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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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키치할 수도 있고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숨겨진) 아주 작은 코드를 언급하지 않은 것에서(놓친 것일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우리를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드는 것들을 설명해보려는 시도는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물론 우리 역시 매트릭스에 갇혀있다면 아무리 이런 논의를 해도 그 기계들은 코웃음을 흘리고 있을 테지만)ㅡ 토머스 앤더슨/네오와 사이퍼(배신자)가 공존하는 이 미망(迷妄)의 현실세계에서 말이다. 이를테면 네오의 매트릭스 안에서의 이름 토머스/예수의 부활에 의구심을 갖는 제자 '의심하는 토머스', 탯줄 같은 케이블을 뽑아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네오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육된다'는 점에서의 처녀 잉태, 죽은 네오를 부활시키는 트리니티/trinity(삼위일체), 그들이 타고 다니는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호에서부터 매트릭스 안에서 고치처럼 웅크린 자들의 '인간 발전소'와 같은 모습, 이러한 기독교적 명제와 더불어 불교적 교리까지(휘어지는 숟가락 등). 물론 이것은 영화에 집어넣은 주제들 중의 일부에 그친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내가 이걸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다 이게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고 말해 준다는 걸 알고 있다고. 9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에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무지가 바로 행복이라는 거야.」 스미스와 교섭하는 사이퍼의 대사다. 만약 우리의 뇌가 나머지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커다란 통에 담겨있고 컴퓨터가 전자 충격을 뇌에 보내 이런저런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실제 경험을 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고, 또 사이퍼의 배신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자유를 갖고 있으려면, 우리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만약 당신에게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지, 자유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27) 이 말은 맑스가, 노동과 그들이 생산하는 자본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자들은 작업 시간과 작업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용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도 그들 자신은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유 시장'에서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팔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오/사이퍼의 선택을 두고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네오마저도 자발적으로 빨간 약을 골랐다고는 자부할 수 없다. 만약 예언자(오러클)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면 그 미래 역시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나.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본다는 것은, 그것이 발생한 동시에(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므로) 발생하지 않았다(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ㅡ 게다가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다면 모피어스를 배신한 사이퍼의 결심 또한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 세계가 변화할 뿐이지 그것이 진화나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변화’라는 범주 안에 진화와 진보가 속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수상쩍게 생각한다……. 지젝에 의하면 엘리베이터에 있는 닫힘 버튼은 실제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고물이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에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높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기여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결국 문은 닫힐 것이므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빨리 움직이도록 어떠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참여'에 빠져있다.(p.315)




덧) 영화는 1999년에 만들어진 단 한 편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네오의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W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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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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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적으로 '우연'에 집착한 「우연 여행자」를 시작으로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노골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개인적으로 내 취향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인데, 그에 반해 「하나레이 해변」이나 「시나가와 원숭이」는 꽤 괜찮았다. 하나레이 해변에서 상어에게 오른쪽 다리를 물어뜯겨 죽은 아들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하나레이 해변」은 유독 그 색감 때문인지 시종일관 우울한 기운이 틈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ㅡ 막바지에 다다라 '외다리 서퍼'의 목격담이 등장해도. 주인공 사치(어머니)는 하나레이에 집착하고, 서핑을 하려는 젊은이 두 명과 조우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지만 외려 어드바이스를 받아야 할 것은 그녀 자신이며, 아무것도 결말지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나고 만다. 「시나가와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드러난 진실은 원숭이가 그녀의 집에서 이름표를 훔쳐갔기 때문이라는 것. 「하나레이 해변」과는 달리 일정 부분 매듭이 해소된 감은 있지만 이쪽 역시 다른 단편들과 같이 기이하게만 보인다. 