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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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은 자신의 책(『죽음의 무도』)에서 셜리 잭슨의『힐 하우스의 유령』과 함께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바로 이 헨리 제임스의『나사의 회전』을 꼽는다 ― 동시에 유령의 원형에 관해서라면 친절한 꼬마 유령 캐스퍼를 논의하는 게 더 낫다는 발랄한(!) 단서를 달아두고서. 시골 대저택에 온 가정교사가 유령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심리 공포 소설『나사의 회전』은 다분히 중의적인 동시에 다의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다. 어린애들의 마음이 구부러져 있거나 가정교사의 시력이 좋지 않거나 하다는 건데(제발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 고상한 문장으로 하여금 공포가 공포로서 온전히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비밀은 비밀로 남겨두는 어정쩡한 미학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과정은 ― 두 번쯤 읽으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 쉽게 삼킬 수 있게 만들어진 캡슐 속의 약이 아니라 겉의 캡슐이 부서져 바닥에 모조리 쏟아져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가정교사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대저택의 주인이라는 작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고 게다가 마지막에서 아이는 제 가정교사에게「이 악마 같으니!」― 다른 판본에서는「이 악질아!」라고 ― 하고 소리친다. 가정교사가 헛것을 봤거나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하고 그냥 넘겼으면 좋겠으나 간단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니 실제로『나사의 회전』은 읽고 난 다음이 고생이다.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을 따른다는 칸트의 통찰이나 그와 반대로 현상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려했던 니체를 굳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끝에 가서 아이는 죽음을 맞게 되지 않던가? 또 이야기는 주인공이 아닌 가정교사의 시점에서 철저히 진행되지 않던가? 그러니까 독자 역시 그녀가 보게 되는 것 이상은 볼 수가 없잖은가. 유령이 오직 가정교사에게만 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녀의 환각에 불과한 것이지만(독자로서 그녀의 정신 상태는 믿기 힘든 점이 많다!) 아이들에게 정말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도 없는 이유다. 물론 시대상과 프로이트를 들어 섹슈얼리티를 언급하면서(막대기와 탑 vs 나뭇조각의 구멍과 호수) 그녀의 성적억압과 욕구의 좌절에서 오는 극도의 환상으로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작품 속 유령의 실체감은 상당하다. 이를테면 유령을 빼면 이상한 점이 발견되는 것인데, 더글러스의 긍정적 평가, 본 적이 없는 퀸트에 대한 묘사 등이 그것이다 ― 이것도 다 미친 가정교사의 탓이고 모든 게 다 환상이며 어쩌다 맞아떨어진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우연을 그렇게도 좋아하니)폴 오스터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적확한 답은 없고, 단순하다면 한없이 깔끔하지만 복잡하다고 보면 아주 훌륭하게 공포란 장르에서 가치 있는 시도를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지적 게으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제임스의 유령(들)>만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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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 하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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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없다고 봄)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코나투스(conatus)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어땠나. 그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이렇게 비판했다. 「자기 보존 명제는 틀렸다. 그 반대가 참이다. 바로 살아 있는 것들 전부가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것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위한다.」 이것은 물론 니체의 ‘힘에의 의지’라는 명제로 뻗어나가는 개념이 되겠지만, 잠시 『망량의 상자』에서의 가나코와 요리코의 경우에 빗대어 볼까. 철로에 떨어진(혹은 떨어뜨린) 행위는 가나코와 요리코를 이어주는 끈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생한다는 소녀들의 생각에서 말이다.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위한다.’ 여기서 이 문제가 개입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나코가 되고픈 요리코의 행위는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망량(魍魎) ― 망자의 간을 먹는 요괴 ― 의 그것과 다름없을 정도다. 그리고 시작되는 교고쿠도의 이야기. 아, 이 장광설, 그의 말대로 결국 뒷맛이 좋지 않게 됐다(작품을 다 읽은 후의 독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은 전작 『우부메의 여름』에 비해 다소 커진 스케일과 한층 더 신선한 사건에의 접근방식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교고쿠도 시리즈’의 시점은 역시 세키구치여야만 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 소위 압축되고 집적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사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던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말이나 라캉(Jacques Lacan)의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와 같은 논제를 떠올렸다. 오히려 인간의 필수적인 항목일지도 모르는 욕망 ― ‘욕구’와는 다른 개념으로서 ― 이 엉뚱하게 분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결여의 모델에 따라 욕망을 사유하는 것이다. 결핍된 무엇인가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라는 것 말이다. 실로 금기를 통해 욕망의 주체가 탄생한다는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통찰과 멋들어지게 교차되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의도치 않게 교고쿠도식 장광설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작품으로 돌아가자. 4개의 사건, 즉 1)가나코 살인미수사건, 2)가나코 유괴사건, 3)사이비 교주 사건, 4)연쇄 토막살인 사건까지. 정말이지 (에도가와)란포식 메스꺼움을 자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전작에 비해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굉장히 속편하게 치부하고 마는 교고쿠도의 가치관도 이번엔 논란을 빚을 여지도 있고 말이다 ― 물론 그 특유의 장광설에 독자들은 흐물흐물해지고 말 테지만.