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 독서에 관하여 위대한 생각 시리즈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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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 인권 선언이란 것이 있는데, 그중 제7조 항목에 이런 말이 있다. 「백수는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 사회는 백수의 문화생활 진작을 위해 노력할 책무가 있다.」 나도 백수이긴 하나, 또 하물며 백수라 해도 문화생활을 누릴 만한 정신적 여유는 가져야 온당하다. 특히 나는 책에 대해서는, 그것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공공의 미(美)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독서에 관해 설파한 것과 달리 내겐 '잃어버린 10년'이 존재한다. 십대 중반부터 이십대 중반 즈음까지, 교과서와 강의에 쓸 것이 아니면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는 것은 두루뭉술한 표현이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한 권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주 고리타분하고 청맹과니 같은 생각에서 기인한 것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꽤 무서운 일이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도서관이란 것을 처음 보았고 그때부터 그 언저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규모가 더 큰 도서관이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던 이 습성은 내게 한 가지 우울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 세계에 있는 책, 내가 읽고 싶은 모든 책을 죄다 내 방에 들여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입지로 보건대 어느 쪽도 충족하지 못했던, 책이란 것은 모름지기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을 시절의 발상이었다. 때문에 나는 일종의 리스트를 작성하게 되고 그때부터 부러 책을 읽지 않았다(일종의 시위였던 걸로 기억한다). 작가와 책 제목, 출판사, 출간연도를 적는 메모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물론 그 시절과 달리 꽤 책을 많이 읽고 있다. 내 '잃어버린 10년'이란 그때의 우울감에서 발생했다. 지금 당장 여력이 없으니 리스트를 만들어 어른이 되었을 때 모조리 다 읽어보자, 하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웬걸, 나는 절판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 대체 한번 만들어진 책이 왜 사라진단 말인가? 어릴 적 만들었던 메모를 지금 펼쳐보면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책들이 부지기수다. 누구도 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줄 수는 없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프루스트가 쓴 「독서에 관하여」는 실은 존 러스킨의 책을 번역하며 쓴 역자 서문이다. 서문치고는 꽤 장문이나 그가 책과 독서라는 행위에 관해 적어놓은 생각들이 정겹기만 하다. 「독서가 그것 없이는 들어가지 못했을 마법의 열쇠로서 우리 내부에 위치한 장소들의 문을 열어주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독서는 우리의 삶에 유익하다.」 도대체가 나는 스스로 내 인생에서 10년(혹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이라는 시간을 지우고 뭘 했단 말인가? 내 감성에 불을 켜 줄 마법의 열쇠를 스스로 마다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프루스트가 독서를 중단하고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만 했던 길디긴 점심식사를 저주하는 것만큼이나 나 역시도 독서에 관한 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누군가 말을 걸어 독서를 방해하는 것에서 그가 보였던 반응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독서란 적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우정이고 그 대상이 죽은 자, 사라진 자라는 점은 사심 없음을 증명해 감동적이기까지 한 것이므로ㅡ 덧붙여 그는 독서를 추한 면을 보이는 다른 우정들에 비해 자유롭다고 말한다. 책이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독서라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자신과는 다른 영혼이 개입하되 혼자 있을 때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p.37), 그리고 게으른 정신을 가치 있는 세계로 영구히 끌어들이는 임무를 띠는 것이다.(p.35) 내가 지나칠 정도로 수상쩍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잃어버린 10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내 게으른 정신은 여전히 그때의 어린 꼬마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어릴 적 프루스트는 길었던 점식식사를 뒤로하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야 만다. 그러고는 자신의 안에서 오랫동안 벌어진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방 안인지 밖인지 어디에 시선을 고정시켰는지 모른 채로 일어나 침대를 돌며 걷는다. 내일이면 잊힐 페이지 위의 어느 이름에 불과할 존재들이라고 해도, 자신이 탐닉하던 책을 무사히 끝장 보았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하고 대단한 일인가! 「우리의 어린 시절을 이루는 날들 중에는, 우리가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고 여겼거나 좋아하는 책과 같이 보낸 날들만이 어쩌면 진정으로 충만하게 보낸 날들이다.」 프루스트가 쓴 글의 첫머리이다. 맙소사, 내게 있어 진정으로 충만했던 날들은 언제였었나?