하루키의 소설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식이다. 불가해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벌어져도 당하는 쪽은 여간해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에 천착해 제 삶을 팽개치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든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겪어 온 삶에 있어 방관자인 동시에,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서도 (무지막지할 정도로) 철저하게 일상의 공기에 그 흐름을 맡긴다. 소위 하루키 문학(이라고까지 부를 건 없지만)은 메타포를 숨겨 놓든 그렇지 않든 겉으로는 무미건조한 것이며 그 속에는 심리적 결핍, 무심함(과 책무) 그리고 서브컬처에서 오는(혹은 그쪽을 향하는) 특질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극한 상황에 도달하면 다시 돌아온다는(혹은 이 세계의 메커니즘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극즉반(極則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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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영국식 살인의 쇠퇴 위대한 생각 시리즈 6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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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레옹(『동물 농장』)과 빅 브라더(『1984』)에만 급급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오웰이 썼던 소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글들도 속속 번역되어 왔다. 이 『영국식 살인의 쇠퇴』도 그런 맥락 위에 서 있는데 과거 이런저런 에세이를 묶은 책에 포함되었던 글이 중복되기도 한다(어쩔 수 없는 일일까)ㅡ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글을 이미 여러 번 읽은 셈이며, 심지어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글들은 그 성격이 일관성 있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켜 중구난방의 편집을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살인의 쇠퇴』를 읽는 자들의 공통된 이유는 (장담하건대) 저자가 오웰이라는 점일 터다. 그렇다면 왜 오웰인가? 그 연유는 특히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의 영향이 지배적임에 틀림없다. 오웰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인간들을 그림으로써 독자들에게 투쟁의 대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이 세계를 둘러싼 현상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짚어내는 것에 자질이 있었으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까지 터득했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세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누가' 알려줄 수 있는지를, 소위 문학성이 담보된 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환멸에의 각성을 꾀하도록 도왔다(그중에서도 《트리뷴》지에 썼던 고정 칼럼 <As I Please(나 좋을 대로)>는 ㅡ 말 그대로 '오웰 마음대로' ㅡ 짧은 호흡으로 보다 큰 울림을 선사한다). 또한 식민지 경찰과 부랑자, 접시닦이 등을 거친 그의 손은 '예술이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나는 이 책에 대해서(적어도 오웰의 글 자체에 관해서만큼은) 이러쿵저러쿵하며 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오웰'이라는 단어 자체를 읽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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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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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개 적 '통닭'이었던 것이 '치킨'으로 불리고 기름기 좔좔 흐르던 포장지는 피자 박스처럼 변했지만(물론 어디선가는 '옛날 통닭'이런 것을 지금도 튀겨주기는 한다), 닭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1인 1닭'을 외치는 이들도 있는 만큼 조류 독감과 같은 재앙이 닥쳐올지언정 이런 닭에 관한 탐구 역시 존재하질 않나ㅡ 실제로 나는 군 시절 조류 독감이 한국을 휩쓸었을 때 점심 식단으로 '1인 1닭'을 몸소 실천한 바 있다(광우병 파동 때도 마찬가지). 담배 한 개비 피우고자 아파트 동(棟) 밖으로 나와 치킨 배달 오토바이와 마주쳤을 때의 부러움과 돌아나오는 그의 등짝 뒤로 엘리베이터에 그득한 기름 냄새의 황망함. 나도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찰나, 집에 모셔둔 쿠폰이 몇 장 남았는지를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헤아리고 있는 쓸쓸함(치킨게임 ㅡ chicken에는 '겁쟁이'란 뜻이 있다 ㅡ 으로 닭을 모독하는 자, 그대에게 화 있을진저!). 책은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고 치킨의 역사와 종류, 현주소를 탐방하기도 하며 치킨 산업의 뒤통수를 보여주기도 한다ㅡ '아버지가 월급날 사오셨던 통닭'이란 개념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면서(그러나 그것은 소위 '양념통닭'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양념통닭이란 것을 먹으면서 이런 소스는 대체 누가 만들어낸 걸까, 하며 발을 동동 굴렀던 적이 있다. 위에는 땅콩 가루도 담뿍 흩뿌려진 따끈따끈한 악마의 메뉴 말이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 역시도 양념을 손에 묻히기가 싫어져 후라이드치킨(언제고 '프라이드'라 부르는 우를 범할 수는 없겠다)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제는 양념소스를 따로 갖춘 메뉴들이 자리를 잡았다. 파를 올리는가하면 기존의 달착지근한 양념이 아니라 새로 개발된 요상한 소스도 있고, '강정'이나 '순살'로 변신하기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요즘 후라이드라 부르는 어지간한 치킨은 '크리스피 치킨'이란다ㅡ 바삭함을 뜻한다고. 그러면서 90년대 초반 KFC에서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BBQ, BHC, 치킨시장의 새로운 강자 네네치킨(튀김옷이 과하지 않은 것이 포인트)으로 이어지는 애통의 역사 ㅡ '치맥' 개념의 등장까지 ㅡ 를 설파한다. 