인공은 자유와 해방을 맛보지만(물론 진심을 말할 수 없는 단점도 있다) 상대방은 그 탈개인화로 인해 자신의 현실성이 무너질 따름이다. 스스로의 악의적 행동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책임을 익명성이라는 원웨이 미러(one-way mirror) 뒤쪽에 던진다 ㅡ 사실 웬디 역시 자신에게 보이는 앞면만을 이용해 덫을 치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 덫에 빠지기도 한다…….
코벤(씨)의 『용서할 수 없는』과 영화 《밀양》에는 '용서'라는 모호한 이름이 공통분모로서 버티고 있다. 물론 서로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인간이 하는 용서와 신이 하는 용서라는 점에서 그런 것인데, 둘 다 원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복수를 하거나 용서를 하는 것뿐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걸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용서는 인간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한다(그럴 수밖에 없다). 바로 나를 위해서다.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데, 영상이나 텍스트를 빠져나와 현실세계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귀결이 쉬 가능하겠냐는 거다. 공포영화나 범죄영화를 보고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건 현실에서는 나에게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 그레이슨은 웬디에게 말한다. 내 자식이 전사자 명단에 오를 확률이 적을 거라 여기기 때문에 전쟁터로 내보내는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거라고. 코벤의 소설은 현실에서의 가능성이 적은(을) 확률, ㅡ 「설마 나는 아니겠지!」 ㅡ 이런 스릴러의 특질과 용서라는 잘 연결되지 않음직한 명제를 골랐다. 뜨악하게도 소설에서 '사냥의 희생양이 된 스카페이스'는 너무나 선선하게 보일 정도로 '용서할 수 없는'을 '용서할 수 있는'으로 바꿔놓았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책의 카피 문구처럼 「용서할 것인가? 단죄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뭘 믿을 것인가?
덧) 써놓고 보니 두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