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집 - 하 - 미야베 월드 제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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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한효석의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시리즈 ― 찾아보고 놀라지 말라 ― 는 인두겁의 사회 ․ 문화적 징표를 보여준다. 각 작품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감추고 있긴 하지만 ‘인간의 쓸데없는 피부’에 대한 것만은 동일하다. 다음은 한효석 작가의 말. 「5밀리미터만 벗겨도 우리는 고깃덩어리다. 부와 명예를 가졌을 때에 자신을 신격화하고 착각하며 남을 지배하려 하다 보면 동물들 사이에서는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마루미의 바다에 토끼가 날면서부터, 이 고깃덩어리들 사이의 카드놀음이 시작된다. 드라마틱하다는 건 이런 거로군.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가 님의 신비가 끝내 신기루로 남을 것임을 짐작했을 땐 좀 너무하다 싶었지만 어차피 그보다는 ‘가가 님과 아이들’의 이야기니까 뭐 그쯤은 봐주기로 했다(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인즉슨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낸 셈. 홑 떨어져있는 가가 님임에도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데, 오히려 외딴집을 둘러싼 바깥의 외딴집들이 더 두려움에 떨게 되고 ― 우사나 호가 시도하는 선문답은 좀처럼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으면서 마루미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다. 그리고, 적어도 라스트신을 향해 갈 때에도 와타베와 우사는 살아있어 주길 바랐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다. 이래서는 ‘민폐 가가’다. 그 때문에 와타베의 르상티망이 과연 제대로 결실을 맺은 것인지, 우사와 호의 텔레파시가 제꺽 잇닿아있긴 한 건지도 의문스러워진다.

 

 

 

「비는 누구의 머리 위에나 똑같이 내린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ㅡ 하권 본문 p. 338

 

 

 

읽어보면 알겠지만 『외딴집』은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 그 일상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주어진 시대를 백그라운드로, 연기하는 건 개개인이. 그런데 이따금 이 작품을 두고 쉽게 읽을 수 없다는 얘기를 주워듣는다. 에도 시대의 어려운 관직명 때문일 수도 있고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변죽만 울리는 가가 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얘기들은 작품을 읽을 때의 노선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듯싶다. 초반부터 시작되는 잠잠한 드잡이를 맛보고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까. 게다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어떤 현대 스릴러물에도 뒤지지 않는 박진감도 엿보이는데 말이지, 그리고 감동도. 앞서 언급했듯 ‘드라마틱하다’는 건 ― 여기서의 방어기제 ― 호의 바보스러울 정도의 맑음(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호를 보면서, 호의 얼굴 위로 치매에 걸린 우리 할머니가 겹쳐졌다)이 외딴집과 마루미를 무대로 한 수수께끼 같은 원흉에 대립항으로 작용하면서 만들어지는 애달픔에서 파생된다고 본다. 그럼으로 ‘민폐 가가’에서 ‘신(神) 가가’로의 자연스런 연착륙도 이루어진다. 여전히 마지막 맺음은 슬퍼서 싫지만…… 아 씨, 눈물이 다 나네.

 

 