이른바 '통큰치킨'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나는 거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물론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기다란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뻣뻣하게 기다려 손에 넣었을 때 이것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며 자위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값싼 것이라도 우리가 거실의 다 헤진 가죽 소파에 앉아 전화번호 두드려가며 시켜 먹던 그 맛도 아닌데다가 ㅡ 통큰치킨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보급형'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ㅡ 그간 익숙해져 있던 '배달 치킨'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소상공인과 소비자, 소위 상도덕, 극에 달한 치킨업계의 경쟁에 있어 이례적인 대동단결의 결과 통큰치킨은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당시 인터넷상에서는 '통큰치킨 장례식'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인 김수영의 양계(養鷄) 경험까지 들쑤신 이 책은 어쨌거나 치킨의 역사를ㅡ 양계농민, 프랜차이즈 치킨점, 예비 창업자에 이르기까지를, 현재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벌어질 애환을 섞어 다채롭고도 씁쓸하게 다룬다. 치킨은 지금, 야구장에서 맥주 캔으로 탑을 쌓아가며 소비된다. 혹은 각 가정에서ㅡ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니까 전화통을 붙들고 치킨을 주문한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치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치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치킨을 먹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누가 만들고 누가 키우는가 하는 문제, 우리가 야식이라는 이름 아래 곧잘 접하게 되는 치킨이 누군가에게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바로 그 문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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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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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살렘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 열병(熱病)의 땅에 히친스(『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읽어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광기 충만한 언덕 위의 도시― 아랍인의 함락,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 밸푸어 선언에 이은 첨예한 마찰,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양분과 재점령, 2차 대전 이후 다시 세워진 이스라엘과 갈 곳 잃은 유대인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분쟁,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슬픔이 집약된 통곡의 벽……. 예루살렘의 대표적 유적지 중 하나는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라고 한다. 예수가 안장되었던 묘지에 세워진 것으로 ‘십자가의 길’의 제10지점부터 제14지점까지가 이 교회 안에 위치한다고(1~9지점은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곳). 다시 말해 성묘 교회는 골고다 언덕 위에 있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너나없이 묘지에 입을 맞추고 언덕에 오른다. 그런데 심지어 이 교회를 여러 종파가 나누어 관리하고 있단다. 옛 골고다 언덕과 중앙 예배당은 로마 가톨릭교에서,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또 다른 기념 묘지는 콥트 교파에서, 또 다른 주요 장소들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교회의 열쇠는 이슬람 측이 가지고 있다. 교회 하나마저도 이렇듯 나뉘어 있으니 솔로몬이라고 어찌 판결을 내릴 것이며 나머지 것들은 어떻게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이 공중으로 붕 떠버린 도시에 닿기 위해 사람들은 이 땅뙈기(라 지칭해 미안하지만)를 서로 제 것이라 하고 있다.




이스라엘인-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무슬림이라는 두 경우 모두 각기 상대의 파멸을 종말의 전제로 삼음으로써, 깊이 가라앉아 있던 묵시종말론적 기류가 표면으로 떠올랐다 (...) 영토 때문에 시작된 전쟁은 우주를 놓고 벌이는,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자기최면적 전쟁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 그러므로 우리의 주제는 종교 이상이기도 하고 이하이기도 하다.


ㅡp.498~499




어디 종교적 상징성의 측면이 이것뿐일까.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 어머니의 도시이자, 유대교의 ‘통곡의 벽’ 이후 약속의 땅으로, 또 그리스교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땅이다. 고대부터 중세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기를 머금은 자들이 숱하게도 혀를 날름거렸던 바로 그곳이다. 『예루살렘 광기』는 이 ‘종교적 폭력의 본거지’를 철저하게 궤를 같이한 (종교적)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고(이 많은 것들을 어찌 다 말할까) 또 이러한 색채를 띤 이야기를 거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한다. 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다윗이 정복해 수도로 삼았지만 이후 나라 자체가 두 개로 갈라졌다. 그러나 훗날 그리스인들이 예루살렘 일대를 재정복하고 유대교에 그리스 문화를 접목시켰지만 유대인들에 저항에 의해 재차 그들의 도시가 되었고, 거듭 로마의 헤롯이 왕의 자리에 오른다. 성전에 발을 들인 예수는 예루살렘을 두고 ‘선지자들을 돌로 죽인 도시’라 한탄하고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 그리고 예수 사후 반란을 진압한 로마의 성전 파괴, 3세기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세운 교회(여기에 ‘십자가의 길’이 속해 있다)까지― 지상에 존재하는 예루살렘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천상의 예루살렘 중 어떤 것이 그 실체일까? 저 옛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으로 그려 넣었던 지도는 존중의 의미일까 아니면 정복의 야심일까? 나아가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는 돌아온 탕아들의 다툼으로만 봐야 할까?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으며 「마이크 타이슨이 아기를 두들겨 팬 뒤 ‘이 아이가 나에게 침을 뱉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일컬어지는 가자지구 폭격은 어떤 종교적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까? 캐럴의 집요한 추적은 『예루살렘 광기』로 만들어져 종교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종교가 아닌, 광기 어린 폭력의 역사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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