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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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의 피츠제럴드 사랑은 끔찍하다. 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도 피츠제럴드에 관한 에피소드가 (또!) 들어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어떻게든 유명해지고 큰돈을 손에 넣어야 했다는 것에 비해 하루키 쪽은 야구장에서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보며 소설가가 되자고 한 모양이니, 그런 면으로 보자면 이쪽은 어쩐지 박력이 조금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있다. 물론 독자들이 피츠제럴드의 글에 대한 신뢰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것처럼 하루키의 작품에도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뭐 어느 쪽이든 작가란 모름지기 글만 잘 쓰면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하루키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 혹은 가장 마음에 다는 것은 나에게는 단편 「토니 타키타니(トニー滝谷)」 쯤이 될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어째서 이름이 ‘토니 타키타니’여야만 했는가, 에 초점을 맞추면 더 흥미가 생긴다. 80년대 중반 하루키가 하와이를 여행했을 때의 일인데, 중고 할인매장에 들어갔던 그는 ‘TONY TAKITANI’라는 글씨가 인쇄된 노란색 티셔츠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역시나 ‘타키타니’라는 발음 때문이었는지 하루키는 글자의 주인이 일본계 미국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어 그 티셔츠를 구입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토니 타키타니」라는 단편이 탄생했고, ‘토니 타키타니’의 정체는 당시 하와이 주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위해 만든 옷이었다는 것이 십수 년이 흘러 밝혀진다. 일련의 메커니즘을 보면, 이렇듯 대부분의 소설은 별다른 계기 없이 우연찮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츠제럴드처럼 경제적으로 절실했기 때문에야말로 좋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그런 케이스는 드물지 않을까. 하루키의 편집자 중 하나는 ‘작가란 원고료를 받으면서 성장해가는 존재’라고 했다던데 왠지 피츠제럴드는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하루키란 작가는 어느 쪽일까 하는 것을 굳이 따져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개인적으로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소설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세이까지 그런 것은 아니니까, 지금도 어떻게든 하루키의 글은 끊임없이 읽고 있는 셈이다. 본인은 ‘당신 에세이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다, 흐물거리기나 하고 사상성도 없고 종이 낭비다’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렴 어때. 에세이란 다 그런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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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 봄꿈
한승원 지음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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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사원님 밥상에는 콩잎 반찬이 열두 가지요, 만호원님 밥상에는 감태 반찬이 열두 가지라……. 콩잎 반찬, 감태 반찬이 열두 가지씩인데, 그 밖의 반찬은 얼마나 많겠는가. 강진 고을, 보성 고을, 해남 고을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씩만 사는데, 장흥부에는 웬일인지 세 마리가 사네. 장흥성 안에 사는 부사가 그 한 마리요, 강 건너에 있는 벽사역의 찰방이 또 한 마리요, 남쪽 바닷가 회진성의 만호가 다시 또 한 마리네. 장흥부 사람들은 그 세 마리나 되는 호랑이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가진 것들을 모두 바쳐야 하므로 유달리 원한이 많네. 그래서 이 탐진강이 밤이면 우는 것이여.”(p.238) 전봉준은 우금치에서 패한 뒤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일본군에게 신상이 넘겨졌다. 그리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임을 당했다. 전봉준의 삶은 흔히 이런 말로 요약된다.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그의 개혁안이 갑오개혁에 부분적이나마 수용되었고 무장 항거 정신은 항일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점 또한 역사책은 빼놓지 않는다 ㅡ 또한 미숙한 형태의 코뮌(집강소)까지. 그러나 『겨울잠, 봄꿈』은 1894년 겨울, 전봉준이 민보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가는 여정만을 꾸미고 있다. ‘봄꿈’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볼까. ①봄날에 나른해져 깜빡 잠든 사이에 꾸는 꿈. ②달콤하고 행복한 것을 그려 보는 꿈. ③한때의 덧없는 일이나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어느 쪽이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누가 콩잎 반찬을 먹고 누가 감태 반찬을 먹든, 누가 땅덩어리 하나를 놓고 아귀다툼을 하건 간에, ‘봄꿈’이란 건 요원한 일일 뿐이다. “장군은 사진기 렌즈를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탐관오리라고 생각하고 똑바로 노려봐주시오.” 