덧) 원제 『孤宿の人』의 ‘人’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마루미에 내리던 비는, 이제 조금은 그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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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도서관
아비 스타인버그 지음, 한유주 옮김 / 이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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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도서관 사서는 여성 재소자 대상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쇼트(short)에게서「나랑 한 번 할래?」소리를 듣거나 속사포 장광설을 자랑하는 프랭크로부터「신을 믿나?」하는 말을 듣는다. 사실 쇼트의 말을 듣는다면 친절하게 윙크라도 찡긋했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홉스의『리바이어던』을 떠올리며 고독하며(solitary), 비루하고(poor), 악랄하고(nasty), 난폭하며(brutish), 짧은(short) 카테고리로 여성 재소자들을 머릿속으로 가름했다. 그가 그녀의 농담에 멋진 리시브를 하지 못한 이유는 거기 있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교도소 도서관 사서로 취직한 주인공은 한마디로 ‘먹물’이었다.「폭력배들이 언제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 봤어? 이 새끼들은 일 좀 해야 돼. 일이라도 하는 게 걔들한테도 좋아. 우리는 걔들한테 빚진 거 없어. 걔들이 우리에게 빚을 졌지. 봐, 걔들은 인생을 완전히 망쳤어. 자네는 그들에게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거라고. 자네가 그들에게 일을 시키고 또 그들이 일을 잘해낸다면 그들은 여기서 나가는 날 이렇게 말하겠지. ‘뿌듯한 수감 생활이었어.’ 그러면 된 것 아닌가?」이런 교도관의 말에 분개했다면 주인공 아비는 이미 그들과 같은 수감자가 된 것이리라. 감옥이든 사회든, 세상은 인간의 복수형이 아니던가? 어딜 가나 인간, 인간, 인간이다. 그리고 교도소에는 수감자가 있었다. 교도소라는 공간이 유토피아적 환상을 산산이 깨뜨려버릴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느냐 혹은 그들‘과’ 바라보느냐의 차이가 될 것이므로. 아비가 조금씩 투어(tour)하는 기분으로 교도소에 드나들 때 비로소 그는 ‘교정’이라는 단어가 과거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감옥의 문이 있던 텅 빈 장소처럼 공허한 말이라는 걸 깨달으리라. 재소자들을 보며 아비가 어떤 종류의 감화를 받든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서로의 관계가 관찰하거나 관찰당하거나 하는 평행선이 아닌 그저 물음표와 느낌표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일일 테니까(이따금씩 온점도 찍어주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동등한, 그런 권리 ― 아비는 재소자들보다 더 재소자같이 되어간다.「너는 체제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한 거야. 너는 그 체제로 먹고 살지.」주인공 먹물은 과연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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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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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텍스트와 서브텍스트의 맞물림. 그거다. 미스터리나 이런 괴담이 갖는 강력한 헤게모니는 현실에서 느끼는 두려운 마음을 일종의 (설명하기 힘든) 형태로 만들어준다는 것에 있다고 여기고 싶다. 뭔가를 맞닥뜨리고 인식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퓽, 하고 쏟아내는 거다. 어떤 생각들을 전부 마음에 넣어 뚜껑을 닫아버리면 그만이지, 하고 쉬이 치부할 수 없다.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짐을 내려놓는다는 뜻도 될 수 있으며, 타자에게 마음을 내비침으로써 그 두려움이 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마지막 이야기「이에나리(家鳴り)」에서 저택을 지키는 관리인 ― 왠지 웃을 수만은 없는 ‘끝판 왕’ 같은 느낌인 걸 ― 이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길목에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을 이『흑백』의 무대인 미시마야(三島屋)라는 주머니 가게에 빗대어 말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러모을 수 있는 주머니에 주인공 오치카(おちか)를 대입하려는 뜻이겠지. 그녀의 오빠 기이치(喜一)가「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조금은 구원받았다는 거냐?」라고 묻는 대목은 숙부 이헤에(伊兵衛)가 ‘흑백의 방’을 그녀의 물리치료실로 사용한다는 뜻도 되리라. 사실 이런 전개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소하고 계산적인 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한다.「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가고 있는 거야.」살아 있었을 때 저지른 어리석은 잘못에 대한 후회를 듣는다 ― 이거 원 장화홍련이 따로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은『흑백』은 모노노케(物の怪) 이상의 것을 선사한다.

 

 