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다분히 사이코패스적 인물들의 과중한 겹침이나, 특출한 건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여전히 의구심으로 남는 작가의 문장력, 그리고 몇몇 서브테마 구성에서의 유기적 연관과 치밀함 등등.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가나코와 요리코의 내러티브를 좀 더 구체화하고 확장시켜 끌고나갔으면 하는 것까지. 그러나 이 작가,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줄곧 중심을 잃지 않고 결말까지 치닫는 일련의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도 범하지 않았다. 마치 시종일관 등장하는 ‘구보 슌코의 장갑’처럼, 평이하달 수도 있는 논제를 가지고 끝까지 독자로 하여금 졸이게 한다. 기술(記述)적 매력이다. 온바코의 이야기와 병치되며 이어지는 구보 슌코의 이야기와 그와 함께 진행되는 교고쿠도식 철학(아, 매력적인 장광설이여!)도 꽤 수준급으로 정제되어 있다. 상자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또 다른 상자 속의 존재,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우리는 그것을 열지 않으면 상자 속의 존재를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덧) 초반에 언급했듯 『망량의 상자』는, ‘뒷맛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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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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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책머리에’ 부분 6번째 행을 읽고 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광주 혁명’이 아닌 ‘광주 사태’란 단어가 등장했다. 설마 이 책 전체가 아래에서 위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관점은 아닌지,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을 보면 동학운동이나 조선사회를 통틀어 ‘인민’이라는 단어의 개념 ―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 혹은 (대체로)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에 대한 개념 역시 ― 이나 지식은 희박했으며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저자는 ‘인민의 탄생’에 대해 올바르고 적확하게 통찰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에 앞서『인민의 탄생』은 개념의 공허한 동어반복과, 진실과 사실에 있어서 독자를 오도하는 부분도 많았음에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책이 다른 것들보다 눈에 띄게 좋아 보이지 않는 점이다……. 담론과 공론에 있어 언문의 역할을 되짚어보고 기존의 서양산(産) 사회과학과 서양식 잣대를 벗고서 조선사를 조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처음 언급했듯이 위에서 아래를 ― 혹은 기득권의 입장에서 ― 내려다보는 시각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내가 이 책에 대해 자그마한 평가를 내린다면, 굴절된 프레임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론장에서의 인민(의 탄생)이란 피라미드 꼭대기의 몰락과 붕괴에서 기인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거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합의가 ‘위’가 아닌 ‘아래’에 원인이 있다고 하기에 나는 이것이 관념적으로든 뭐든 어긋났다고 본다.『인민의 탄생』은 한글이 탄생되어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읽고 쓰고 생각할 줄 아는 새로운 인민이 출현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에 있어서 공론장과 합의의 결함 및 결핍은 교양시민이 부재했기 때문이란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사회적 합의를 주도할 교양시민이 없어 마침내 공론장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인민의 탄생』은 참 잘 만들어졌다. 몹시도 많은 사회 과학자들을 끌어오고 올바르지 못한 서구식 잣대를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을 무렵 저자가 일간지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뭐라고? “SNS가 대안 공론장이 되기엔 아직 이르다. 여과기능 없는 온라인 공간의 대화는 개화기 인민들이 소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소문에 살을 붙이고 극적 요소를 보탠 것 같은 현상일 뿐이며 자기검열의 과정을 겪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나는 한국 사회를 공론장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것이 ‘반쪽짜리’라는 말에는 쉬이 찬성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공론장과 합의가 신통치 않은 것은 교양시민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썩은 기득권의 썩은 논리와 지배와 피지배적 인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민과 공론장과 합의의 문제를 엉뚱한 데서 찾으려하니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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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천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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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말이지만 돌고 돌아 돈이라 했다. 또 책의 저자는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 이 말이 경제적인 진술이라기보다 도덕적 진술이라 했다. 부채란 뭐고 경제란 뭔가. 경제란, 인간들이 (물물)교환을 하려는 타고난 성향을 발휘하는 무대다. 그런데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매개체가 필요한데 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돈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물물교환은 빚으로 재해석되었다. 때로는 지루한 장광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빚이란 건 결국 돈의 시작을 뜻한다는 논리 아래 저자는 애덤 스미스조차 끌어내려 버린다. 그래서 ‘경제의 역사는 바로 부채의 역사’라는 명제가 제시되기에 이른다. 그럼 도대체 부채는 왜 발생하는가? 이 질문에 『부채 그 첫 5,000년』은 (미국식)주류경제학에 반기를 들며 그것이 얼마나 관념적이며 추상적인가를 여지없이 까발린다. 부분적으로 이것이 일관성 있는 논거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빈약한 맹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부채’라는 문제를 고급스럽게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점은 칭찬할만하다. 