사족) 그런데 참 희한하지. 어째써 한번 빌려준 책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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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샹떼>
평소 강신주의 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너무 이상적이어서 때로는 공상적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이 책도 철학적 시선이니 인문학적 통찰이니 뭐니 하고는 있지만, 그나마 영화 속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풀어놓고 있기 때문에 그의 다른 인문서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듯.


<더 매거진 북>
말 그대로 방대한 현대 잡지라는 출판물에 관한 책. 매거진의 정의와 그 프로젝트에 따른 독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흥미롭다. 무엇보다 정기 간행물이라는 측면에서 여타 단행본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최근 한 달간 출간된 것들 중 가장 관심이 가는 책.


<텍스트와 타이포그래피>
타이포그래피 안내서. 활자의 역사도 보고, 폰트와 이미지, 컬러 등의 각론도 본다.


<마르크스 엥겔스 문학예술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술에 눈을 댄 그들만의 소양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술의 본질과 바로 그 예술이란 것의 사회적 임무와 목표, 진정 예술은 공공의 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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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신화로 말하다
현경미 글.사진 / 도래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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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제국 황제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만들었다던 타지마할. 이를 넘는 인도에 관한 이야기라고는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대학 시절 수상쩍은 책을 읽다가ㅡ 인도에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에, 입보다 손으로 먼저 음식을 느끼기 위한 '사치 부리기'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보다 더 괴상하게도 나는 어릴 적부터 사찰이나 불구(佛具), 이슬람과 힌두 문화에 묘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집 밖에 나서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만 돌리면 예닐곱 개나 되는 십자가를 볼 수가 있는데,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십자 모양 네온사인을 보면서 정체를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알지도 못하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만 기분을 느껴 외려 그쪽에 반감이 들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읽으면서부터는 팔이 두 쌍 이상 달린 힌두교 신들이 그렇게나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아직도 브라마(Brahma, 창조주)인지 비슈누(Vishnu, 보존자: 영화 《아바타》의 모델이란다)인지 시바(Shiva, 파괴자)인지 꼭 맞게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다만 재물을 관장하는 신 락슈미(Lakshmi)와 시바의 아들 가네슈(Ganesh)만큼은 확실히 알 수가 있고, 그 때문인지 이 두 신에 가장 흥미가 동했다. 부의 상징인 락슈미는 연꽃 위에 오른 풍만한 몸매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락슈미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히 재물을 관장하기 때문인데, 단지 부를 가져다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게으르고 낭비를 하거나 겸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모든 재물을 거두어 간다고 한다. 그러나 외양만으로 보자면 가네슈가 주는 강한 인상을 따라갈 수 없을 듯하다(개인적으로도 가네슈에게 더 흥미를 느낀다). 가네슈는 파괴의 신 시바의 아들인데, 시바가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 악업, 무지 등이다.(p.23)