애초부터, 망나니에 의해 목에서 피가 솟구칠 때까지도 그런 눈빛이었을지 모른다. 녹두꽃(전봉준)이 떨어지니 청포장수(민중)가 울지 않을 수 있겠나. 고부 관아에 쳐들어간 후 나타난 안핵사 이용태로 불거진 또 한 번의 무장봉기, 그리고 기치로 내건 보국안민(輔國安民). 그때의 네 가지 군율은 이렇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를 깨끗이 할 것, 한양으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 ……이 역시 봄꿈이었던 것일까. 더욱 서글픈 것은 오늘날에도 우리는 봄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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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 몬스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8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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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작가의 『모르페우스의 영역』을 읽고 나서 후속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엔 『스카라무슈 문』이라는 실체가 있는(!) 작품을 연재 중이라고 하니 오히려 『나니와 몬스터』 보다는 그쪽에 거는 기대가 더 커졌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나니와 몬스터』는 절반의 완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소설은 실제 존재했었고 앞으로도 나타날 인플루엔자 소동과 언젠가 하시모토 전 오사카 지사가 언급한 제2수도 건설에 관한 내용을 버무려 놓아, 현대 의료계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냈다는 점만으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관료’와 ‘공무원’이란 단어의 어감 차이가 상당하듯 ‘횡단적 조직방어 회의’인 동시에 ‘불상사 뒷수습 회의’에서 보이는 가스미가세키는, 한국의 청와대와 국회가 언제나 뜨거운 감자인 것처럼 난도질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앞서 언급한 의료계의 폐단과 일본의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도주제를 끌어옴으로써 한층 현실감을 부여했다. 어느 날 나니와라는 도시에 신종 인플루엔자 ‘캐멀’이 발생하고 매스컴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우려하며 호들갑을 떤다. 인플루엔자 감염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검출 키트의 배분은 물론이거니와, 환자가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니와 시는 폐쇄되어 버린다. 여기에 보수를 넘어 수구적이기까지 한 의료계와 정치계가 끼어들게 된다. 작가가 소재로 썼던 인공 동면이나 장기 이식과 달리 『나니와 몬스터』는 그 무대를 좀 더 넓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한 손에는 잡히지 않는다(그러니 후속작이 필요하다!). 의료가 정치에 복수할 빌미를 줬는가 아니면 정치가 의료에 복수의 빌미를 제공했는가 하는 것은 점점 그 의미가 옅어지고 만다. 피차일반인 기성세대의 ‘꼰대주의’에 불과하니까. 듣자 하니 『스카라무슈 문』은 이 『나니와 몬스터』의 바이러스 이야기에 이어 백신을 둘러싼 사건 중심이라고 한다. 필연적이다. 『나니와 몬스터』에 등장했던 ‘스카라무슈’가 이번엔 전면에 드러나는 것일까, 하는 추측도 가능케 하고. 더군다나 『스카라무슈 문』을 읽으려면 이 소설을 읽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어느 정도는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했다가 차기작이 내용상 연결된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안심했기 때문에, 이제 『나니와 몬스터』의 결말에 대한 물음표는 없어졌다. 그러니까 일단 읽으면,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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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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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인용하기는 싫지만(나는 그의 비즈니스가 싫다) 마침맞은 구절이 눈에 띄었으므로 한번 적어 보겠다. 그가 말하길 무(無)는 피안의 향기다. 무는 초월의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 가슴이며, 일천 장의 연꽃잎이 만개하는 것이다. 이 무는 붓다가 니르바나(涅槃)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할 텐데, 무는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무는 충만하다. 가득차서 흘러넘친다. 무는 단순한 부재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그러니까 무(nothingness)는 물질이 아닌 것(no-thingness)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저녁매미 일기』에서는 그런 냄새가 난다. 향(香)내처럼 아무것도 없는 냄새가. 분명히 우여곡절(이 단어는 인간의 난장판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도록 권하는 기분이 든다)은 있다. 