저자의 말대로 상업이란 것이 ‘신뢰’로 시작되었다한들 오늘날 현대의 돈은 사실상 주로 정부 부채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바로 부채는 세계정치의 핵심적 이슈가 되었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나 아이티를 보면 그것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미국의 외채는 ― 오늘날의 현실은 조금 바뀌긴 했지만 ― 미국 재무부 채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채무국은 늘 있어왔다. 물론 당연히 부채와 함께 말이다. 과연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 자체는 ‘비열한 거래’인가? 채무는, 일정 액수의 돈을 지급할 의무이다. 따라서 이때의 돈을 지급할 의무는 정확히 그 양과 부피가 정해지게 되고, 그러므로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으로 여겨질 가능성조차 존재한다. 결국 이 부채는 원금, 이자, 차감잔액(벌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하자)으로 환원된다. 3년 전쯤 전 세계의 경제를 마비시킨 금융위기가 있었고 진정한 문제의 알맹이는 드러나지 않은 채 흐지부지됐다 ― 여기서 우스운 것은, 세계를 대변하는 미국이란 나라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망 온 채무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문득 IMF는 경고했다. 이런 식의 메커니즘이 지속된다면 다음에는 어떠한 구제금융도 불가능하다고. 정말이지, 이 책은 금은통화주의와 돈을 하나의 관념적 대상으로 하여 부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뿌리 뽑을 생각인 것 같다. 부채를 진 채무자는 채권자로 하여금 자신들을 조종하거나 어떠한 처분을 내릴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줄 수도 있다. 이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연설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는 우리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고 식은땀이 등을 적시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용이란 무한히 창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이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금융자본주의의 기본적 구조가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단지 두려워할 뿐이다. 중세의 ‘시장 포퓰리즘’이란 개념은 모순투성이가 아니었던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애덤 스미스가 창조한 부채가 없는 시장 유토피아는 뛰어난 통찰력에 의해 탄생한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껏 목격한 것은 더없는 음흉한 정치적 속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고 본다. 저자는 부채를 ‘약속의 타락’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때문에 저자가 제기한 문제, ‘세상에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는 흥미로운 역사는 당연하게도 읽어봄직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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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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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생략)



어쩌면 추리소설로서는 꽝일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지지부진한 장광설이라 느끼게 할 만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렇게 따져들기 시작하면 이 책 전체가 장광설일 것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우부메의 여름』은 이 ‘장광설’이 매력일지도 모른다. 작품 전체를 단단히 감싸 쥐고 있는 건 역시 교고쿠도의 길고도 긴 입바른 소리로 시작되는 발화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 뒤표지의 간단한 카피문구만 보고 내용도 간단하다고 단정하는 건 피해야 할 일이다. 이야기의 외견은 어떨지 몰라도 그 플롯이나 내용인즉슨 시쳇말로 ‘구멍 숭숭 뚫린’ 작품이 아니므로. 전후 새로운 일본이 만들어지는 분위기도 다소 녹아있고, 등장인물들 간의 밸런스나 내용적 밀도의 밸런스, 일상적 세계가 파괴되는 폭발력 또한 기이하면서도 철저하다 ― 특히 내러티브의 농밀함은 흥미롭다 못해 두렵기까지 하다. 20개월 동안의 임신이라는 가히 기담과 괴담을 넘어선 흉물스러운 주제부터가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 읽어나가는 매순간마다 환상(이라 여겨졌던)의 파편들이 모이고 모여,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나의 현상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광경으로 재발견됨에 따라 이야기는 힘을 갖게 되고 또 그만큼 독자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는다.



의식과 무의식, 인간과 요괴라는 평행선처럼 보이는 하나의 선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트릭의 면모를 따라가다 보면 환상이라는 포르말린에 담긴 새카만 눈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필력과 기술적(記述的) 설득력으로 인해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러우면서도 몇몇의 단점은 순식간에 장점으로 온전히 변하고 마는 작품이다 ― 초자연현상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다……. 완벽한 밀실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2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임신을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것이 추리소설로서의 발로가 아니라 ‘요괴’와 ‘초자연현상’ 그리고 ‘현실’을 얘기하지 위해 추리라는 외투를 입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작가는 요괴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견 충분히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퍼즐, 심상치 않다(서두에 추리소설로서 꽝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을 한 이유다). 굉장히 어지럽고 불친절하다, ― 작가의 일련의 작품들,『항설백물어』나 이『우부메의 여름』이후의 ‘교고쿠도 시리즈’를 봐도, 역시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건 ‘이 세상에 이상한 일 따위는 없다.’ 식으로 끝나버린다 ― 단순히 이렇게만 치부해버린다면 그저 읽는 재미만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글쎄, 이 ‘인식’에 대한 세계관이 환상과 초자연현상에만 의존한다면 분명 그럴밖에. 나로서 이 작품이 좋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러한 기괴함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칵테일파티 효과로 대변되는 인간의 의식이 환상을 뛰어넘는 소재와 맞물려 소름끼치는 이야기로 빚어지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의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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