이 파괴의 신의 아들인 가네슈는 일단 코끼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몸은 사람의 것인데 조그만 쥐를 타고 다니며, 인도 사람들은 풍요와 지혜의 신인 가네슈가 장애물을 제거하고 복을 준다고 믿는단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쪽 상아가 부러져 있다.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를 받아 적기 위해 자신의 상아를 잘랐다는 전설 때문인데 신이 제 뼈를 잘라 필기구로 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희한하고 기묘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 어떤 문화(권)의 어떤 신(화)이건 사후세계와는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볼 때, 대개 그 이야기는 '이러하면 복을 받고 저러하면 벌을 받는다' 쯤이 될 거다. 특히 힌두교의 장례에서는 화장한 뒤 뼈와 재를 강물에 흘려보낸다는데 처음의 불[火]은 해탈과 해방을, 나중의 물[水]은 윤회와 재탄생을 뜻한다. 여기엔 아예 처음부터 인간 영혼이 이 두 가지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말을 끌어와도 죄를 범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사후세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는 ①종교가 인간생활에 있어 별 효용이 없거나 ②종교의 교리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사회가 유지되거나, 이 둘의 논리 사이에서 언제나 휘청이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힌두교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종교에 대해 이렇다 할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나름대로 인간 삶에 재미와 즐거움을 준다면 그저 그걸로 됐다는 입장이다. 언제 어디에서건 대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내가 힌두 문화에 대해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그것이 이 세계에서 확인되지 않을 때 더 신기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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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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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껏 재며 고독한 척은 혼자 다 하는 해리. 알코올뿐 아니라 범죄 자체에도 중독된 해리. 그래도 끝내 소위 '오슬로 3부작'이라는 미니시리즈의 마지막 능선을 넘으며 두 개의 범죄가 마무리된다. 하나는 『데빌스 스타』만의, 또 하나는 『레드브레스트』와 『네메시스』를 이어 비로소 완결되는 내부 속의 내부의 문제. 여기서 해리가 가부좌를 겯고 앉아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계시라도 받으려는 듯 틀어놓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이 재미있다. 설명대로 영화 《컨버세이션》에서 진 해크먼이 야간 버스에 앉아있는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인파가 넘치는 공원에서 특정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는데 『데빌스 스타』에서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원이라는 장소가 심심찮게 무대로 활용되고 있고, 심지어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 이름 역시 모두 '해리'로 같기 때문이다ㅡ 그리고 양쪽 다 공원이라는 개방된 공간 속에 숨겨진 은밀한 작업이 부각된다, 영화 속 해리는 버스에 앉아 타인들과 격리된 고독을 느끼며 소설 속 해리 또한 마찬가지로 여름의 땀 속에서 자신을 황폐화시킨다. (허황한 개똥철학은 여기까지만) 그런데 실은 『데빌스 스타』의 본줄기는 아주 단순하다. 전작들에 비해 정치적이거나 심각한 정립의 문제 따위는 없고,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처럼 시원시원하다ㅡ 그저 연쇄 살인범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므로. 이런 단순한 구조(構造)를 구조(救助)하기 위한 방편은 전작들에서 이어져 또 다른 비중으로 간섭하는 사건일 텐데, 바로 <해리 홀레 vs 톰 볼레르> 요소이다ㅡ 연쇄 살인범과 톰을 비교하면 어느 쪽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있다. 물론 이쪽도 고전적 클리셰 냄새가 짙게 나지만 그 클리셰를 상쇄하기 위한 클리셰가 들어있기도 하다. 시종일관 톰은 해리로부터 사정 대상 1호라는 분위기를 자아내 독자는 어떻게든 그 빌어먹을 작자가 법의 심판대 앞에 서기를 바란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리거나. 그런데 희한한 건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톰이 마지막에 가서는 악당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는 거다. 어찌 보면 괴물을 쫓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해리(정말 그럴까?)와는 달리 이자는 진정한 악당은 되지 못할 팔자인 것만 같다. 비유가 다소 꼭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김기덕의 《악어》에서 이와 비슷한 느낌의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용패라는 인물은 물속에서 여인과 자신의 손에 수갑을 한쪽씩 차고 있고(그는 죽으려 한다), 시간이 잠시 흘러 죽음(익사)의 고통을 참지 못한 그는 수갑을 끊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그대로 죽고 만다. 추잡한 죽음이다. 