하지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도다 슈코쿠의 할복은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저 모양새에 지나지 않는다 ―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군대에 들어가면서 ‘자원입대’한다고 하는 경우처럼. 하지만 반대편에 서서 보게 되면 그의 죽음은 사회에 융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융화되지 않을 때에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이번에도 역시 죽음임에 틀림없다. 어느 쪽도 매한가지니, 그는 융화되는 쪽을 택한다. 비정상적 사회라 욕보이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다. 그는 부패한 게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설령 그럴지라도 기꺼이 그 게임에 참여한다. 지금 생각하면 독창적인 죽음이다. 동시에 그것이 그를 타인으로 하여금 독창적인 존재로 인식케 한다. 물론 집단의 일원으로 있으면서도 일면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집단 논리로 볼 때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라는 집단은 개인을 군중의 일부로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다는 쇼자부로가 이쿠타로의 돌멩이를 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대로 밀고 나간다. 하무로 린의 소설은 나오키 상을 받을 만하다. 굉장한 대작이어서라기보다는 나오키 상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주인공을 만들어 놓고 전개시키는 양태는 놀라울 만큼 선선하면서도 치열하다. 결국 아무것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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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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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니까 책과 신발, 인형, 더러운 양말, 텔레비전, 우표첩, 색 바랜 매트리스 따위의 사진이 마일스에게 왜 필요한 것일까. 리처드 골드스타인이 부고란에 쓴 기사보다 비교적 덜 삽상하고 덜 정제된 그 사진들이. 허튼소리만 해대는 입정 사나운 꼰대처럼 혹은 임신하자 부풀어 오르는 배를 무시하지 못하고 망가져만 가는 몸에 경악했을지도 모를 메리-리처럼 ㅡ 이런 불행들을 막기 위해 애쉬튼 커처가 했듯 마일스에게도 과거라는 탯줄이 필요했을지도(어떤 의미로든). 잊힐 권리라는, 이 세계에서 휘발되고 싶은, 어찌 보면 추레할는지도 모르는 그 생각이 차라리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명확하고 덜 불건전하다. 그래서 여기에 모리스의 시점이 간섭해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할 법하다. 왜냐하면 필라가 말한 대로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가 분(扮)했던 것을 이제는 모리스가 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 ㅡ 어쩌면 더 확정적일지도. 전쟁 후 돌아와 팽(烹) 당한 병사들처럼 모리스는 불륜의 귀환병이 되어 팽 당했다. 저들은 자기가 만들고 잃어버린 걸 찾으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며 모리스는 자기가 만들고 잃어버린 걸(마일스) 찾고 관찰하지만 섣불리 다다가지 못한다(어느 쪽이건 하루키가 만든 카프카보다는 덜 불손하다). 더군다나 그 빌어먹을 선셋 파크. 잿빛 지붕널에는 금이 가 있고 현관에는 조잡한 난간을 달아 놓은 그 집!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서 사람들이 시계를 찰 필요조차 없는 그 동네! ㅡ 외려 sunrise가 아니라 sunset이었던 것이 다행일까. 메리-리가 낳은 녀석은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며 연극을 하고 있고 마일스를 낳은 여자 역시 삶에서 연극을 하거나 연극 속에서 삶을 찾는다. 이런 판국에 인간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니까 어떤 식으로든 닥쳐야 한다는 논리는 벤젠같이 역겨울 뿐인 거다. 언젠가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가 (다시) 올 거라는 믿음은 쉽게 부서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최고의 해가 어디선가 갑자기 비죽 튀어나온다는 확신도 없으니까(결말을 늘여 썼다면 이 소설은 엄청난 재앙이 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리스가 자신이 쓸 책 제목으로 메모한 <사람들이 책을 증오하는 나라에서 문학 출판하기>는 <사람들이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증오하는 나라에서 다시 불행을 이야기하기>로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그러니까, 모리스의 시점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이건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다). 이 세계가 빼앗아 간 뒤 반환하지 않은, 임의의 선택이라는 말로 잘 포장되어 지금으로도 포화 상태인 그 분기점에서야말로 ㅡ 오히려 자성(磁性)을 띤 대척점을 향해 오래달리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덧) 과거라면 전쟁에 끌려갔을 법한 나이의 필라(그녀가 여자라 하더라도)가 이 소설의 실낱같은 빛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비중은 있되 발언권이 적었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마일스를 부모의 곁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그녀의 언니라는 설정도 괜찮았고. 빙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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