이탈리아의 소도시 팔치아노 델 마시코(Falciano del Massico)에선 죽음이 불법이라고 한다. 죽는 걸 금지한 조례. 그간 묘지를 할애해 주던 옆 도시에서 더 이상 그렇게 못 한다고 선언하자 시장이 주민들에게 죽지 말라고 법으로 정해버린 것인데, 그가 새 묘지를 세울 때까지 시민들에게 죽지 말라고 명령했단다. 세 번째 이야기「사련(邪恋)」과 네 번째 이야기「마경(魔鏡)」에 등장하는 마쓰타로(松太郎), 오사이(お彩), 이치타로(市太郎) 등은 이래서야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해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쨌든 귀신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산 사람이다. 이건 틀림없다. 나와는 ‘다른’ 마음들을 듣는 것. 아니 들어주는 것. 귀신의 처지라면 산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 아닐는지. 그저 잠시만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마음 한켠만 내어주었으면 하는 거다.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이것들은 어쩐지 친숙하지 않은 상황에 마주할 때만 그 효력이 있는 것 같다.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은「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心外無物]」고 설파했다. 어느 날 제자가 꽃을 가리키며, 세상에는 마음 바깥에 사물이 없는데 이 꽃은 깊은 산에서 저절로 피어나 저절로 지니 그것이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자 선생이 말했다.「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 이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는 순간 이 꽃의 모습은 일시에 분명해진 것이네. 이로부터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네.」음, 그러니까, 만약 꽃을 보지 않았다면 꽃에 대한 사변도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말일 것이다.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거창하고 대단한 일인가(이렇게 적고 보니 작가의 다른 작품『화차』가 생각난다. 단지 말하고 듣는 행위가 질펀한 어둠으로 끝났으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기쁨의 윤리학’은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듣는다’와 ‘말한다’, 이것으로 나는『흑백』은 이미 정의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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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역사 -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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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factory에 관한 통사, 공장사(史)는 경제사와 이어진다. 또 노동이라는 단어 ― 근대에 들어서야 다소간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버린 ― 는 산업혁명기 자본가와 지식인들에 의해 전개됨으로써 ‘노동윤리’와도 맞물리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애덤 스미스나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거쳐 왔기에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장에서의 장기간 반복되는 단순작업을 참아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이직을 막기 위해 포드가 그들의 임금을 두 배로 올렸다는 일화를 19세기 초 영국사회에서의 공장 규제와 나란히 놓고 보면 또 어떨는지. 최근 국내의 한 출판사(물론 엄격한 의미의 공장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에서 하루 6시간씩 주 30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임금삭감 없이 말이다 ― (좀 다른 이야기지만)희한하게도 MBC 김재철 사장은 파업노조는 그대로 두고 계약직 일자리를 늘렸는데 그러면서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특별 수당을 지급하는 일을 저질렀다(그들은 돈을 모아 파업현장에 전했다고 한다). 왠지 모르게 공장, 회사, 노동자, 근로자, 파업, 임금, 노동이란 단어가 한데 섞여 하나의 담론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1830년대 영국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고용상태에 대해 그들을 보호하려는 의회입법과 노동시간단축이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것을 상기해 비교해보면 지금의 피고용자의 위치는 카스트 저 아래쪽에 있는 것만 같다. 자본과 노동의 지속적 동거양식은 20세기 들어 복지국가의 모델이자 ‘무거운 근대성’ ― 포디즘이라고나 할까 ― 을 상징하는 체제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 1911년 영국의 사회보장법으로 국민보험법, 국민보험제가 도입되고 세계대전을 지나 국민보험에 의거한 실업급여, 노령연급, 직업소개소, 실업수당 등 다양한 제도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계획적으로 잘 짜여 체계적인 모습이었다고 보기는 다소 무리가 있기도 하다. 전쟁과 그 후의 혼란에 따른 임시방편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이 실업정책이 (성급한 결론이긴 하지만)오히려 실업률을 높였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실업정책은 그 문제를 공적 관심사로 이끌어가 공공의 담론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공장은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과연 인간은 탈공장을 선언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인간 노동이 이전과 같은 노역의 형태가 아니면서도 기계와 함께 연결되는 방식의 재현이 아닐는지. 즉 인간의 주체적 사유와 판단이 기계의 움직임을 이끌어감과 동시에 생산과정 전체에 인간의 의식과 활동을 더욱더 중시하는 그런 변화에 대한 탐색 말이다(p.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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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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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스펙트럼으로 한국을 쪼개보니 제목과도 같은 그들의 따뜻함과 코리안 패러독스의 그늘이 동시에 보인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은 2, 30대가 가장 억울해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스위스 패러독스로 대변되는 대학진학과 취업에 관한 것이리라. 비교대상이 되는 건 사람이나 국가나 참 씁쓸한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건 역시 저자가 외치는 <따뜻한 경쟁>일까. 사실 어떤 시스템이든 경쟁이란 걸 피할 도리는 없으니, 한국식 무한 경쟁이 아닌 따뜻한 경쟁을 통해 공존의 틀을 조율할 줄 아는 법을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구나 한국은 전체의 성과를 엘리트가 독식하고 소위 인생의 성패라는 것이 타자에 의해 좌우되는 세계가 아니던가. 경쟁을 하기도 전에 나라는 인간이 판가름 난다면 맥 빠지고 허탈한 감정을 넘어서 화가 치밀 일이다. 나는 특히 이 『따뜻한 경쟁』을 읽으며 시민 참여, 시위, 소통의 이야기를 들을 때 『호모 레지스탕스』(해피스토리, 2011)라는 책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기본관이면서도 기본권으로서 대접을 못 받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권(그 중에서도 파업을 할 수 있는 단체행동권)과 집회, 시위의 자유라 생각한다(『호모 레지스탕스』). 한국의 헌법 제21조는 집회에 대한 모든 허가제를 금지하고 있다.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도록 하면 국가는 당연히 자신에 반대하는 집회에 대해 허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대 집시법 제10조는 또 어떤가. 일몰 후의 집회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나. 그러니까 결국, 이미 있는 다른 규정에 의해 집회의 자유를 거의 전면적으로 제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간집회에 대해 또 다른 제한을 두는 건 과잉금지다. 그럼 여기서 스위스의 얘기를 해볼까. 스위스 최대 도시이자 유럽 금융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취리히에서는 2011년 9월 젊은이들이 주말 밤 거리에서 불법으로 파티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을 빚는 일이 잦았다. 9월 10일 밤에는 약 1000명의 젊은이들이 취리히 호수 주변의 광장에 모여 <상업적인 이벤트 대신 젊은이를 위한 자유 공간을 허용하라>며 노상 파티와 시위를 병행하다 경찰과 마찰을 일으켰고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총탄을 쏘며 진압했다. 놀라운 것은 다음 일이다. 취리히 경찰이 신선한 대응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완벽한 밤 문화>를 위한 제안과 젊은이를 화나게 한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접수하기로 한 것이다. 또 의견을 얘기해주면 적절한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단다 ― 실제로 성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심야 도심시위는 없어졌다고 한다. 어떤가. 앞서 말한, 정확히 말하자면 스위스와 한국을 비교하기 위해 예로 든 두 가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스위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 드는지 어떤지. 물론 나도 한국 사회가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따뜻한 경쟁』이 단순히 양국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독자들을 고뇌의 심연으로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집필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회의 몇몇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이미 흘러든 거대한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을 쏨과 동시에 그 전환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실천과 (따뜻한)경쟁이 필요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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