이처럼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톰 역시 끝에 가서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고 마는데, 이로써 배트맨과 한 쌍인 조커와 같이 일관된 믿음과 자아 드러내기를 거리끼지 않는 인물은 톰 쪽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직업처럼 예술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데빌스 스타』는 이 단일 소설만의 이야기, 동료의 죽음에 있어 비로소 끝장을 보는 해리의 이야기, 해리 자신의 정신적 부침(浮沈)의 이야기, 이 세 가지 줄기로 갈라지는데, 어딘지 모르게 앞의 소설들을 다소 힘겹게 읽었던 터라 굉장히 깔끔하고 단출하게도 느껴진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과연 시버첸 부인의 하숙인의 등장이 꼭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는 것과, 진심을 담아 고백하건대 시리즈의 주인공 해리보다 택시기사 외위스테인 쪽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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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5-04-1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는말그대로악을쫓다스스노악에물들어가는인물이고 프린시는악에물든해리의또다른인생의하나가아닐까하는생각이드네요결국자신의손으로모든일을해결하러고하는ㄱ모슨도그렇고

그레코로만 2015-04-19 10:4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가면 갈수록 배트맨처럼 안티히어로의 모습이 부각되는 것 같아요.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김봉석 지음 / 북극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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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한 개마다 책이나 영화를 추억하는 김봉석의 이야기ㅡ 무턱대고 쌈마이스럽거나(덜 유치하게 표현해 B급에 가깝거나) 순간순간의 소비적 오락에 취해 진득하니 표류하거나. 그는 사춘기 시절 강해지고 싶다는 이유와 함께 자연스레 접하게 된 이소룡, 성룡, 이연걸을 꼽는데, 미안하지만 난 그쪽보다 헤싱헤싱한 적룡이 등장하는 《영웅본색》을 더 좋아한다. 기억할 수 있는 한 그 영화를 열 번 이상 보았고,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말하면 도합 서른 번 이상 본 셈이다. 죠스바 국물 뚝뚝 떨어지는 피 칠갑의 면상과 괜히 어깨에 힘주게 되는 멋진 대사들을 따라올 영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소룡 쪽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무시무시한 갈고리와 맞짱을 뜨는 《용쟁호투》의 일명 '거울 신', 《사망유희》의 허위허위 잘도 싸웠던 꺽다리 흑인,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으며, 명절만 되면 죽지도 않고 찾아오는 성룡도 싫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늘 주윤발의 성냥개비 속에 표류해있었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나온다면 할 말은 없겠지, 나나 김봉석이나. 하지만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는 '그래서 이러이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땐 그래서 그랬(을 거)다' 하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 김봉석이 팀 버튼의 영화 중 《배트맨 2》를 가장 좋아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물론 나도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마이클 키튼과 대니 드비토의 그 영화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왠지 조커보단 펭귄 쪽이 더 좋다). 그런가하면 학생운동 시절을 겪은 그가 하루키의 와타나베(『노르웨이의 숲』)를 떠올리는 것 또한 나와는 별상관이 없다. 그러나 세대는 다소 다를지라도 같은 8, 90년대를 보냈다는 점에서 심한 동질감을 느낀다(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어서 책장을 훌쩍 건너뛸 수 있는 선택의 기회도 주고 있다). 그런데 대체 나는 그 당시에 뭘 하고 있었을까? 보물섬, 만화왕국, 점프를 읽고 다이 하드나 리썰 웨폰 유의 영화를 보고 맥스, 나우로 대변되는 팝 일반을 들었다. 아버지의 쌈짓돈으로부터 얻은 마이마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어 들으면서 오토리버스의 신통방통한 기능에 혀를 내둘렀고, 게임보이를 이용하거나 오락실에 가서 줄기차게 캐딜락(본래 이름은 '캐딜락 앤 다이너소어')을 해댔으며, 문방구에서 파는 농구대잔치 스티커를 종류별로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가하면 인조인간 18호의 가족애에 감동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말대로 결코 시간은 멈춰지지 않을 거다ㅡ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저 옛날 기억을 끄집어내 떠벌리고픈 욕구는 더욱더 강해진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고, 다만 그 시절 우리가 열광하고 마음을 주었던 것들에 대한 소박하고도 거창한 소회 정도라고 보면 될 듯싶다. 인간 김봉석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내가 지내 온 것들에 대한 경이로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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